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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Aug 24. 2023

내 노래를 돌려줘



 

 간주 점프 따윈 없었다. 요즘처럼 전곡 길이가 3분도 되지 않는 시대에 5분이 넘는, 그것도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노래를 단 한 번 건너뛰기도 없이 꼼꼼하게 들어준다는 건 웬만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했다. 윤준은 반복되는 후렴구가 사랑의 밀어라도 되는 듯이 여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꾹꾹 눌러 불렀다. 천장의 조명 때문인지 윤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 덕인지 여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노래는 막바지에 다다랐고 윤준과 여진 앞에 놓인 간격도 조금씩 줄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노래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해빈의 얼굴 위로 조명이 쏟아졌다. 그 모습이 붉은 핏물을 뒤집어쓴 스티븐 킹의 캐리 같았다. 윤준은 맹수에게서 자식을 보호하는 어미 가젤처럼 그 자리에서 통 튀어 여진 앞에 섰다.   

  

 “……해빈아, 내가 다 말할게.”    

 

 윤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래가 멈췄다. 점수는 92점. 한 곡 더 불러줄 거죠? 엄지를 치켜든 여자의 얼굴과 함께 경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환희로 빛나던 순간이 종말을 고하듯 천장의 조명도 꺼졌다. 해빈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어둠의 기운을 몰고 오는 사자처럼. 윤준의 소맷부리를 부여잡은 여진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윤준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해빈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덕분에 해빈의 얼굴에 스치는 원망과 분노를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윤준은 숨이 막혔다. 이런 식으로 요란하게 해빈과 이별하고 싶진 않았다. 해빈이 마이크를 쥐자 윤준이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처럼, 만일 누군가 저 둔탁한 마이크에 맞아야 한다면 그건 자신이어야 한다는 듯.     

 

 “돌려줘.”     


 해빈의 말에 윤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기복 없이 일정하고 안정되게 자신을 사랑하던 해빈이 좋았다. 끝이 없는 돌림노래처럼 성실하게 반복되는 해빈의 마음을 무턱대고 받아왔으면서도 윤준은 그런 해빈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쟨 지칠 줄을 모르는구나. 고맙고 애틋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더 이상 주고받을 마음이 없어졌을 때, 윤준은 알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해빈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생각했다. 연락을 피하고 만남을 줄이고 핑계를 대고 표정을 없애고 미적지근한 대답을 내뱉고.      


 그런데도 넌 포기할 수 없다니? 돌려달라니? 내가 가지 않겠다는데 누구에게 무엇을 돌려받겠다는 말인가, 윤준은 호들갑스럽게 손가락을 더듬어 여진의 손을 찾아냈다. 그리고 각오를 다지듯 그것을 세게 잡았다.   

  

 “해빈아,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다 말할게. 나 이제 너한테 못 가. 아니 안 가. 네가 아무리 나를 돌려달라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 그러니까…….”    

 

 윤준이 핏대를 세워 외치는데 갑자기 여진이 그를 가로막았다.     


 “아니야, 아니. 오빠는 잘못 없어요.”  

   

 여진이 해빈 앞에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무릎을 꿇고 목놓아 외쳤다.    

 

 “언니, 다 제 잘못이에요. 오빠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언니, 저 언니 좋아한 거 알잖아요. 언니 보면서 많이 따라 했어요. 언니가 좋아하는 거 나도 좋았어요. 그런데 언니가 좋아하는 오빠까지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여진은 거기서 한 템포 멈추고 해빈을 올려다보았다. 절절한 사랑 영화 여주인공처럼 결정적인 말에 앞서 포즈를 주듯이 입술을 깨물고.     


 “언니가 그랬잖아요. 인생이라는 게 얼마나 허무한 건데, 어차피 우린 다 죽는데 살아있는 동안 미친듯이 사랑해야 하지 않냐고. 언니가 검정치마 콘서트에 나 데려가서 그렇게 말했잖아요. 나도 내가 미친 거 아는데 계속 미치려고요. 이거 사랑 맞나 봐요. 나 그냥 미친년 할래요. 언니, 나 절대 못 돌려줘요. 그러니까 언니도 이제 마음을 접어요.”     


