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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

by 존치즈버거


아이의 죽음에는 명백한 이유도, 미워해야 할 그 어떤 명확한 상대도 존재하지 않았다.


경찰의 진술에 따르면 아이는 축구를 하고 수돗가에서 물을 마시고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급하게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한다. 선생님이 들어오셨기 때문에 아이들은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뒤늦게 들어온 아들은 조용히 문을 열고는 느린 걸음으로 교실 뒤편을 걷다가 숨을 쌕쌕 거리며 갑자기 쓰러졌다고 한다. 조용한 교실의 문이 열려 아이들 대부분이 뒤돌아보았고 선생님은 마침 아이에게 어서 자리에 앉으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수업 종이 친 후라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놀란 선생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가장 뒤편의 아이가 일어서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선생이 성큼 다가와 아이의 눈을 확인하자 동공이 풀려 있었지만 어렵사리 숨은 쉬는 것 같았다고 한다. 담임선생은 놀란 마음에 무작정 아이를 둘러업고 양호실로 갔다고 했다. 곧 양호 교사가 119에 신고를 했다. 10분을 뉘이고 난 뒤, 구급차가 왔고 다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모두가 경황이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찰은 학교 폭력에 관해 물었지만 아들을 아는 친구들 그 누구도 아들은 괴롭힘을 당한 적도 누군가를 괴롭힌 적도 없는 밝고 건강한 아이라고 증언했다.


밝고 건강했던 아들은 모호한 원인을 안은 채 병원으로 실려 왔다. 외근 중 걸려온 담임선생의 황급한 전화에 조퇴를 하고 병원으로 왔다. 아내는 며칠 전 해외로 출장을 갔다가 마침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내는 비행기 안일 것이다. 그녀는 세상모르고 잠에 들어 있을 것이다. 나는 문자를 남기려다 말았다. 아내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정신없이 굴다 또 한 번 사고가 날지도 모르는 노파심이었다. 아이는 산소마스크를 한 채 잠에 들어 있었다. 아들이 또다시 호흡 곤란에 빠질 것을 고려해 입원을 시켰다.


아내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나는 아들을 어머니께 부탁하고 공항으로 아내를 데리러 갔다. 차 안에서 아내는 반나절의 여유가 생겨 편집샵에 간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부러 트렁크를 열어 나와 아들이 같이 입을 커플룩을 흔들어댔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내게 아내는 색깔이 별로냐고 자꾸 재촉했다. 입원이라는 단어에 아내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정확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어 괜찮을 거야,라고만 몇 번을 반복했다. 아내는 말이 없었다. 피곤함으로 충혈이 된 눈에서 한가득 눈물이 떨어졌다. 집으로 향하는 것을 알자 아내가 도중 화를 냈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담당 의사는 이미 퇴근을 한 후였다. 아내는 아들의 머리맡에서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안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아들을 바라만 보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아들의 속옷과 책을 좀 챙겨 오기 위해서였다. 아들은 아침이면 눈을 뜰 테니까. 검사를 받기 위해 한동안 학교를 쉴 테니 숙제도 할 수 있게 책가방을 챙겨 오자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알 수 없는 냉기를 느꼈다. 집 안을 채우던 36.5도의 열기 하나가 사그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내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소파 위에 누워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방에서 담요 한 장을 꺼내와 아내에게 덮어주었다.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다.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가자 냉장고 위에 가지런히 정렬된 아들의 사진을 볼 수가 있었다. 해맑은 표정 심통이 난 표정 개구쟁이처럼 신나게 달리는 모습. 인간은 살면서 수만 가지 표정을 지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시간은 사진 속에 정지된 듯, 다음을 알 수 없었다. 아들이 태어나던 해, 유독 힘겨웠던 우리 부부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고통들마저 아련한 추억이 되지 않길. 아려오는 목덜미를 부여잡고 냉장고에 몸을 기대었다. 아직은 울고 싶지 않았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이틀 후, 아들은 또다시 청색증과 호흡 곤란이 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피검사와 내시경 검사를 했지만 아무런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다급해진 것은 담당 의사도 마찬가지였다. CT촬영을 앞두고 발작이 다시 일어났다. 상태가 심각했다. 의사는 아들을 당장 중환자실로 옮기겠다고 했다. 보호자 서명에 날인을 하는 동안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에 화가 치밀었다. 들썩이는 의료진의 입술에서 ‘준비’나 ‘각오’ 같은 무책임한 말들이 나올까 봐 한시도 편하게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아들은 폐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처음 실려 온 날만 해도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고작 2, 3일 사이에 눈에 보일 정도로 폐가 심하게 손상된 것이었다. 미리 CT를 찍어 보았다면 막을 수 있었을까? 아들은 그나마 중환자실에도 4일밖에 있지 못했다. 그렇게 병원 들어간 지 일주일 만에 아들은 떠났다. 평온하고 반듯한 아들의 모습이 낯설었다. 나는 조심스레 의사에게 다가가 원인 규명을 부탁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동정의 자세도 보여주지 않았다. 권위가 가진 고압적인 태도에 나만 더 작아질 뿐이었다. 회사에는 한 달의 휴직계를 제출했다. 아직 아들을 잃어본 적 없는 영업팀 차장은 다가오는 승진에서 누락될 수 있다고 넌지시 경고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에게 잠깐 살의를 느끼기도 했다.


