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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Jun 21. 2022

미안한데, 나는 해방된 것 같은데

갓생, 그거 내거

백일이 채 안된 아기가 낮잠을 잘 때마다 틈틈이 보았더니 에피소드 정주행 완료까지 3일이 걸렸다. 다 보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오만하게도


‘나는 해방된 인간인데’였다.


나는 정말 아무도 부럽지가 않다.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콧노래가 나오고 새벽에 일어나 젖을 주고 아침에 또 주면서도 생긋 웃으면서 남편에게 출근 잘하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 웃음에는 조금의 꾸밈도 애써 힘내봄도 담겨있지 않다. 정말 그가 안녕하게 출근하고 무사하게 근무해서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사랑만 담겨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자 하는 것들은 거의 다 이뤘다. 공부는 하는 만큼, 아니 어쩌면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적이 나왔다. 딱 원했던 학교에 가진 못했지만, 나름 좋은 고등학교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 마지막 학기에는 대기업에 한 번에 합격해 별 탈 없이 8년을 채우는 중이다.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팀으로 척척 옮겨 어렵다는 대기업에서 커리어 쌓기를 실현해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다 하는 대학에서 분에 넘치는 상까지 받아가면서 석사 학위도 받았다. 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심지어 회사까지 나는 대표로 입학, 입사 선서를 하는 영광도 누렸다.


인간 관계는.. 나는 미워하는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 아니 사람을 미워하는 방법도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이 싫어지려 할 때면 그 사람에게 가 구체적으로 왜 싫어지려 하는지 표현한다. 사과를 받거나 하거나 오해를 푼다. 그마저도 안되면 관계를 정리한다. 어떤 이가 부러울 때는 부럽다고 말해버린다. 그럼 놀랍게도 질투를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앞길을 축복해 줄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나 좋다, 싫다,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예쁘다, 부럽다, 축복한다는 말을 하는데 큰 용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를 깎아내리려는 사람은 주변에 두지 않는다.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넘쳐나도록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한다.


여러 근사한 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연애를 했으며 그중 가장 근사한 이와 축복 속에 결혼했다. 어느새 5년이 지났지만 어젯밤 아기를 재우고 치맥을 하며 낄낄 깔깔 대며 서로의 이야기에 푹 빠질 정도로 사이가 좋다. 잠에 들 때는 사랑한다고 말하고 일어나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다.


아기는 건강하고, 어제저녁 여덟 시에 잠이 들었는데 새벽 세시가 되었는데도 깨지 않는다. (나는  깨서  글을 쓰고 있니) 얼마나 순하고 예쁜지   울지를 않는다. 낮에는 드라마도 보고, 요가도 하는 여유도 준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는 일주일 동안  앞에 문을 틀어막을 정도의 선물들이 쌓였다. . 내게는 아주 멋진 친구들도 많이 있다.


자타공인 갓생. 내 삶이다. 그게.




지금까지 재수 없는 이 글을 읽어주었다면 정말 대단하다고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남이 행복하다고, 나는 너무너무 잘 지낸다는 얘기를 읽는 것은 불행을 듣는 것보다도 지루하고 재수가 털리니까.


그래서 나는 사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는 어떻게 해방되었나’


라는 글을 쓰고 싶었다. 뭐 처음부터 행복한 인생은 아니었고, 기억에 남는 인생의 변곡점들이 내게 있었으니까. 그 점들을 회상해서 이어 붙여보고 싶었다.


근데 오늘 오후 문득 요가를 마치고 땀을 닦아내면서 내가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그 무언가를 할 때는 남들보다 월등히 멋지고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주기적으로 그 무언가는 바뀌고 느닷없지만 확실한 당위와 함께 나를 찾아온다는 것도.


끊임없이 자격증을 따대고, 누가 점수를 내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주기적으로 시험을 본다. 출산휴가 기간에는 또 무슨 시험을 보겠다고 아침에 일어나 만삭의 배로 식탁에 앉아 인강을 들었다. 충분히 행복하고 더 나아지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나는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한다.


왜?


언제 끝나는데 이 계발인지 개발인지 모를 것은?


줄줄이 자랑한 그 삶에 왜 머물지 못하는데?


도대체 뭘 이루고 싶은 건데?


뭐야.. 이 글도 한 번에 끝낼 양이 아니고 연재의 길로 들어서겠구나. 하.. 일단 막 깬 애기 젖 먹이고 천천히 써봐야지. 이 글을 남기는 작업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다가올까봐 겁이 난다.


겁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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