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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25. 2023

랜덤박스

처음


 “이봐, 거기 청바지 입은 아가씨!”    

 

 멀리서 보고 일찍부터 걸음을 재촉했지만, 민하는 콕 집어 자신을 가리키는 여자를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민하는 그런 것들에 재주가 없었다. 눈을 마주치고도 상대를 무시하는 일, 바쁜 상황에서 간곡한 부탁 거절하기, 억울한 상황에서 재빠르게 일침을 가하기, 목소리 높여 의견을 주장하기, 누가 뭐라든 자신을 지지하기. 그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재주 없음이 민하를 내내 괴롭혀 왔다. 민하를 아는 몇몇은 ‘이겨내. 그런 거 하지 마.’라고만 떠들지 이겨낼 방법도 하지 않을 방법도 알려주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부모는 그런 말조차 해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민하는 여자의 부름이 숙명인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앞으로 다가갔다.  

   

 “덥지?”     


 여자는 민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멋대로 박카스 뚜껑을 땄다. 민하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박카스를 건네받았다. ‘그 안에 뭐가 든 지 알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민하의 귀를 스쳤지만 애써 무시하고 한약을 들이켜는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단숨에 마셨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여자의 말에 민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기 이름이랑 전화번호랑 주소만 쓰면 돼. 돈 드는 거 아니야.”     


 여자가 민하의 팔목을 잡아 펜을 쥐어 주었다. 민하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자 여자가 찰지게 팔뚝을 때렸다. 손이 매웠다. 민하는 아, 작게 신음했다. 오른손으로 삭삭삭 얼얼한 왼쪽 팔뚝을 문지르고 싶었지만 그러면 자신을 때린 여자가 무안할까 봐 꾹 참았다.     


 “왜 이래? 속고만 살았어? 당하고만 살았어? 왜 내 말을 못 믿어?”   

  

 순간 강한 이명이 민하를 덮쳤다. 여자는 민하의 멍한 얼굴을 한 번 훑어 내린 뒤 발아래 놓인 커다란 상자를 뒤꿈치로 툭툭 쳤다.  

   

 “이거 읽어봐 봐. 영어 읽을 줄 알지?”     


 민하가 쭈뼛쭈뼛 허리를 숙이고 여자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랜덤박스?”     


 “그래, 랜덤박스. 요새 유행이잖아. 아무 거나 주는대로 받는 거. 근데 우린 달라. 아가씨 이제 깜짝 놀랄 거다.”    

 

 여자가 그러면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보여? 여자들 환장하는 거 여기 다 있다 이 말이야. 아가씨도 좋아하지? 보테가 베네타 가방이랑 까르티에 시계랑 르 라보 향수…….”     


 여자가 브랜드마다 음률을 섞어 말하는 동안 민하는 강매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쩔쩔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앞만 보고 걸었다. 아무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민하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보지 않는 삶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했다.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런 거 안 좋아해?”     


 “아, 아니요. 그냥 잘 몰라서요…….”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고 입매를 메기처럼 쭉 내리고는 민하를 훑어보았다. 민하는 괜히 부끄러워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나이도 얼마 안 돼 보이는구만 이런 것도 모르고 무슨 재미로 사나? 그러면 보자, 보자. 아가씨가 좋아할만한 게 뭐가 있나? 아, 여기 있네. 이건 알아?”     


 여자가 내민 것은 책이었다. 그것은 상자 안 반짝이고 화려한 물건들과 달리 색이 바라고 나달나달 했다. 랜덤박스보다는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편이 훨씬 더 어울리는 낡은 책.      


 “어머!”     


 민하는 저도 모르게 외치고는 한쪽 어깨로 입을 막았다. 너무 크게 소리 지른 것 같았다. 손으로 입을 막기엔 책이 떨어질까 겁이 났다. <벨 자>였다. 실비아 플라스가 죽기 직전 쓴 자전적 소설. 심지어 민하의 손에 있는 책은 국내에서 실비아 플라스가 재평가된 이후 나온 번역서도, 실비아 플라스 본명으로 나온 개정판도 아닌 실비아 플라스가 직접 붙인 필명 빅토리아 루커스라는 이름을 달고 영국에서 나온 초판본이었다.  