 여진의 말이 끝나자 윤준이 자신의 가슴께로 손을 얹었다. 살아오는 동안 이런 찬사는 처음이라는 듯이 한껏 고양된 눈빛도 함께였다.     


 휴, 하고 해빈이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진을 지나쳐 윤준에게 가더니 마이크를 내밀었다.     


 “돌려줘. 내 노래.”     


 윤준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다소 경박스러운 목소리로 “에?”하고 반문했다.      


 “돌려달라고, 내 노래. 유재하의 텅 빈 오늘 밤. 아까 네가 부른 거. 그 노래. 그거 내가 너한테 준 거잖아. 난 그것만 받으면 돼.”     


 “노래? 텅 빈 오늘 밤? 이걸 돌려달라고?”     


 해빈이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돌려줘?”    

 

 윤준은 그렇게 말하고 해빈을 바라보았다. 광기, 어떤 끓어오르는 광기의 폭발이 해빈의 눈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윤준은 저도 모르게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해빈이 그만큼 다가와 다시 윤준의 입에 마이크를 대었다.     


 “다시 불러. 왜? 이것도 내가 눌러줘야 해?”     







 

 윤준과 해빈은 같은 과 동기였다. 해빈은 바로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렸지만 무리 지어 다니거나 단짝이 있는 건 아니었고, 혼자 있어서 외로워 보인 적은 없지만 괜히 다가가 옆에 있고 싶은 그런 아이였다.      


 어느 날 영화학회의 학회장 선배가 해빈의 이야기를 하며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 자기보다 영화를 많이 보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물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 같지만 그 아이에겐 자신만의 확고한 입장이 있다고. 그 이후에도 사람들은 더러 해빈이 없을 때 해빈의 이야기를 했다. 욕이 아니라 주로 해빈이라는 아이의 숨겨진 면모나 의외의 면에 대한 이야기라 거기에 끼어도 양심의 가책 따윈 없었다.      


 윤준은 사람들이 해빈에 대해 말할수록 덩달아 해빈이 궁금해졌다. 자주 핑계를 대 연락을 했다. 해빈과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느낄 무렵 윤준은 입대했다. 면회 간다고 휴가 나오면 연락하라고 요란스럽게 말하던 다른 애들과 달리 해빈은 저 혼자 쭐래쭐래 와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윤준에게 잔뜩 먹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고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와 책 이야기를 실컷 했다.      


 윤준은 해빈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좋다, 라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는데 날이 갈수록 해빈이 보고 싶었다. 그냥 무작정, 길을 걷다 발견한 오래된 책방처럼, 목적은 없지만 지나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장소처럼. 해빈의 얼굴을 보면 편했고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직접 무얼 하지 않는데도 절로 고양되었다. 해빈은 조용하지만 다정하고 개방적이지만 완고한 자신만의 세계가 있는 아이였다. 윤준은 그 세계를 알고 싶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무채색의 자신도 고유의 색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병을 달고 휴가를 나온 윤준은 해빈에게 고백하려 했다. 하지만 해빈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과동기가 해빈이 교환학생에 선발되어 두 학기 동안 유럽에 간다고 전했다. 윤준은 아무 말도 없이 떠난 해빈에게 서운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지만 시간과 함께 그 마음 또한 흘려보냈다.     

 

 *     


 “윤준!”     


 복학을 하고 학기가 시작되는 날 거짓말처럼 해빈이 윤준의 앞에 나타났다. 어제도 보았다는 듯이 아무런 위화감 없이 윤준을 부르는 그녀를 보자 얄미우면서도 반가웠다. 윤준이 안부를 묻기도 전에 해빈이 다짜고짜 그의 팔을 끌었다. 인문관 뒤편 벤치로 가더니 가방을 주섬거리며 무언가를 꺼냈다.      


