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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치즈버거 Sep 08. 2023

랜덤박스



 사장의 심부름으로 은행에 갔다가 알게 되었다. 5만 원권 한 묶음에 500만 원이라는 사실을. 셈을 배운 아이들도 5만 원권 묶음이 20개가 있다는 건 1억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민하는 첫 번째 박스를 받은 날과 다른 의미로 손발이 벌벌 떨렸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그런데 신고해서 뭐라고 해야 하지?’


 민하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짧은 사이 자신이 1억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렸다. 화마에 피어나는 연기처럼 그 생각들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민하는 늘 돈 문제에 시달렸다. 돈이 들어오면 갈증이 해소된 듯 한숨 돌렸다. 그러다 며칠 뒤면 다시 타들어갔다. 창우는 집요하게 민하에게서 돈이 나올 구멍을 찾았다. 민하는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대출에 비상금 대출까지 받았다. 창우의 숨통이 트이자 민하의 목이 졸렸다. 창우는 빌리는 거라고 갚겠다고 했지만 공모전에서 우승해 상금을 받은 뒤에도 연락이 없었다. 금리는 자꾸만 치솟았다.     


 출근길, 계단에서 발목을 접질렸다. 돈뭉치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민하가 절뚝거리며 회사로 들어서자 사장이 그녀를 한 번 쓱 훑으며 지나갔다. 지수는 늘 그렇듯 고개만 까닥하고 민하를 본체만체했다. 지수는 눈이 뻑뻑하다고 계속 투덜거렸다. 집 주인이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지독한 노인네라서, 집에 군데군데 핀 곰팡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벽지로 대충 덮은 탓에 자기 눈이 이렇게 된 거라고. 대답을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기에 민하는 다 듣고 있으면서도 묵묵히 세금계산서만 들여다보았다.      


 “여보세요? ……. 네? 어디요?”


 핸드폰을 든 지수의 목소리에 대번에 짜증이 섞였다. 지수에게 전화가 온 것은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식사 후 나른한 졸음이 밀려온 듯 하품을 하고 눈가를 찍어 누르던 지수는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 한 통에 정신이 번쩍 든 얼굴을 했다.     


 “참고인 조사라뇨? 제가 왜요?”     


 지수의 입에서 나온 참고인이라는 단어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저 전세 계약한 지 이제 7개월밖에 안 지났어요. 앞으로 1년 반은 더 살 건데 무슨 그런 문자를 보내요? 저 정말 할머니한테 그런 문자 보낸 적 없어요.”      


 전화를 마친 지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핸드폰을 집어던지듯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직원 몇이 지수에게 다가왔다.     


 “아니, 우리 집주인 할머니가 실종이 됐는데 마지막으로 보낸 문자가 저라고. 아니, 할머니 통장에서 1억이 없어졌는데 그걸 왜 저한테 묻는지. 암튼 저도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조사받으러 나오라는데. 어떡해요? 아, 짜증나.”     


 지수의 말에 직원들은 자신들이 아는 법률 지식을 총동원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죄가 없다면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너무 겁먹지 말라고. 원래 경찰들은 그런 식으로 막무가내라고.     


 그날 이후 지수는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 자신이 궁지에 몰리고 있다고, 억울하다고 말했다. 지수의 번잡한 고민 덕에 민하는 집안 구석에 처박힌 돈뭉치를 잊을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지수는 더 이상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지수와 분담하던 업무는 이제 오롯이 민하의 차지였다. 사장은 골치 아파 죽겠다고 안 그래도 사람이 안 구해져 미치겠는데 왜 하필 자기 회사에서 재수 없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토로했다. 모지수보다 더 억울해 보였다. 사장은 굳이 지수의 책상을 치우라 지시했다. 혐의에서 자유로워진대도 지수가 돌아올 자리는 없다고 못 박는 듯. 송별회도 없이 모대리 모지수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들리는 이야기는 있었다. 지수가 회사 직원 하나에게 변호사를 구하는 문제를 논하며 말이 새어 나온 것이다. 지수는 더 이상 참고인이 아닌 용의자라고 했다. 한밤중에 대뜸 주인 할머니에게 집을 빼고 싶으니 자신의 전세보증금 1억을 내놓으라는 문자를 보냈다고 한다. 지수는 그런 적이 없다 길길이 날뛰었지만 할머니의 휴대폰에선 지수의 문자가 발견되었다. 실종 당일 할머니의 통장에서 1억이 인출되었다. 할머니네 집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보았다는 목격담과 이상한 괴성을 들었다는 진술도, 할머니와 가까운 조카가 나눴던 카카오톡 메시지도 모두 지수를 지목하고 있었다. 지수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맨바닥에 앉아 삼각김밥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퇴근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티브이에서는 생사의 기로에 놓인 응급환자가 나오고 있었다. 피로 물든 시트. 외상 센터의 의사는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말했다. 멍하니 티브이를 보던 민하는 “나도.” 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돈뭉치를 경찰에 신고하는 일은 물 건너갔다. 모지수의 1억과 랜덤박스의 1억이 같은 곳에서 흘러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에도 인과관계는 있을 테니. 핸드폰에서는 리뷰를 요구하는 알림이 자꾸 울렸다.  