    

 “역시! 내 감이 맞았어.”   

  

 여자가 싱글싱글 웃었다. 민하는 자신이 용기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쥔 이 책을 가지고 한달음에 도망이라도 쳤을 거라 상상하며.     


 “마음에 드나 봐. 가지고 싶어?”     


 여자의 말에 책을 빤히 내려다보던 민하가 급히 한 을 휘저었다.      


 “치, 거짓말하긴. 가지고 싶으면 가져. 선물로 줄게.”    

 

 “아니. 괜찮아요.”     


 “나도 괜찮아. 어차피 사람들은 이런 거 관심도 없어. 아가씨나 좋아하지.”     


 “정말 괜찮아요.”     


 “어휴, 준다 그럴 때 받어.”    

 

 민하는 여자의 말대로 하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책을 품에 안고 내 거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민하의 인생에서 뜻밖의 호의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다. 민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받는 건 좀 그렇고……. 혹시 이거 제가 돈 주고 사도 될까요? 그게 제 마음도 더 편할 거 같은데.”     


 여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돈? 내가 값을 부르면 낼 수는 있어? 아가씨가 누구보다 이 책의 값어치를 잘 아는 거 같은데.”     


 “아, 네네. 그렇죠. 제가 실례했어요. 죄송합니다.”    

 

 민하는 붉어진 얼굴로 책의 모서리를 연신 손끝으로 매만졌다. 슬며시 책을 간이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자가 펜을 쥐어줄 때처럼 민하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선물이라니까. 받아.”     


 “아니요, 저는 정말 괜찮…”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내가 괜찮다니까!”     


 여자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자후가 이런 걸까?포악하고 거칠었다. 순간 세상이 멈추는 기분이 들었다. 민하 역시 얼음처럼 굳었다. 여자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하면 여기에 이름하고 번호, 주소 써. 어려운 일도 아닌데.”     


 “아, 그건…….”  

   

 “정말 까탈스러운 아가씨네. 그냥 이벤트야. 말 그대로 랜덤박스고 총 4번 집으로 배달될 거야. 그러면 내가 깔아주는 어플에다 별점만 매겨주면 돼. 별점도 억지로 5개 줄 필요 없어. 솔직하게 매길수록 좋아. 저번에 어떤 아저씨는 피아제 시계도 받았고 샤넬백 받은 아줌마도 있어. 물론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지만. 그래도 어플이 아가씨 데이터를 분석한 다음에 좋아할 만한 취향으로 선별해서 보내는 거니까 실망할 일은 없을 거야. 마음에 안 들면 팔아버리든지.”    

 

 민하는 망설였다. 이런 종류의 일을 한 두 번 겪은 게 아니었다. 이벤트라고 그냥 설문조사라고 감사의 마음이라고 로션을 내밀고 건강음료를 내밀었다. 순진한 얼굴로 덥석 받아오면 그들은 금세 빚쟁이처럼 변해 그것들의 대가를 요구했다. 3.3프로의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사인할 때 못 냐 약관에 다 적혀 있었다, 핑계는 다양했고 그때마다 민하는 자책하며 성실히 값을 치렀다.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에게 잔소리를 했다. 민하는 웃으며 자신을 탓했고 그런 반복이 이어지자 모두 떠나버렸다. 혼자 남았을 때 만난 게 창우였다. 창우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 누구보다 민하를 아껴줬고 보듬어 주었다. 민하는 그를 만나 처음으로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곧 그 자유마저 사라졌다.   

   

 “아무튼 손해 볼 거 없는 장사야. 핸드폰 줘 봐.”     


 여자는 이번에도 민하가 핸드폰을 건네기 전에 먼저 낚아챘다. 그리고 열심히 액정 위로 손을 놀렸다.   

   

 “자, 내가 어플 깔아놨어. 이제 약관만 작성하면 돼.”     


 여자가 내민 펜을 받아 들고 민하는 작게 심호흡했다. 책을 쥔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 싫다는 말도 괜찮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의 눈빛이 민하를 재촉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펜을 쥔 민하의 손이 떨렸다. 천천히 이름을 썼다. 그다음은 전화번호. 010-9까지 쓰는데 여자가 말했다.     


