[센텐스로그] 하늘로부터 지혜를 가져다주소서
일요일마다 훌라를 춥니다. 랄라의 추천으로 지난 2월부터 훌라를 배우기 시작했죠. 지난해 말부터 올해 3월까지 유방암 의심 소견을 진단받아 정밀검사, 조직검사를 이어오며 심신이 피폐해지던 때였습니다. (결과는 양성, 유방암이 아니었어요!) 유방암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니었건만 확진으로 향해가는 지지부진한 과정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엔 두 주먹 꽉 쥐고 ‘아닐 거야'라는 마음으로 버티느라 몰랐지만, 돌아보니 그렇더군요.
“훌라를 출 때는 용서가 된다” 훌라 강습료를 곧바로 입금하게 만든 랄라의 말. 암 의심 소견을 진단받기에 좋은 때라는 건 없겠지만 더욱 좋은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 희망퇴직 후 커리어를 재정비하느라 분주했고, 배우자와는 서로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들로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고통에 고통이 덧대어져 더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에 모든 걸 포기하고픈 마음에 다다르기 직전이었죠. “왜 나야? 왜 지금이야?” 저는 매일 억울했고, 화가 났습니다.
대상이 불분명해 안에서 곪기만 하는 억울과 분노. 자꾸만 나를 주저 앉히는 그것들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끊어내고 싶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고, 갈피를 잡지 못해 멍하니 휘둘리기만 할 뿐이었어요. 그러다 랄라의 말을 듣고는 어쩌면 내게 필요한 건 용서가 아닐까 하는 이상한 확신이 불현 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모된 마음으로는 스스로 조차 용서할 기운이 없었고, 마음을 움직일 여력은 없으니 몸뚱이라도 움직여보자는 생각으로 훌라 교습소를 찾았습니다. 곡선으로 유연하게 몸을 움직이고, 애정 어린 손짓으로 자연과 마음을 표현하고, 훌라를 추는 동안은 내내 미소를 지어야 하는 행위가 깊숙한 곳에 갇혀있던 몸과 마음 구석구석을 톡톡 건드렸습니다. 누군가는 훌라를 “움직이는 명상”같다고도 했는데 훌라를 추고 나면 어쩐지 개운하고 가뿐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훌라 수업 전후로 선생님과 수강생들은 동그랗게 모여 앉아 눈을 감고 의례를 행합니다. 하와이에서는 중요한 공연이나 수업, 사냥, 모임, 기도 등 행사를 앞두고 의례를 진행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 신, 조상, 하늘 등 자신의 영적 가이드에게 바치는 첸트(chant)를 읊습니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읊는 E Hō Mai(에 호 마이)는 자신이 하는 행위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를 염원하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E hō mai ka ‘ike mai luna mai ē
하늘로부터 지혜를 가져다주소서
O nā mea huna no’eau, O nā mele ē
노래 속에 숨겨진 특별한 의미를
E hō mai, E hō mai, E hō mai ē
가져다주소서, 가져다주소서, 가져다주소서
의미부여중독자인 내게 무척 매력적인 문장이지만 낯선 언어로 지혜를 구하는 주문을 따로 연습하지는 않았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다른 이들의 소리를 듣고 띄엄띄엄 따라 할 뿐이었죠. 훌라를 시작한 지 7주 차가 되던 지난주, 처음으로 첸트를 자연스럽게 외워 읊었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읊을 때마다 의미도 같이 떠올랐어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가 왜 훌라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왜 지난한 고통을 겪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저는 무언가를 완전히 용서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훌라 몇 번 춘다고 모든 게 용서된다면 지구에서 전쟁은 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이전보다 억울함과 분노의 무게가 줄은 것은 분명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나는 암 환자가 되지 않았고 다음 커리어 여정의 청사진도 드러나고 있으며 흐트러졌던 관계도 회복되어 갑니다.
이 모든 게 훌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시간문제였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저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 내가 하는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길 염원하는 문장을 외고, 용서와 애정을 구하는 마음을 담아 몸을 움직입니다. 매주 이 행위를 반복하면서 매일, 매시간, 매초 지혜를 구할 뿐이죠. 내가 살아있는 의미를 알아가기를 바라며. E hō mai ka ‘ike mai luna mai ē, 하늘로부터 지혜를 가져다주소서.
written by 치즈
<E hō mai 외며 함께 훌라 추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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