 “CD플레이어? 요새 이런 거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바로 나.”     


 해빈이 그러면서 해맑게 웃었다.      


 “너 이것 좀 들어 봐.”     


 해빈은 때가 탄 이어폰 두 짝의 줄을 풀기 시작했다. 윤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해빈을 바라보았다. 해빈의 손이 귓가를 스치자 윤준은 어쩐지 꼼짝할 수 없었다. 해빈은 마치 자신의 아이를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이어폰을 윤준의 귀에 꽂았다. 5초의 정적이 흐른 후 음악이 흘러나왔다.      


 “시티팝인가?”     


 “쉿!”     


 해빈의 말에 윤준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가 낯익으면서도 정확한 이름이 가물가물 윤준의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5분이 지나자 해빈이 귀신같이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어때?”     


 “아, 이 사람 누구였더라?”    

 

 “유재하.”   

  

 “아, 맞다. 유재하. 이 사람 그 뭐지? 사랑? 아… 맞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건 아는데 이 노래는 처음이네.”     


 “응, 그 앨범에 있는 수록곡이야. 사랑하기 때문에 만큼은 안 유명해. 그런데 난 이 노래가 제일 좋더라.”  

   

 “제목이 뭔데?”     


 “텅 빈 오늘 밤. 지금 들어도 하나도 안 촌스럽지?”     


 “어.”     


 “좋아?”     


 해빈이 윤준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윤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좋아?”     


 “어, 진짜.”  

   

 거짓말이 아니었다. 윤준은 사실 그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기교를 뺀, 맑고 순수하면서도 어딘지 고독한 정취가 느껴지는, 뭔가 매가리 없게도 느껴지는 보컬에 베이스와 신시사이저의 음률이 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간주의 기타 선율이 흡사 90년대 형사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박진감을 주면서도 유재하의 목소리와 만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했다. 윤준은 ‘오늘 밤 그대 떠나고 쓸쓸한 오늘 밤 모두 흥겨웁게 노래 부르며 춤추는데 나는 어이해 홀로 외로울까 그대 없는 텅 빈 밤’하고 끊임없이 외치는데 정작 그대를 찾을 의지 자체는 상실한 어떤 남자를 그려보았다.     

 

 윤준은 노래를 한 번 더 듣고 싶어 CD플레이어의 몸체를 든 해빈을 향해 손을 내밀었지만 해빈은 가만히 윤준을 빤히 내려다만 볼 뿐이었다. 윤준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해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합격.”     


 “어?”  

   

 윤준이 잘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너 지금 여자친구 없지?”     


 “없는데……. 왜?”  

   

 “나랑 만날 의향 있니?”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체코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 널 아예 보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너를 자주 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진심인지 알고 싶었어. 처음에는 당연히 정신없었지. 수업이야 영어로 한다고 해도 일단 밖에 나가면 체코어를 쓰는데 내가 알아먹겠냐고. 암튼 거기 생활도 익숙해지니까 네 생각이 나기 시작하더라고. 날이 갈수록 엄청난 빈도수로 네 안부가 궁금해졌지.”     


 해빈은 마치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이 제3자의 인물인 것처럼, 자신의 마음이 관찰 가능한 표본인 것처럼 설렘이라고는 하나 없는 표정으로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윤준의 말에 해빈이 눈썹 한쪽을 까딱하더니 “어.”하고 말했다. 윤준은 웃음이 나왔다. 일종의 헛웃음. 하지만 기분이 나쁘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만한 고백의 순간이 생겼다는 게 어쩐지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윤준은 몸을 돌려 해빈을 바라보았다.     

 

 “내가 왜 좋아?”