집에서 나는 최대한 적게 움직였다. 아들이 남긴 빈 공간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떤 행위를 하려 할 때 혹여 내 안에 욕구라는 것이 존재할까 무서워 나는 유령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느리고 멍청하게,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보세요? 박인수씨 되시나요?”


벨이 두 번 울리고 받았을 때 지나치게 유쾌한 목소리의 남자는 내 이름을 물었다. 아들의 부검 결과 외에는 기다리는 소식이 없었으므로 나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박인수씨 여기는 그린란드 캠핑몰입니다. 박인수씨께서 두 달 전엔 응모하신 캠핑 용품이 당첨이 돼서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드렸는데 못 보셨나 봐요. 집으로 계속 연락을 드렸는데 자꾸 끊으시고……. 이번에도 안 받으셨으면 다른 분한테 보내려고 했는데 다행이네요.”


“이벤트요?”


나의 물음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상대였다. 정말 이 텐트에 대해 아는 것이 없냐고 물었다. 나는 머릿속이 까마득해졌다. 그러다 문득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언젠가 아들은 텐트를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짐 정리를 하며 찾아낸 내 어린 시절 사진을 보며 처음으로 아들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친구들과 종종 텐트에서 잤다고 했다. 아들은 텐트가 뭐냐고 물었다. 나는 텐트가 보호막이라고 했다. 야영을 하게 되면 그냥 땅 위에 이불 덮고 잘 수는 없으니까. 아들의 물음 이어졌다. 왜 바깥에서 자냐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일종의 놀이라고 설명했다. 아들은 경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들은 대뜸 자신이 죽으면 텐트에 묻어달라고 했다. 내가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아들은 천진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텐트는 보호막이라고 했잖아. 그럼 땅에 묻히는 것보다 좀 덜 무서울 거 아니야. 땅 밑은 껌껌하고 냄새날 것 같아.’ 창의성이 대단하다고 칭찬하면서도 꺼림칙한 소리라고 야단을 쳤다.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좀처럼 조르는 일이 없었는데, 그날은 텐트를 사달라고 온종일 생떼를 부렸다. 프로젝트 준비에 여념이 없던 아내는 일할 때 들리는 소음을 싫어했다. 아이가 집하도 징징거리는 통에 나는 하는 수없이 아들을 무릎에 앉히고 인터넷을 켰다. 텐트는 값이 만만치 않았다. 언제 갈지도 모르는 여행을 위해 캠핑 용품에 지출이 필요할까 고민하다 우연히 이벤트를 보았다. 아들은 두 손까지 모으고 기도한 뒤 응모 버튼을 눌렀었다. 당첨 연락을 확인할 여력이 없던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드님이 좋아하시겠어요. 축하드립니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남자는 주소를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오후 무렵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거실에 가보니 아내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그 너머로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가 흘러나왔다. 아들의 부검을 끝냈으니 이제 병원의 절차에 따라 장례를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그치듯 그들을 향해 아들의 사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채취한 샘플들을 통해 며칠 더 연구를 해봐야 할 것 같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아내가 눈을 떴다. 아내는 마른눈을 하고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방금 병원에서 연락이 왔으며 그들이 무어라 했는지 일러주었다. 아내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마른 한숨을 쉬어댔다. 이제 조바심 내며 기다려야 할 연락은 없었다. 나는 아내에게 욕조의 물을 받아놓을 테니 따뜻한 물속에서 몸을 좀 쉬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아내는 대꾸 없이 그저 손사래로 대답했다. 할 수 없이 나만이 그 뜨끈한 물속으로 들어갔다.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욕조에 몸을 가만히 담그고 있었다. 부지런히 몸을 닦을 체력은 바닥난 상태였으므로 그저 맹탕 속에 들어앉아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손바닥이 쭈글쭈글 해질 때쯤 나는 욕조에서 나왔다. 면도를 하기 위해 선반으로 가자 아들의 목욕용품이 눈에 들어왔다. 셰이프 크림은 그 사이에 당혹스럽게 놓아져 있었다. 나는 하필 벌거벗은 상태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받은 것에 묘한 수치심을 느꼈다. 눈물이 나지 않자 그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며칠 뒤 절차대로 경찰의 조사를 거쳐 아들의 시신을 검시소로 운구했다. 그 사이 집에는 질병관리연구소라는 곳의 연구원 하나가 아들을 담당했던 의사와 함께 다녀갔다. 그들은 아들방을 샅샅이 검사했다. 마치 우리 부부가 아들을 죽인 범인이 된 것 같았다. 그들이 무언가를 발견할 때마다 심장이 점점 아래로 꺼지는 듯했다. 그들은 방을 둘러보며 일이 커질 것 같다는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지만 나는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들은 별다른 설명이 없었다. 다만 요즘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로 사람들이 죽는 일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언론의 발표가 있기 전까지 자신들의 조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일을 심플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더 이상은 어떤 감정도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이미 모든 일이 나를 떠난 것 같았다. 검시소에서 받은 번호를 가지고 상조에 연락을 취했다. 상조회사가 허가서를 받으러 왔을 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납골묘와 납골당의 선택 문제, 화장에 드는 비용 등 대해서 논의해야만 했다. 아내는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그 논의에 참석했다. 나는 유골함과 함께 납골당에 넣어 줄 물건을 고르기 위해 거의 일주일 만에 아들의 방문을 열었다. 아내는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 마냥 서있었다. 조그마한 박스에 가족사진과 장난감, 일기장, 아들의 보물 1호였던 포켓몬 배지를 챙겨 담았다. 창가로 새어드는 햇빛은 마치 아이의 흔적을 그슬리는 듯 천천히 온 방안을 내비치었다. 나는 비통한 심정을 내리깔며 다시 한번 굳게 방문을 걸어 잠갔다. 장례식은 가까운 친지들에게만 연락을 취해 차분하게 진행되었다. 아들의 어린 친구들도 방문하였다. 몇몇은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리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아내는 아들이 줄곧 잠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나눈 말이 그저 몸 상태에 관한 것이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의사와 경찰에게 재차 묻고 또 물었다. 나 또한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들은 이제 공식적인 사망자이기에 그런 후회들은 더 이상 불필요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은 이제 정말 사라진 것이었다.