 “나 아가씨 번호로 내 폰에 전화했어. 번호 아니까 행여라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 알지?”

     

 여자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하지만 민하는 전혀 재밌지 않았다. 여자는 민하의 생각을 꿰뚫고 있었다. 언제나 민하보다 한 발 앞서는 사람들, 창우도 꼭 그랬었다. '거짓말하면 알지?' 여자의 목소리가 꼭 그와 닮아있다고 민하는 생각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걸 꾹 참았다. 몸이 휘청이자 정신도 흔들렸다. 집요하게 시달리느니 사기를 당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민하는 주소마저 정직하게 쓴 뒤 여자에게 넘겼다.

     

 “이제 폰으로 회원가입 해야지.”     


 겨드랑이 사이에 낀 책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 힘을 꽉 주고 핸드폰 액정을 켜는데 손이 미끄러졌다. 여자가 떨어지는 핸드폰을 요령 있게 잡았다.     

 

 “어후, 이렇게 매가리가 없어서야.”   

  

 여자는 자신이 민하의 보호자라도 된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대신해 회원가입 절차를 진행했다.   

   

 “아이디는 아가씨 전화번호. 비번은 아가씨 이름. 어차피 자동로그인 해놨으니까 따로 로그인할 필요는 없을 거야.”    

 

 여자는 그렇게 말하는데 액정 위로 데이터 액세스라는 단어가 보였다. 앞뒤로 설명이 길었다. 민하가 문구를 읽으려는데 여자가 재빨리 허용 버튼을 눌렀다.     


 “어?”     


 “걱정 마. 그냥 절차야, 절차. 여기 어플 들어가면 다 설명 있어. 이 어플이 아가씨 핸드폰 안에 있는 자료랑 평소에 검색 키워드 같은 거 보고 취향을 분석하는 거야. 공짜로 선물 받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에? 아…….”     


 미적지근한 태도에 실망했다는 듯 여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민하의 품속에 있는 책을 툭툭 쳤다.     

 

 “내가 서비스 세게 해 줬는데 좀 웃어라. 누가 알아? 오늘 우연이 아가씨 인생을 바꿔줄지.”  

   

 민하는 억지로 입꼬리를 잡아당겼다. 생각해 보면 여자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예의 없게 보이긴 싫었다. 정말 가지고 싶었던 책이었으니까. 어쩌면 자신을 제외한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매번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자신에게는 처음 찾아온 횡재, 그래서 어색한 거라고, 겁나는 거라고 민하는 최선을 다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넌 항상 그 태도가 문제야.’ 민하는 세차게 머리를 도리질 쳤다.    

  

 “뭐야? 벌레라도 붙었어?”     


 “아, 네. 머리가 갑자기 간지러워서.”

    

 그리고 여자는 입을 닫았다. 느닷없이, 폐쇄된 놀이공원처럼 적막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기……? 다 끝난 건가요?”  

   

 민하의 말에도 여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방금 전과 다른 사람 같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짐을 주섬주섬 챙겨 자리를 떠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민하는 온몸이 한기에 휩싸였다.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가는 내내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핸드폰도 멀쩡했다. 어플은 여느 어플과 비슷했지만 외국에서 만들었는지 엉성한 구글 번역 한국어로 설명되어 있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민하는 평소답지 않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대신 꼭 쥐고 온 책을 펼쳤다.


 ‘도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지? 합법적인 거 맞겠지?’     


 복잡한 생각들이 밀려왔다. ‘넌 생각을 하지 마. 네가 생각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디?’ 민하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자칫하단 두통이 몰려올 것 같았다. 민하는 진정하기 위해 페퍼민트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오늘 받아 온 뜻밖의 선물에 코를 박았다. 모처럼 울지 않은 밤이었다.     




 


 5일 뒤, 초인종 소리에 화들짝 놀란 민하가 깨금발로 인터폰 앞에 다가갔다.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설마, 하며 입술을 깨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랜덤박스 모양의 아이콘이 보내는 알림이었다.    


 “아, 랜덤박스.”     


 -최민하 님 앞으로 첫 번째 랜덤박스가 배송되었습니다. 물건을 확인하시고 별점과 평가를 남겨주세요.      


 심장이 뛰었다. 민하가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샛노란 상자 하나가 민하의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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