 해빈은 초승달 같은 눈썹을 잠시 일그러뜨리고 자기 마음속 사랑의 기원을 찾아 헤맸다. 윤준은 가슴이 뛰었다. 애초에 먼저 고백하려던 자신의 수고를 덜어 준 해빈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진입장벽이 높은 해빈의 애호 목록에 자신이 오른 이유가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윤준은 해빈의 대답을 기다리며 혀끝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윤준이 넌 뭐랄까……. 무던해. 한결같고. 너랑 있으면 내가 받아들여지는 기분이 들어.”     


 *     


 해빈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빈은 꼼꼼한 화가처럼 애정을 듬뿍 담아 윤준을 채색해 나갔다. 윤준은 해빈의 순정이 좋았다. 해빈은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하면 변심하지 않았다. 해빈은 마음의 반경이 넓었고 그만큼 다양한 곳에 시선이 가닿았다. 남들은 좀체 알 수 없는 것들을 제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재주를 가졌고 해빈이 가지면 남들도 그것에 호기심을 가졌다. 윤준은 가끔 불안했다. 해빈이 진짜 자신을 알아버릴까 봐. 긴장이 될수록 윤준은 부지런히 해빈을 배웠다.      


 해빈은 마지막 학기에 출간을 했다. 그간 해빈의 블로그를 눈여겨본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이 왔다. 책은 잘 팔리지 않았지만 마니아가 생겼다. 해빈을 틈틈이 불러주는 곳에 꾸준히 기고했다. 학교에서도 해빈을 알아보는 이들이 생겨났다. 해빈의 글에 가끔 자신과의 에피소드가 담기기도 했다. 글 속에서 윤준은 해빈의 애정 어린 시선 속에 탁월한 취향을 가진 속 깊은 남자친구로 등장했다. 윤준은 그것이 자신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날이 종종 있었다. 자신이 묘사된 것 정도의 미학적 관점은 가지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누리고 즐기는 모든 문화적 자산이 해빈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동기도 후배도 선배도 해빈과 함께 있을 때 윤준을 다르게 보았다. 해빈이 조미료를 너무 쳤다, 얼버무리면서도 어쨌거나 지금은 자신도 그 모든 걸 이해하고 있으니 이게 나라고 의식적으로 의식했다.

    

 그 사이 해빈의 취향은 확장을 멈추고 깊이에 집중했다. 그 깊은 구덩이가 윤준은 때론 암담했다. 저 깊은 곳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 걸까. 사람들은 서서히 해빈과 윤준을 하나의 세트로 생각했다. 윤준이 혼자 다녀도 해빈의 향이 묻어났다. 사람들이 윤준에게 던지는 질문이 달라졌다. 윤준이 멍 때리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그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여겼다.   

  

 해빈은 졸업을 앞두고 대학원 진학을 택했다. 본래부터 학문을 하기 위해 대학에 왔노라 말하던 해빈이었다. 윤준은 졸업을 1년 앞둔 상황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에서 명확한 건 오직 해빈과 해빈의 사랑뿐이었다. 해빈은 윤준에게도 대학원 진학을 권유했다. 해빈을 퍽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윤준의 엄마 또한 그 선택을 부추겼다. 어차피 이도 저도 안 되면 카페라도 하나 차려주겠다는 엄마의 성화에 윤준은 못 이기는 척 대학원으로 진로를 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겨워졌다. 윤준은 어느 날부터인가 해빈의 열정이 소모적으로 느껴졌다. 해빈이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 같았다. 친구들은 벌써 주식이니 채권이니 잔고를 불려 가는데 해빈은 늘 같은 소리만 해댔다. 이름도 외울 수 없는 작가들, 늘 서성이는 문학과 예술 서적 코너가 지루했다. 해빈은 그 덕분에 살아간다고 했지만 윤준은 그것들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인가 대해 회의적이었다. 윤준은 해빈의 변덕 없는 애정이 싫어졌다. 그냥 해빈의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때 여진을 알게 되었다. 여진은 학부 2년 차로 해빈의 팬이었다. 여진은 해빈을 만나기 위해 빈번한 우연을 가장해 해빈 옆을 서성였다. 여진은 해빈에게 인정받고 싶어 했다. 윤준의 눈에는 그게 다 보였고 가엾어 보였다. 마치 예전의 자신처럼. 윤준은 바쁜 해빈을 대신해 여진을 챙겼다. 여진은 작은 것에 감탄하고 웬만하면 만족했다. 여진의 옆에서는 웹소설을 읽어도 마블 영화를 봐도 마음이 편했다. 윤준은 여진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이 될 수 있었다. 비록 여진이 그를 통해 해빈을 찾고 있다고 해도.    