그 후 아들의 죽음과 관련하여 몇 차례 연락이 왔다. 아들은 질병관리본부에서 확인한 1차 피해자에 들어간다고 했다. 국가에서 보상을 한다고는 하지만 기대는 금물이다. 그러나 다른 피해자들에 비해서는 나은 상황이었다. 임산부 사망으로 시작된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에 있다는 이야기를 언론은 좋아했다. 그즈음 연락한 사람은 유가족 대표라고 했다. 남자의 부인은 아들과 마찬가지 증상을 겪으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처음 1년은 피를 토하거나 숨을 잘 쉬지 못하다 중환자실로 옮겨지면서 아들과 비슷한 증상을 겪더니 곧바로 숨졌다고 했다. 고통에는 경중이 없다지만 우리보다 더 괴로운 과정을 겪은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불현듯 아들이 그나마 적은 고통으로 마무리한 것이라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는 피해대책본부를 만들고 유가족과 시민의 서명을 거쳐 국회에 항의하겠다고 했다. 제조사가 한 곳이 아닐뿐더러 가장 매출이 높은 제조사는 입장 표명조차 하고 있지 않으니 상황은 불 보듯 뻔한 것이라는 말도 했다. 집단소송에도 나설 것이라고도 했다. 승산은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번호를 알려 달라고 말했다. 생각을 한 뒤 연락하겠다고 하자, 남자는 “생각이라뇨?”하며 큰 소리를 쳤다.


“나 회사 그만뒀어.”


양손 가득 장거리를 봐온 아내가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말했다. 아내에게 일은 인생 전부였기에 나는 그 말의 뜻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아내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찬거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무언가 열중할 곳이 필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거실에 앉아 물끄러미 아내를 들여다보았다. 아내는 도마를 난도질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닭의 속살을 잘라내는 아내를 보는 일은 생소했다. 아내의 칼 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한 시간을 넘게 주방에서 열을 내던 아내는 음식과 술을 가지고 거실로 나왔다.


