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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y 01. 2022

글라라는 예뻤다

언니를 떠나보내고, 글라라라는 새로운 이름이 내게로 왔다. 1999년 봄, 경남 고성에 있는 M 농장에서였다. M 농장은 그와 내가 자주 가던 여행지 중의 하나였다. 농장에서 효소 만드는 일을 거들던 중에 느닷없이 아주머니는 그의 세례명을 물었다. 그가 프란치스코라고 대답하자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글라라 하면 되겠네."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고 그와 나는 말똥말똥 얼굴만 쳐다보며 웃었다.

“아, 글라라가 프란치스코의 연인이었잖아? 철이가 프란치스코니까 숙이는 글라라 하면 되지. 이제부터 글라라라고 부를게.”

아직 세례 받지도 않은 나를 아주머니가 글라라라고 불렀다. 처음 듣는 이름, 글라라. 나쁘지 않았다. 글라라~~ 글라라~~ 랄랄라 흥겨운 노랫가락처럼 혀가 혀 천장에 가 닿으며 톡톡 튕기는 리듬감이 좋았다. 그와 나를 연인으로 바라봐주는 것이 내심 흐뭇했다. 그의 침묵이 나를 연인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여겨져 맘이 두근거렸다.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인데 낯설지 않은 글라라, 클라라. 프란치스코의 연인이었다가 프란치스코 성인을 뒤따라 수도자의 길로 들어간 여인.  


농장 주인장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농장에서 일요일 아침을 맞으며 아주머니가 미사에 같이 가자 하셨다. 그는 말없이 따라나섰고, 나도 동행했다. 성당에 가보고 싶었다. 어릴 적 불교 집안이었던 나에게 성당은 접근할 수 없는 불가침 구역과도 같았다. 선택받은 사람, 자격이 있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인 줄 알았다. 누구나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주머니는 주일 아침이면 시골 동네 노인분들을 성당까지 모셔가는 차량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날은 아주머니 대신 그가 차량 운전을 하고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우리가 부부인 줄로 아셨다. 어느 동네로 이사 왔냐 물으시고, 시골에 새 사람이 오니 좋다고 반기며 이름을 물었다. 그분들에게 그는 프란치스코, 나는 글라라였다. 어르신들 눈에 글라라는 참 예뻤다. 말도 예쁘게 하고 마음씨도 고운 젊은 처자였다. 글라라는 가는 곳마다 환영받고 이쁨 받았다. 어르신들은 밝고 명랑한 젊은 처자의 생기 있고 쾌활한 모습을 참하다 했고, 귀여워하고 예뻐했다.


시골 작은 성당에서의 고요함이 참 좋았다. 창문 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새벽, 햇살이 찬란히 스며드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성전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은 경건해지고 숙연해졌다. 노인분들의 기도는 무엇일까?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하기도 했다. 맨 뒤 가장자리에 앉아서 마치 신자인 척 미사 참례하고 있었지만, 신자가 아니어서 영성체를 할 수는 없었다. 그와 혼인을 하고, 글라라로 세례를 받으면 나도 가톨릭 신자가 되고 영성체를 하게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나는 무신론자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가 없었다. 불교에서의 "성불하십시오"하는 말은 누구든 수행을 많이 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으로 어찌어찌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성령을 믿으며... " 이 말들을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겠는데, 과연 내가 세례를 받을 수가 있을까, 내가 글라라일 수 있을까, 의문의 생각들로 머리는 복잡했다. 그러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참 좋았다. 그곳에는 고요한 평화와 사랑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환대받는 느낌이었고, 참 행복과 위안을 얻었다.   


혼인을 앞두고 풍물패 주임신부님에게 주례를 요청하며 찾아갔을 때, 그분은 마치 동네 아저씨처럼 우릴 반겼다. 신부라는 존재가 이렇게 가까이 앉아서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웠다. 털털한 웃음으로 "관면 혼배 내가 해줄 게. 혼인할 때 관면 혼배 같이 하면 되지. 결혼반지로 묵주반지만 준비해."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신부로서의 근엄함을 넘어선 친근함과 따뜻함이 참 좋았다. 

그는 초등학교 때 따뜻한 남쪽 작은 섬의 공소에서 세례를 받았다. 청년기에는 부산 S 성당에서 청년회 활동을 했다. 어느 날 주보 공지에서 풍물패 회원을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단짝 친구였던 바오로와 함께 풍물패에 가입하였다. 가톨릭 풍물패 연합회 하늘소리. 그 하늘소리와의 인연이 나와의 우연한 만남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늘소리. 문득 풍물패 이름 또한 감격스럽다. 하늘소리라니. 하늘의 소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하늘소리인가. 하늘소리는 우리의 혼인식에서도 풍물을 울려 축하해주었다. 하늘소리의 축하를 받으며 글라라의 재탄생이 이루어졌다. 아직 세례 받기 전이었지만 마치 세례 받은 자처럼 하늘의 축복을 듬뿍 받았다.  