  

 어느 늦은 밤, 윤준은 허상 같은 것에 매달리지 말고 눈앞에 있는 자신을 보라고 여진에게 말했다. 여진은 아직 어렸고 모험이 간절했다. 여진은 윤준의 제안을 수락했다.      


 이 사달은 그렇게 발생하고 만 것이다.     


 






 “자, 어서 불러.”     


 해빈은 점점 더 과격한 동작으로 마이크를 흔들어댔다.      


 “야, 말 같은 소리를 해. 노래를 어떻게 돌려줘? 막말로 이 노래가 왜 네 건데? 이 노래를 네가 만들었냐? 유재하가 만들었지. 내가 노래를 돌려줘도 유재하한테 돌려주지 너한테 왜 돌려줘야 되는데? 네가 이 노래 전세 냈냐?”     


 윤준의 말에 해빈이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한쪽 입꼬리를 당겨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그랬어. 이거 우리 노래라고. 만약에 우리가 헤어져도 이 노래만큼은 네가 가져가겠다고. 그런데 넌 우리 맹세를 어겼어. 심지어 우리 노래를 부르면서. 나한테 네 마음이 어떤지 왜 그런지 한 마디 상의도 안 하고 그냥 날 배신했어. 인간이 인간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끝냈어도 되잖아. 물론 나는 널 사랑하니까 시간이 필요하긴 했겠지. 그래도 네가 이제 끝났다고,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나는 널 보내 줄 수 있었어. 그런데 넌 아무 가책도 없이 우리 노래를 불렀어. 심지어 인테리어 구리다고 절대 오기 싫어했던 이 노래방에까지 기어들어오면서. 네 죄를 숨기려고 구린 곳에 제 발로 와서. 그만큼 네가 하는 짓거리가 구리다는 걸 알았던 거겠지. 네 구린 짓을 밝히려고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아니? 그러니까 이 노래는 내가 가져갈 거야. 너한테 이 노래는 과분해. 이제 넌 노래를 불러. 불러서 토해내. 네가 처음 이 노래를 우리의 노래라고 선언한 그 시점부터 토해내. 네가 나보다 더 유재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하던 날처럼 이 노래를 불러. 최선을 다 해서, 그 감정들을 모두 꺼내서. 내가 너에게 준 건 단순히 노래가 아니야. 이 노래를 들으며 내가 겪은 삶이야. 넌 그걸 다 게워내야 할 의무가 있어. 네가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윤준은 말문이 막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버버 거리는 와중에 여진이 겁에 잔뜩 질린 표정으로 윤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자신은 어색한 상황에 놓인 인질이라도 되는 듯이, 조금이라도 어른인 네가 이 상황을 수습해 보라고 종용하는 눈빛으로. 해빈은 여진에게로 다가가 부축하듯 두 손을 여진의 겨드랑이에 껴 그녀를 일으켰다. 여진은 실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다리를 휘청였다. 무릎이 노래방 바닥에 눌려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여진은 얌전히 해빈의 옆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너무 연극적이다, 너무 해빈적이다, 이건 너무 굴욕적이다, 윤준은 차마 어쩌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해빈을 노려보았다. 해빈은 여전히 굳셌다. 저런 애가 진짜 무섭다, 내가 겪어 봐서 알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윤준은 체념했다. 해빈 옆에 앉은 여진이 울먹이는 얼굴로 “그냥 불러요.” 하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95581. 조명이 돌아가고 전주가 나왔다. 간주 점프를 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고민하는 윤준의 얼굴 위로 조명이 요란하게 춤을 췄다. 해빈이 리모컨을 들어 자기 무릎 위에 놓았다. 윤준은 우두커니 서 노래를 기다렸다.     