“오늘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그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


맥주 한 캔을 따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아내는 뉴스를 보고 병원에 연락했다고 한다. 아들을 담당한 주치의는 수술로 자리를 비웠다고 했다. 연락을 바란다고 했지만 연락이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고 말하며 아내는 한숨을 쉬었다. 질병관리본부든 경찰이든 병원이든 어딘가에서 연락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예측도 함께였다. 아내는 숨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낮에 받은 전화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내는 샐러드볼의 치킨을 크게 베어 물더니 가습기가 살인 무기가 될지 누가 알았겠냐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남의 이야기를 늘어놓듯 담담한 말투로. 아내는 심한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쉼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자신이 출장을 가면서 냉장고에 붙여 놓았던 메모를 떼어냈냐고 물었다. 거기에는 가습기 꼭 틀어달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메모를 본 기억이 없었다. 아내는 자신에게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질 자격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내가 만든 음식들은 이미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회사에서 사표를 바로 수리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대뜸 나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나 임신하고 5개월까지 애 지울까 생각했던 거 알아? 파리에서 돌아오고 나서 몇 번이나 산부인과 앞에서 어슬렁거렸어. 난 진짜 미친년이야……. 당신도 기억나지? 내가 유난 부린 거. 그깟 공기 좀 건조하면 어떻다고. 내가 얼마나 시도 때도 없이 그걸 틀어댄 줄 알아? 내가 한 일이라고는 가습기 틀어준 것 밖에 없어. 가끔은 그것마저 귀찮을 만큼 지쳐 있었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그 짓거리를 했어. 내가 그 짓을 했어.”


아내는 눈물을 소매로 닦더니 맥주 한 캔을 더 땄다. 아내의 목덜미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를 낳은 뒤 산후우울증으로 몇 달을 고생했었다. 젖을 먹이면서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외국계 회사였기에 출산 휴가 인정에 너그러웠지만 아내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빠른 복직은 무리였다. 아내는 종종 신경질을 냈다.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아이는 아내를 닮아 예민했다. 밤마다 자주 울었다. 아내는 최대한으로 아이를 잘 돌보았다. 아니 돌보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신의 한계가 무너지면 나를 향해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곤 했다. 보통 그녀 이야기의 요지는 모성을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모성을 강요하지 않은 나는 더 대꾸할 수 없었다. 아내는 매정하게 돌아섰지만 그런 날엔 꼭 아이 옆에서 잠을 잤다. 나는 알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이 무엇을 놓고 갈등하던지 사는 것은 다 그런 것이 아니겠냐며 결국 나 또한 예정에 없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임을 아내도 알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부부를 떠나 그렇게 동질감을 느끼겠지, 하면서……. 어쨌거나 충분히 화려한 삶을 뒤로하고 아내가 선택한 것은 나였다. 그게 나였는지 아들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일은 벌어졌다. 원인은 명확하지만 누구도 보상하지 않는다. 더 무엇을? 나는 여기서 무엇을 보상받는 다고 한들 나아지는 것이 있을까 싶었다. 아내에게 낮에 걸려온 전화 이야기를 하면, 분명 자신을 누르던 그 죄책감을 동력으로 적극 참여할 것이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보상을 위해서는 긴 투쟁이 필요하고 그 투쟁이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늘 그렇게 돌아갔다. 나는 이 모든 생각을 접어둔 채 다시 한번 아내에게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를 건넸다. 아내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지면, 그러면?”


다시 회사에 출근하자 가장 힘든 일은 사람들에게 아들의 죽음에 대해 코멘트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측은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사장에게서 유감을 표한다는 카드가 전해오기도 했다. 단가를 낮추기 위해 태업을 일삼아 골치를 썩이던 협력사 사장은, 늘 그렇듯 그런 일로 통화를 하는 내내 뜻 모를 사과를 했다. 평소와 같았다면 내 몫으로 할당되었을 내년 분기 사업 계획서는 신참 대리가 맡아 처리하는 중이었다. 상당량의 업무를 담당하다 온정이라는 이름의 여유가 주어지자, 나는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됐다. 담뱃갑을 바라볼 때마다 아들이 생각났다. 나는 너무 단숨에 아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일을 그만둔 아내는 자신의 모든 정력을 집안일에 쏟고 있었다. 내가 다시 회사로 출근하던 날 아내는 아침을 차려주었다. 투명한 찬장에는 아이의 그릇과 식기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그것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형식적인 수저질이 몇 번 오가고 현관문 앞에서 아내는 처음으로 나의 출근을 배웅했다. 아내는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를 따라 나왔다.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문이 평소보다 느리게 닫히는 기분이었다.


