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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세계여행 Dec 23. 2019

내가 인도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 (상)

시간이 멈춘 나라, 인도

라이킷과 구독, 그리고 댓글을 부탁드려요! 독자와의 만남이 작가에겐 가장 큰 행복입니다.


1.

 '인도를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여행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두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여행지라고 치를 떨지만, 어떤 사람들은 인도가 너무 재밌어서 인도'' 수차례 방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예 6개월짜리 관광비자를 받아 6개월 내내 인도'만' 여행하는 사람들도 왕왕 봤다. 나는 어떻냐고? 처음에는 악에 받친 증오로만 가득차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도에 적응했다. 이젠 마냥 증오하지만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인도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코끼리가 시장골목을 돌아다니는, 인크레더블 인디아!

2.

 "인도는 변하질 않는거 같아."

 여행 중에 만난 동행에게서 들은 얘기다. 인도여행만 세번째(2006, 2009, 2019), 그것도 올때마다 한달 이상 여행했던 인도 마니아다. 예전과 비교하면 거리에 가끔 쓰레기통이 설치됐고 스마트폰을 쓰는거 빼고는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단다. 재밌는건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단 점이다. 나는 인도가 처음이기 때문에 '시간이 멈춘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인도를 사랑할수 없는 이유는 길거리에 지뢰찾기 마냥 살포돼있는 소똥도, 퍼스널스페이스(personal space) 따위는 나를 막을수 없다는듯 들이대는 인도인들의 노빠꾸 정신도, 길거리를 락페스티벌로 착각하게 만드는 릭샤의 소음과 매연도 아닌 바로 이 때문이다.


 개발도상국은 으레 그렇지 않냐고 묻기엔 조금 다른 문제다. 인도는 10억이 넘는 인구, 인종 및 문화적 다양성, 20세기 후반 발전하기 시작한 개발도상국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자주 중국과 비교된다. 중국과 인도는 국경을 접하고 있어 서로 으르렁대는 라이벌이다. 나는 중국을 총 세번(2009, 2015, 2019)을 다녀왔는데 갈때마다 놀란다. 하루가 멀다하고 빠르게 변하기 때문이다. 인도와 비슷한 국민소득의 동남아 국가들(태국, 베트남)과 비교해도 마찬가지다. 세계 6위의 경제대국이라기엔 뭔가 느낌이 미묘하다.


 왜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크게 세가지 이유가 떠오른다.



2.첫번째, 카스트.

 "식민역사와 카스트를 빼고서는 인도를 이해할 수 없다."

 트리밴드럼에서 만난 레지타가 한 말이다. 젠더정치로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에 있는 친구다. 한국에서 '카스트 제도'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이 개념은 엄밀히는 제도가 아니다. 제도라면 정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현대 인도를 포함한 어떤 국가도 카스트를 명문화한 적이 없다. 단지 힌두교의 개념인 카스트를 부정하지 않을 뿐이다. 현대 인도조차 헌법에서 '인종, 카스트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카스트가 없다는게 아니라 있긴 한데 그것 때문에 차별받지 않는다고 말하는거다.


 카스트는 일종의 직업 분류라고 할 수 있다. 카스트의 하위 개념으로 쟈티가 있는데, 한 쟈티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다. 카스트와 쟈티는 핏줄을 타고 이어지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는다. 세탁소집 아들은 세탁소를 하고 슈퍼집 아들은 슈퍼주인이 되는 식이다. 직업의 개수만큼 수많은 쟈티가 존재하는데, 이 쟈티를 비슷한 성격끼리 묶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네 개의 카스트로 구분한다. '문자를 해석하고 그 뜻을 전하는' 브라만(Brahman)은 성직자와 교사 등의 직업에 종사한다. '무력을 키워 공동체를 지켜내는' 크샤트리아(Kshatria)는 무사 혹은 귀족의 위치다.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바이샤(Vaisya)는 농부, 상인, 공예가의 직업을 갖는다. (그래서 인도 최고의 부자도 바이샤 출신이다.) 수드라(Sudra)는 도축이나 빨래 같은 고된 육체노동을 한다. 수드라를 제외한 나머지 카스트들의 관계는 사제, 기사(혹은 영주), 평민으로 구성된 중세 봉건제와 비슷하다. 재밌게도 요리사는 반드시 브라만이어야 한다. 사람이 먹는 음식이므로 최대한 고결하게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최대의 야외 빨래터, 도비 가트(Dobi Ghat)
빨래꾼들인 도비왈라들도 대대로 같은 직업을 가진다.