   

 민하는 옷장 안에 쑤셔 놓았던 상자를 다시 꺼냈다. 두 손으로 연못의 물을 뜨듯 돈뭉치를 쥐어 보았다. 꿈도 못 꿔본 액수건만 손에 쥔 1억은 생각보다 부피가 너무 작았다. 겨우 이 정도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창우는 민하에게 말했었다. 넌 어떻게 이 나이를 먹도록 5천만 원이 없어 빌빌거리냐고. 빌빌거리는 민하에게서 5천만 원을 받아 간 창우는 민하보다 더 일찍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으면서도 5천만 원이 없어 빌빌거리는 지수에게 그 돈을 줬다. 나머지 5천만 원은 지수의 부모님이 보태주었다. 그렇게 지수는 지하철역 바로 앞에 있는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5천만 원의 빚에 이자를 메꾸려 민하가 전전긍긍하는 동안 지수는 1억짜리 전셋집에 대한 불만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고객님의 핸드폰 데이터를 바탕으로…… 고객님의 취향을 99퍼센트 분석해……’     

 민하는 매끈한 신권 다발의 표면을 매만지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도 원하는 걸 입 밖으로 소리 내 말한 적 없었지만 민하에게도 꿈은 있었다. 글을 쓰며 사는 삶. 전업 작가도 아니었다. 하루 중 적은 시간이라 해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 편히 글을 쓰는 것. 단지 그뿐이었다.      


 




 거래처 직원 하나가 회사에 방문했다. 사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사장실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하지만 손님이 떠나자 사장은 불같이 화를 냈다. 모지수 이름 뒤에 온갖 욕을 달았다. 그 여자 때문에 자기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자기가 이 업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띨띨이가 되었다고, 사장이 길길이 날뛰자 백 이사가 달려와 그를 진정시켰다. 사장은 모지수가 있던 이제는 텅 빈 민하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어이, 민하 씨. 내가 어제 말한 거 그거 다 처리됐어? 그거, 그거.”     


 사장의 말에 민하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말하는 ‘그거’가 뭔지는 몰랐지만 시킨 건 어쨌든 다 했으니까.      


 “쟤 정규직 전환해.”    

 

 정적보다 더 진한 침묵이 사무실 안을 감돌았다. 민하의 소망 하나가 이루어졌다. 그 누구의 축하도 없이. 민하는 홧김에 내던진 생선에 맞은 고양이처럼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오히려 이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림자처럼, 공기처럼, 안개처럼 조용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싶었다. 퇴근이 다가오자 백 이사가 새로운 근로계약서를 내밀었다.      


 “도장 찍기 전에 미리 한번 봐두라고.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무 마음이 무겁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건 모대리 아니 모지수 씨 일이랑은 상관없이 민하 씨가 그동안 성실하게 일을 잘해준 덕분이니까. 축하해요, 박대리. 주말 잘 보내고.”     


 오랜만에 민하는 푹 잠들었다. 마음의 짐이라고는 생전 몰랐던 사람처럼.      


 평소의 휴일과 달리 오늘은 일찍 눈이 떠졌다. 민하는 다른 회사원들과 달리 휴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창우가 떠난 이후, 침묵만 가득한 방안에 만날 사람도 없이 흔한 취미도 없이 시간이 가길 기다리며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는 게 유일한 활동이었으니까. 분명 진동으로 바꿔  놓은 기억이 있건만 랜덤박스의 알림은 귀를 찌르듯 울렸다. 별점과 리뷰를 요구하는 여러 개의 메시지가 집착 심한 엄마의 부재중 전화처럼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민하는 모두 지운 다음 다시 눈을 감으려 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얼마 전 실종되었던 80대 노인 강모씨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홀로 살던 강모 씨가 세입자와 다툼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그의 조카 김모 씨의 신고로 근방을 탐문하던 경찰은 어제저녁 10시, 자택 근처 수로에서 강모 씨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를 확인한 경찰은 용의자로 강모 씨 소유의 주택에 세 들어 살던 20대 여성을 붙잡아 조사하고 있습니다. 강모 씨가 실종되기 이틀 전 갑작스러운 전세 계약 파기와 보증금 반환을 요구, 협박을 가한 증거를 확보, 실종 전날 의문의 여성을 보았다는 주변 목격자들의 진술에 따라 인출된 1억 원의 행방과…….     


