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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r 05. 2022

인생의 모든 경험은 도움이 되는걸까

기록에 앞서

2021년 9월, 마의 16주의 검진에서 건강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드디어 시작해보는 임신 기록. 작년 유산의 경험 때문에 주변에 알리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사실 지금 이 글을 적으면서도 정말 괜찮을까 하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긴 하지만..


검진 때마다 무럭무럭 자라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기와 태동을 느끼기 시작한 나를 믿어보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불안감으로 기록하지 못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기억들도 부지런함이 뒷받쳐준다면 기록으로 남겨보겠다.


지금 아기의 기록에 앞서 아직 미처 아물지 못한 유산의 경험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사실 유산 직후에 죄책감으로 가득한 글을 남 몰래 남겨뒀었다. 오늘은 죄책감에서 벗어나 떠나보낸 당시의 아기가 지금의 나에게 준 의미들을 새겨보려고.


작년 9월, 별다른 노력 없이 우리 부부에게 아기가 찾아왔고 우리는 아기 갖기가 세상 쉽다며 철 없는 소리를 했더랬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회사에서 당시 맡았던 프로젝트들에 대해 항상처럼 업무 집착을 보였고, 가장 혹독한 대학원 3학기를 보냈다.


12주. 초기 유산을 겪고나서 모두가 나의 탓이 아니라며 위로해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원망할 수 밖에 없었다. 임신이 쉽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업무를 조금 내려놓았다면. 대학원을 쉬엄쉬엄 다녔더라면. 그 후 1년이 다 되어가지만 불현듯 피어오르는 자책감을 애써 외면하고는 한다.


석사를 잘 끝마치고 후련한 마음으로 떠난 제주 여름휴가에서 다시 찾아온 아기. 우리 부부는 이제 아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 존재를 지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우리가 다시 불운을 마주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후회하지 않도록. 자책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최선을 다했던 16주. 잘 자란 척추와 야무진 두개골. 아직은 낯선 얼굴과 벌써 내 눈엔 길죽길죽한 팔다리. 만약 유산의 경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아기가 건강한 것이 큰 축복이란 것을 몰랐을 거다. 만삭의 기쁨도, 출산의 감동도, 육아의 보람도 반감되지 않았을까.


상처는 아물고, 기억은 진정되고, 인생은 계속 나아가니까. 지나고 나면 모든 경험들은 다 도움이 되는 걸까? 엄마는 이제 너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기보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래도 되는 걸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품에 와주어서, 생명의 소중함과 임신의 축복을 알게해줘서 고마웠다. 지금 품은 아기는 끝까지 잘 지켜서 잘 키워볼게. 고마워 나의 첫 아가야.


아이를 잃고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날, 오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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