그리고 1년 후, 2000년 12월 24일 성탄 전야에서 글라라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식 날, 글라라는 예뻤다. 고운 한복 입고 장미 꽃다발 한아름을 품에 안고 미소 띤 그 모습은 생애 최고의 순간. 어느 누구 부럽지 않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새댁이었을 것이다. 풍성한 한복 치마에 가려져서 임산부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배속에는 예쁜 아기가 발길질로 존재감을 뿜어대고 있었다. 마냥 기쁘고 행복하기만 했다. 앞으로 꽃길만 펼쳐질 줄 알았다. 친구들과 주변분들 모두가 얼마나 기뻐하고 축하해주었는지, 내 생애 그만큼 축하를 많이 받아본 적이 있었을까. '아아 사랑받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다. 사랑으로 충만한 날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하느님의 자녀, 글라라로 다시 태어나던 그날. 나의 몸은 새 생명을 잉태한 엄마의 몸이었다. 글라라는 엄마의 몸으로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엄마로 20년의 삶을 살아내고 나서 이제 나는 이글라라로 다시 태어난다. 이글라라? 

첫 글자는 족보에 남아 있는 이 씨 가문의 성을 남겨 두었다. 연안 이 씨 가문의 다섯째, 2남 4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지금까지 오십사 년을 살아온 과거의 흔적. 내게 생명을 주신 부모의 뿌리를 간직하고 싶어서. 언니 말에 의하면 그나마 우리 아빠는 신식이어서 딸들도 족보에 다 이름을 올려주었다고 했다. 당시 다른 집안에서는 딸들은 시집가면 그만이라고 족보에 이름 올리지 않고 아들들만 올렸다는데, 아빠는 딸들도 모두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고 언니가 그랬다. 족보에 이름을 올리려면 한 명당 5만 원씩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돈을 아까워하는 친척분들이 많았지만 아빠는 돈을 아끼지 않고 딸들도 족보에 이름을 올렸다며 언니는 은근 자랑스러워했다. 근데 나는 족보 구경도 해보지 못했으니 내 이름이 올라가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족보에 이름이 있건 말건 내게는 중요하지 않다. 

친척들은 아빠 보고 말했다. "딸들만씩한 거 뭐 대단행 딸들꺼정 족보에 이름 올렴시니?"하고. 옛날 어른들은 '딸들만씩한거' 라고 했다. 그렇지, 나는 딸이다. 이 씨 가문의 딸. 아들 낳겠다고 고군분투하며 울 엄마가 마흔 넘어서 낳은 딸. "에구 똘인게게" 실망스러운 친척 아주망들의 말에 엄마는 눈물 한숨지으며 갓난아기인 나를 품에 안아주지도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아들이 아니라고 실망한 엄마에게 외면당했던, 나는 딸이다. 2년 뒤에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엄마 품에서 밀려나지 않으려 악착같이 엄마 바지부랭이 잡아당기며 떼쓰고 고집부리던 딸. 친척 아주망들은 나보고 그랬다. 이기적이고 욕심 많다고. 남동생은 착하고 순한데, 나 보고는 욕심꾸러기라고. "니가 다 뺏어먹어부난 자인 저추륵 말라시내." 친척들은 나를 흘겨보며 착한 남동생이 먹을 젖을 내가 다 뺏어먹어버려서 동생은 작고 말랐다고 내 탓을 했다.

태어나면서 나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악착같이 살아남기 위해,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더 열심히 무엇이든 열심히 했는지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다들 똑순이라고, 똑부러지게 말도 잘하고 요망진 아이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계집애가 잘나 봐야 팔자 사납다고들 했으니까. 건방지게 말대꾸한다고 하고, 뭐해달라고 하면 철딱서니 없다고 혼나고, 딸들만씩한 거 공부 잘하면 뭐하냐고, 1등 하고서도 칭찬 한번 듣지 못했다. 20년을 고향 제주에서 보내면서 칭찬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사사건건 꼬투리 잡히고 비난받는 느낌일 뿐. 고향에서 나는 예쁘다는 말을 듣기는커녕 고집 세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건방진 계집애였다. 

그러던 내가 글라라로 불릴 때 어른들이 다들 예쁘다고 하고, 참하다고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칭찬받는 게 참 좋다. 세상으로부터 환영받고 환대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었다. 글라라가 참 좋았다. 


이글라라. 또 하나의 다른 의미로는 글 쓰는 라라, 글이 있는 나라, 글라라이기도 하다. 하늘나라, 동화나라처럼 글나라. 자기 이야기가 글이 되고, 누구든지 하고자 하면 글을 쓸 수 있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모두가 글을 쓰는, 글이 있는 글라라. 나는 말보다 글이 더 좋다. 글을 읽는 것도 좋고, 글 쓰는 것도 좋고. 이 글 쓰는 나라에서는 외딴섬에서의 고립, 외면, 불의와 편견, 차별을 다 날려버리고 어느 누구든 모두가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환영받는 상호 환대의 수평적 관계를 소망한다. 내가 꿈꾸는 세상, 글 쓰는 글나라, 이글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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