 민하는 티브이를 껐다. 커튼을 치자 아침의 밝은 햇살이 건물 틈 사이를 요령 있게 빠져나와 민하의 방 안까지 와닿았다. 햇살 사이로 작은 먼지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민하는 창문을 활짝 연 뒤, 계절이 두 번이나 지나도록 한 번도 빨지 않은 이불을 챙겨 들고 근처 빨래방에도 들렸다. 마트에서 알뜰 코너가 아닌 싱싱 코너로 바로 가 과일도 한 바구니 샀다. 남은 잔돈으로 문구점에서 뽑기도 하고 아이들이 탕후루를 사 먹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도 보았다.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손을 흔들기도 하고 바닥에 있는 돌을 아무 이유도 없이 차보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오래된 책 냄새를 맡으며 민하는 태양이 기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삶에서 미뤄놓았던 여유를 오늘 하루에 다 쓴 기분이었다.     




 



 딩동-.     


 이번에는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문을 열었다. 어둑한 사위 멀리서 비치는 가로등 조명 아래에는 그 어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민하는 서둘러 상자를 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가벼웠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상자를 열자 익숙한 글씨가 보였다.      


 민하는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수첩을 넘겼다. 틈날 때마다 아이디어를 메모하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원고를 마저 꺼냈다. A4 용지에 민하의 손글씨가 빼곡했다. 창우의 발길질에 박살 난 프린트기. 민하는 오래된 노트북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손으로 원고를 적고 다시 손으로 퇴고를 보았다. 그렇게 완성된 원고를 다시 노트북에 옮기기도 전에 모든 일은 어그러졌다. 창우는 민하를 잘 알았다. 그녀에게 그 순간 가장 소중한 것을 부수는 게 창우의 특기였다. 창우는 민하에게서 빼앗은 원고에서 몇 개의 단어들과 결말을 고쳐 공모전에 냈다. 창우가 고친 부분의 미흡함만을 지적한 심사위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점을 지닌 그 원고를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몇 달 뒤 포털 사이트에서 연재되기 시작했다.      


 딩동-.     


 다시 한번 울린 초인종 소리에 놀란 민하는 손에서 원고와 수첩을 떨어뜨렸다. 인터폰에는 모자의 챙 끝만 아른거렸다. 민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반대편 문고리가 흔들렸다. 금속 사이로 악력이 느껴질 만큼 세게. 치솟는 불길처럼 창우가 맹렬하게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돌아왔구나.”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은 민하는 아픔도 잊은 채 창우를 보았다. 저도 모르게 비집고 나오는 미소를 숨기려 안간힘을 썼다. 있어야 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분. 오늘은 최고의 하루라고 민하는 생각했다. 비록 창우는 화가 많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창우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떻게 넌 변한 게 없냐?”     


 창우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하이에나처럼 좁은 방을 어슬렁거렸다.      


 “뭐야? 실비아 플라스? 엥? 영어잖아. 너 요즘 살 만한가 보다? 이거 꽤 비쌀 텐데.”     


 실비아 플라스의 책을 발견한 창우가 말했다. 사실 실비아 플라스를 좋아하게 된 건 창우 덕분이었다. 창우는 민하의 취업 후 실비아 플라스와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전경린의 책을 민하에게 사주었다.     


 - 이 작가들 공통점이 뭔지 알아?

 - 여자라는 거?

 - 그것도 맞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닌데?

 - 모두 위대한 작품을 쓴 작가라는 거?


 창우는 씩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 음, 뭐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그것도 맞지. 하지만 아니야, 내가 듣고 싶은 말은.

 - 뭘까? 잘 모르겠네. 시를 썼다는 건가?

 - 이 셋 모두 다 자살했어.     


 창우가 그러더니 책 모서리로 민하의 머리를 콩콩 찧으며 말했다.     


 -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을 거야. 내가 응원할게.          



 “아이씨, 뭐야?”     


 창우는 발에 밟힌 원고와 수첩을 보았다. 창우는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너 뭐야? 이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어!”     