 노래가 형벌이 될 수 있구나, 윤준은 내내 생각했다. 이번에는 50점. 목소리가 너무 작았던 것 같았다.  

   

 “다시.”     


 해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윤준이 뭐라 반박할 새도 없이 다시 음악이 시작됐다.      


 다시. 다시. 다시. 다시…….     


 “넌 어쩜 우리 기억을 다 지웠니? 넌 어쩜 과거의 너조차 기억하질 못하니? 모든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니?”     


 윤준은 자신이 불렀던 모든 텅 빈 오늘 밤을 머릿속에 어지럽게 내던졌다. 도대체 이 노래를 부르던 자신은 어떠했나? 나는 그때 어떤 모습이었나, 어떤 마음이었나, 그때는 모든 것이 왜 그토록 즐거웠나. 해빈을 사랑했을 때의 텅 빈 오늘 밤이 지금의 텅 빈 오늘 밤이 될 수는 없었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네가 너무 바빴잖아, 따위의 변명을 하기에 집요한 해빈이 그간의 행적을 모를 리 없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대학원 졸업은 할 수 있을까? 논문은 제대로 마무리될까? 그나저나 이 지경이 됐는데 내가 학교를 계속 다닐 수는 있을까? 윤준의 복잡한 머릿속이 다 보인다는 듯 해빈은 중간에 노래를 껐다.     


 “집중해, 다시.”     


 윤준은 죽을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해빈과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윤준의 눈앞을 스쳤다. 그건 사랑이었나? 사랑이 이런 거였나? 해빈은 왜 적당히를 모를까,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상처받고 적당히 욕이나 하고 다니면 될 것을 무슨 노래를 돌려달라고 하는 걸까, 하지만 바람을 피운 것도 맞고 현장을 들킨 것도 맞으니까. 무엇보다 해빈이 자신을 믿고 사랑하고 있음을 윤준 그 자신이 제일 잘 알았으니까. 차라리 말할걸, 깔끔하게 나쁜 놈 할걸, 윤준은 자신의 그릇된 판단이 초래한 모욕을 조명으로, 멜로디로, 성대의 울림으로, 청력으로 느끼며 그만 눈물을 흘렸다. 윤준의 눈물을 본 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빈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 ‘아, 역시 섬세한 여진이. 티슈를 가지러 갔구나.’ 생각하는 사이 노래를 두 번 더 불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윤준이 간주가 흐르는 사이 핸드폰을 슬쩍 봤다. 여진의 메시지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는 역시 해빈 언니 발끝도 못 따라가겠어요. 제가 사장님한테 3시간 더 넣어달라고 했어요. 그전에 나와도 환불은 안 된대요. 마음껏 부르시다 나오세요. 앞으로 다시는 연락하지 말아요. 우리 그냥 예전처럼 선후배로 지내요.   

  

 윤준은 화도 나지 않았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면서 예전 같은 선후배가 다 뭔가. 아! 그러게,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따로 연락할 일이 뭐가 그렇게 있을까, 그러면 연락하지 않는 선후배가 더 자연스러운 게 맞겠네. 무력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해빈의 완고한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 안에 갇혀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해빈은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전혀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결국 이 노래를 돌려주기 위해선 평생 해빈 옆에서 이 노래를 불러야 할지 몰랐다. 윤준은 울고 싶은 마음을 탄산으로 꾹 누르며 다시 노래 부를 채비를 했다. 자신들이 이 노래를 함께 부르던 그날처럼, 자신이 해빈보다 유재하를 더 좋아하게 된 그날처럼. 텅 빈 오늘 밤이 흐르는 사이로 윤준의 밤도 흐르고 있었다. 아주 더디게, 아주 무겁게, 끝이 없는 도돌이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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