 핏줄에 따라 카스트와 쟈티가 이어지고, 이에 따라 직업이 결정되니 인도에선 가족 대대로 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직업 뿐만 아니고 결혼 상대도 같은 카스트 내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도 맞아야 한다. 물론 카스트나 종교가 다르다고 법적으로 결혼이 금지되진 않는다. 하지만 가족을 끔찍이도 중시하는 인도인들에게 법은 멀고 부모님의 눈초리는 가깝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인도인들은 사람의 성씨만 듣고도 대충 어느 지역의 어느 카스트 출신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도에선 추노꾼 대길이가 필요없겠다. 나의 고향, 나의 과거가 싫어도 도망칠 수 없다. 그래서 인도인들의 삶은 다분히 운명론적이다.


3.

 정부가 '차별하면 안돼요'라고 말해봐야 이미 머리가 굵은 사람들이 유치원 아이들마냥 '네, 네, 선생님!'하고 알아들을리 없다.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에게 카스트를 들이밀면 '시대착오적인 꼰대'라며 손가락질을 하지만, 인도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골 사람들에게 카스트는 여전히 중요하다.


 국민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정부는 문서상으로 카스트를 수정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을수 있도록 법을 개정했다. (웃긴건 낮은 카스트로의 이동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실제로 바꾸는 사람은 소수에 그친다. 인도 공공서비스의 특성상 절차가 너무 복잡하고 시간을 잡아먹으니 바꿀 생각을 안한다. 적당히 만족하고 살아가는데 굳이 아등바등 바꿀 필요는 없다는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핏줄을 타고 내려오는 특성상 그 사람의 성(姓)만 들어도
카스트를 예상할 수 있는데, 서류상 카스트를 바꾼다고 내 삶이 달라지진 않는다. 결국 또 다시, 운명이다.



4.

 리시케시의 갠지스강에서 미테쉬(Mitesh)라는 친구를 만났었다. 한국인이라고 밝힌 나에게 그는 "KAIST는 좋은 학교니?"라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하니, 자기가 화학공학 석사인데 박사과정을 밟기 위한 학교를 알아보는 중이란다. 그는 학위를 따고 나면 꼭 해외에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인도의 답답한 분위기가 싫어서다. 그의 사례에서 알수 있듯 인도는 두뇌유출이 심각한 나라다. 매년 1600만 명이 해외로 이민을 간다. 전체 인구의 1%가 넘는다.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소수에 그친다. 고학력 인재는 빠져나간 땅에 남는건 정체된 사회 분위기다.


리시케시에서 만난 공학도 미테쉬

 카스트에 대한 내용을 물어보기 위해 인도인 아디티(Aditi)를 만났다. 그녀는 전직 방송국 PD였다. 그녀의 카스트는 브라만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브라만에 적합한 직업이다.


"오, 브라만이야? 멋있다. (It's cool.)"
"멋있을게 아니야. (It's not cool.)"


 브라만 출신의 사람과 얘기해보는건 처음이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딱 잘라 얘기하는 그녀를 보며 순간 당황했다.


 많이 희석됐다지만 카스트는 여전히, 인도의 어두운 얼굴이다.

장시간의 인터뷰에도 지친 내색 없이 열심히 도와준 아디티

※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예고

 매거진 <그리다 세계여행>의 다음 글은 "내가 인도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 (하)"에요.
 카스트를 제외한 나머지 이유 두개는 무엇일까요?

 12월 27일 금요일에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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