며칠 뒤, 출근하고 돌아오니 거실이 환했다. 환하기보다는 텅 비어 있었다. 아내는 거실의 모든 물건을 안방으로 옮겨 놓은 후였다. 내가 이유를 묻자 답하지 않았다. 아내는 텐트를 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당황한 나는 무심결에 처가에 연락을 취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들 방을 청소하기 위해 몇 번이나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텐트가 도착했다고 한다. 아내는 그 이야기를 너무나 담담하게 내뱉었다.


“나 텐트 쳐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아내는 기다렸다는 듯이 휘발유 냄새가 풍겨 오르는 텐트의 포장을 맹렬하게 벗겨내기 시작했다.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넥타이를 풀며 바닥에 앉자 아내가 말했다.


“당신 힘든 거 알아. 그런데 이거 원래 우리 아이 몫이었잖아. 이거라도 해주고 싶어. 나 꼭 이 텐트 쳐야겠어.”


3인용 텐트는 생각보다 컸다. 거실에 한가운데 들어찬 텐트를 바라보던 아내가 들어가 보라고 말했다. 오렌지빛 텐트 안에 기어들어가자 이내 아내가 따라 들어왔다. 보너스로 달려온 작은 휴대용 램프를 켜자 우리 그림자가 텐트 안을 꽉 메웠다. 아내는 램프를 중간에 두고 텐트에 누웠다.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한다. 아들이 가고 나서부터 어머니는 집에 오는 일이 없었다. 아내는 어머니가 자신을 원망하고 있다고 했다. 오해가 아니라 정말로 말투에서 원망이 느껴져 전화를 받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말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죄인이라고 말했을 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아내를 어려워했기 때문에 언제나 나를 통해 말을 전했다.


“아이를 가지고 나서도 말이야…… 난 아이를 잃은 사람들 이야기, 솔직히 공감 안 갔어. 그 사람들이 보이는 슬픔 같은 거 말이야. 다큐멘터리나 시사 프로만 봐도 자주 나오잖아. 그냥, 아무 생각 없었는데. 그때 내가 얼마나 그 이야기들을 우습게 생각한 줄 알아? 나 감동이나 슬픔 같은 거 얕잡아 보면서 채널 바로 넘기고 그랬어.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가 얼마나 우스운지 모르겠어. 진짜 난 나쁜 년이야.”


담담히 말하면서도 아내는 자주 침을 삼켰다. 이야기를 멈췄다.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는 사람의 모양새로 미간을 찌푸리고 목을 매만졌다.


“나도 그래. 혼란스러워. 그런데……이미 일어난 일이잖아. 누가 우리 아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저 어쩔 수없이 벌어진 일이니까 너도 그렇게 죄책감 갖지 마. 이거 그냥 하늘의 뜻이야.”


뒤돌아 누워있는 아내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나는 아내가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아내가 대답했다.


“내가 미워했잖아.”


램프가 넘어졌다. 잠시 뒤 램프가 닿은 새끼손가락 마디가 따끔거렸다. 아내의 말 한마디에 그동안 굳게 닫아둔 판도라가 활짝 문을 연 듯 불안하고 두려웠다. 솔직히 나는 평생 아내가 이 말을 할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아내는 아들을 미워했다. 아니, 했었다. 미워하는 동시에 너무나 사랑했다. 사랑한다. 아내가 아들을 다루는 합리적인 모습은 아마도 그런 양가감정의 줄다리기에서 나오는 평형이리라. 어쩌면 오해였으리라. 나는 오래전, 아내에게 치명적이었을 아들의 출산에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서명을 했다. 당시 아들과 아내 모두 위험한 순간이었다. 의사는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종용했다. 의사가 간략하고 빠른 어투로 상황의 심각성을 말했지만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었다. 나는 아마도 고개를 떨군 채 고민에 빠진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의 머릿속에는 선택에 대한 올바른 근거나 논리는 존재하기 않았다. 아들을 구할 것인가 혹은 아내를 구할 것인가의 문제는 답변하는 이를 언제나 딜레마에 빠지게 할 것이 틀림없다. 아내는 의식이 없었다. 외국에 머물고 있는 처가 식구들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이었다. 연락을 취한다고 한들 받을 수도 없거니와 받는다고 한들 그들 또한 마땅한 대답을 내놓을 수 없음이 확실했다. 내 어머니는 의사의 말을 듣는 동시에 “주여, 어린 생명을 구하소서.”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아들을 구하겠다.’라는 맹세를 해버리고 만 것인지도 모른다. 아내는 출산 후 아들을 안지 않았다. 며칠을 의식 없이 헤매다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오늘처럼 울고 있었다. 의사는 아내의 눈물을 오해했다. 그는 재차 기적 같은 일에 감사하라고 말한 뒤 다소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떠났다. 아내에게 그것이 상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나는 한 번도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내 또한 그 일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다.