 “이, 이거. 워, 원래 내 거잖아.”     


 “네 거?”     


 창우가 어이없다는 듯이 민하를 바라보았다.     


 “근데 이거 이제 네 거 아닌데?”     


 민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2편 쓰, 쓰는 거. 에이전시에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해 봐. 내가 어, 어떻게든 기한 맞춰서 써 줄게. 계약 파기 될 수도 있다며.”     


 “그거, 어떻게 알았어?”     


 “모지수. 통화하는 거 들었어.”     


 “와, 씨. 이게 진짜. 너 돌았구나? 야, 허튼소리 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해라. 거짓말하면 알지? 너 이 수첩이랑 원고 어디서 났어? 너 집에 우리 집에 몰래 들어왔었냐? 간이 배밖으로 나왔네. 야, 솔직히 말해? 너지? 그 미친 할망구 죽인 거 너 아니냐고! 네가 지수랑 나 엿 먹이려고 꾸민 짓 아니야? 뭐? 도와줘? 아주 구원자 납셨네. 미친년아, 네년이 쓴 우중충한 글 내가 안 고쳤으면 공모전에서 뽑히지도 못했어. 뭘 알고 말해.”     


 “창우야, 이거 좀 놔줘. 아, 아파.”     


 “아씨, 진짜 짜증 나게. 내가 몇 번을 더 말해야 해!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넌 태도가 글러 먹었어.”     


 창우는 눈이 돌았다. 민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령 설명한다고 해도 창우의 화가 가라앉을 리 없었다. 랜덤박스의 작동원리는 고객의 욕망에 기인하고 있으므로.      


 민하는 밤새 창우를 온몸으로 견뎠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눈을 떴을 땐 이미 날이 밝은 후였다. 민하는 멍투성이의 얼굴을 하고 회사로 출근했다. 직원들 모두 민하를 보자 흠칫 놀랐다. 사장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네가 가해자냐고 물었다. 민하는 아니라고 그저 일을 당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럼 됐어. 근성 있네. 마스크라도 쓰고 있어.”라고 말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민하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으며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랜덤박스가 온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민하는 커다란 박스 앞에 잠시 말을 잃었다. 박스는 무게만큼이나 무거웠다. 박스를 질질 끌어 겨우 집안으로 옮겼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커터칼을 가져왔다. 안에 든 것이 도무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어?”     


 창우는 눈을 뜬 채 박스 안 비닐에 누워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민하는 커터칼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박스를 뜯었다. 같이 온 작은 배낭 안에는 창우의 핸드폰과 지갑을 비롯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비닐 속에 있는 창우는 말은커녕 숨도 쉬지 않았다. 맥박도 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살아있는 사람 같아 보였다. 불쾌한 냄새가 나지도 않았고 얼굴엔 메이크업을 한 듯 혈색이 가득했다. 마치 말끔하게 방부 처리된 미라 같았다. 오랜만에 인상 쓰지 않는 창우를 보자 처음 만났을 때의 얼굴이 기억났다. 민하는 그때도 자신에게 거침없이 다가오는 창우가 부담스러워 그가 영원히 잠든 채 자기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띠로리로-.     


 불쑥 터지는 핸드폰 벨 소리에 민하는 버선발로 뛰어갔다. 혹여라도 아이가 깰까 조마조마한 엄마의 얼굴로. 액정에 뜨는 번호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민하는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다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이봐, 아가씨.”     


 낯익은 목소리, 자신에게 랜덤박스를 권하던 중년의 여자였다.      


 “아가씨, 진짜 이럴 거야?”     


 “네?”     


 “내가 왜 전화했는지 몰라서 물어?”


 민하의 시선이 창우에게로 쏠렸다. 묻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건너편에서 짜증 섞인 한숨이 밀려 나왔다. 민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뭐 큰 거 바랬어? 돈을 내라 했어, 뭘 하라 했어? 아니, 도대체 왜 리뷰를 안 쓰는 거야. 마음에 안 들면 마음에 안 든다. 마음에 들면 든다, 의견을 남겨야 할 거 아니야! 내가 말했지? 선물이 마음에 안 들면 팔아버려도 된다고. 별점 5개 안 줘도 되니까 리뷰 남기라고. 우리가 별 1개 준다고 찾아가서 해코지라도 할까 봐 그래? 진짜 속고만 살았어? 당하고만 살았어? 왜 사람 말을 못 믿는데?”     


 “아니, 그게…….”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아, 아니요.”     


 “좋았어? 그럼 별 5개 남겨야지. 왜 가만있었어?”     


 “네? 아. 저, 저기 보내주신 거, 것들이 너, 너무…….”     


 “너무? 너무 뭐? 아휴, 답답해. 왜 이렇게 말을 더듬거려.”     


 민하는 궁금한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성마른 여자의 잔소리를 보아하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았다. 민하는 침을 한번 삼켰다.   

  

 “아니, 그보다……. 저기, 모르시나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아, 그러니까, 저기, 제가 뭘 받았는지. 그게…….”     


 “본인이 원하는 걸 받았겠지.”    

 

 “아니, 그런데 이게 좀 부, 부적절한 거 같아서.”     


 “뭐? 부적절? 왜? 뭐 이상한 거라도 갔어? 아, 혹시 뭐 상자 안에 홀딱 벗은 남자라도 들어 있었어?”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킬킬거리며 한참 웃더니 말을 이었다.    

 

 “뭐가 됐든 그건 다 아가씨가 원한 거야. 여기 시스템이 그래. 만드는 놈들이 얼마나 지독하다구.”     


 “그럼 선, 선생님은 제가 뭘 받았는지 모르시는 건가요?”     


 “난 모르지. 여긴 인공지능이 알아서 판단하고 물건은 물류창고에서 나가. 그러고 나면 끝이야. 우린 니마이 쌈마이처럼 고객 정보 빼돌리는 짓도 안 한다고. 여긴 모든 게 암호화돼 있어. 나만 모르나? 누가 뭘 받았는지 사장도 모르고 만든 인간도 모른다고. 신기하지 않아? 세상이 이래. 뭐든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가씨도 몰랐잖아, 자기 욕망이 뭔지. 이번에 잘 확인했지? 감사한 줄 알아. 누가 이런 걸 해줘? 아가씨는 운이 아주 좋다고.”      


 “정, 정말 아, 아무도 모르는 건가요?”     


 “참나, 내가 말했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왜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어. 한 번 듣고 이해했잖아. 그런데 왜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자꾸 되물어! 왜 자꾸 자기 자신을 의심해? 왜! 왜! 왜!”     


 여자는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선명한 분노가 수화기를 타고 공포가 되어 민하의 온몸을 타고 흘렀다. 소름이 돋으며 등줄기에서 시큰한 땀방울이 느껴졌다. 잔뜩 쏟아낸 여자가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이봐, 아가씨. 잘 들어.”     


 “네, 네?”     


 긴장한 민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중요한 건 리뷰를 쓰는 거야. 아가씨가 뭘 받았든 그건 이제 아가씨 소관이야. 원하는 걸 받았다면 그건 아가씨가 착하게 살았다는 증거겠지. 알잖아.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이랑 나쁜 애들한테는 선물 안 주는 거. 그게 세상사 자명한 이치거든. 오케이? 그럼 난 이만 끊는다. 리뷰 쓰나 안 쓰나 내가 지켜볼 거야!”     


 “아, 네, 네. 쓸게요. 쓰겠습니다.”    

 

 민하는 핸드폰으로 랜덤박스의 아이콘을 눌렀다.     

 

 - 랜덤박스 덕에 비로소 온전한 제 삶을 찾았습니다. 저는 지금 꿈에 그리던 삶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두에게 행운이 깃들기를.     


 민하는 상자 4개에 모두 별 5개를 줬다.      



 





 얼마 전 세탁한 이불 위에 창우를 반듯이 눕히고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매트리스 위에 간신히 올라간 창우를 보며 허리를 두드렸다. 곧 부드럽게 손을 쓸어 창우의 눈을 감겨주었다. 가만히 누워있는 창우를 보자 꼭 달콤한 꿈을 꾸는 사람처럼 편해 보였다. 자신의 침대도 그만큼 아늑해진 느낌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민하는 때 이른 캐럴을 흥얼거리며 창우의 핸드폰을 열었다. 비번은 모지수의 생일이 맞았다. 출판 에이전시 사장의 번호를 찾아내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손창우입니다. 다음 원고 준비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대리인을 통해 연락하고 싶습니다. 다음 주까지 샘플 원고를 보낼 테니 보고 판단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래 기다린 만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민하는 노트북을 열었다. 잠을 줄인다면 회사에 출퇴근하면서도 다음 주까지 5화까지는 거뜬히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민하의 머릿속엔 그다음 이야기의 결말까지 이미 해치운 후니까. 민하는 아주 오랜만에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니 이렇게 환한 웃음은 평생 처음인 것 같았다. 비로소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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