“처음에 어떻게 됐다고 했지? 어떻게 병원에 실려 갔는지 다시 말해줘.”


아내는 아들의 죽음을 처음부터 다시 들으려 했다. 나를 벌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아내는 그 이야기를 듣고 또 듣고 다시 들으려 애를 썼다. 울었지만 안정이 되었고 편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도 도무지 그 고통을 가늠할 수 없다며 괴로워했다.


“텐트에 들어가서 가습기를 틀자. 우리도 죽는지 시험해봐.”


아내도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맹렬히 현재를 살던 그녀는, 이제 끊임없이 지난날을 반추하기만 했다. 그럴 때마다 아들을 낳고 신경질적이던 그녀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텐트를 아들 방에 옮기자고 했다. 아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내는 화를 냈다. 아내는 여전히 아들 방에 들어갈 수 없었다. 가끔 문 앞에서 서성이다 울곤 했다. 어느 날 아내는 내게 처음으로 그날의 이야기를 했다. 아내는 술이 좀 취해있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면 나와 아들 중 누구를 살리는 것에 사인을 하겠냐고 물었다.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너를 살리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내의 눈빛이 떨렸다. 내가 잔인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이제 영원히 나를 미워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밀려왔다. 아내는 우리가 애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시간을 조금씩 떼어내며 과거를 부정했다. 나는 그런 후회들은 쓸모없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애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아내는 이제 행복은 바라지도 않는다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앞으로 올 위기에도 흔들리지 말자고 말했다. 아들의 죽음은 갑작스럽고 평생 깊은 상처를 남기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사람은 어느 때든 어떻게든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덧붙였다. 몇 분이 지나자 아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일어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뺨을 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아내를 저지하지 않았다.


그린란드 캠핑몰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그들은 텐트를 가지고 캠핑을 나갔는지 그것을 사용해보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텐트에 대한 리뷰를 쓰면 무려 50000 마일리지를 쌓아주겠다는 말도 함께. 내가 아무 말이 없다 그들은 재차 자신들의 홈페이지 주소를 불러주며 고객센터란의 체험방에 꼭 리뷰를 남기라고 했다. 사진을 첨부하면 업체와 연계한 캠핑 잡지에 실릴 확률이 크다는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나는 말했다. 어두운 밤 램프 하나만 달랑 켜진 텐트를 보면 마치 우리 집에 무덤 하나가 들어찬 기분이라고. 수화기에서는 긴 한숨과 함께 죄송하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그들이 무엇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는 여전히 텐트 안에 웅크려 자고 있었다.


기대 없는 매일의 일상과 친근해지자 시간은 다시 알맞은 속도로 흘러갔다. 아내와 나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일반의 삶을 지속해나갔다. 하지만 상처 입은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미래를 고의적으로 상실하며 단지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 때보다 다정히 서로의 마음을 품었지만, 사실 우리는 상처가 급습할만한 모든 요소들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번거롭기만 했던 해외출장을 자주 자원했다. 아침마다 냉장고 위에 붙은 아들의 사진을 보며 나는, 산채로 썩어가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아내의 슬픔에 기계적인 위로의 포옹이 오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눈을 뜨면 곧, 징그러운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아내는 피해대책본부에 가 몇 달 동안 그들과 함께 시위를 하고 국회에 항의하고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집단소송은 고사하고 그들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지만, 아내는 매일 같이 소송에 관한 자료를 펼쳐놓고 시간을 보냈다. 나 또한 위로받고 싶은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텐트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리고 수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나와 아내는 이혼에 합의했다. 우리는 따로 아들을 보러 갔지만 대책모임에는 같이 참석했다. 햇살의 숨통을 끊어 놓고 싶을 만큼 맑은 날이 계속됐다. 텐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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