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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May 01. 2022

사랑의 종착역, 눈물의 결혼식

언니를 보내고 나서, 서울 탈출을 꿈꾸었다. 서른을 맞이하고 나서는 서울살이가 싫어졌다. 20대 청춘을 보낸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서울은 내게 상처와 상실의 도시일 뿐, 더 이상 미련도 희망도 없었다. 산악회에서 주말마다 전국의 산을 돌아다니며 귀농귀촌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것 또한 내가 갈 길은 아닌 듯, 어디로 갈까 청춘의 방황은 계속되었다. 

99년 새해를 맞으며 엄마는 결혼을 종용하였다. 엄마는 파킨슨을 앓고 계셨는데, 하루가 다르게 몸이 쇠약해지면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하셨다. 나와 남동생을 결혼시키는 것이 당신에게 남은 숙제라고 하시며 그해 나를 결혼시키고, 다음 해에 동생을 결혼시키고, 그러고 나서 당신은 저 세상으로 가겠노라고 홀로 남은 여생 설계를 하고 있었다. 집 떠나 서울에 있는 자식 둘을 출가시켜야만 홀가분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하시며 어미보다 먼저 당신 큰딸을 하늘로 보내고 나서는 당신도 하늘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엄마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를 마주하는 것은 마음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다. 엄마를 피하려고 설 명절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엄마와 친척들은 "결혼 안 하냐?", "일은?", "직장은 어디 다니냐?" 등등의 질문을 쏟아부을 것이고 프리랜서로 정해진 직장이 없는 나를 사회의 낙오자로 바라볼 것이었다.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피하는 것. 설 명절에 고향에 가지 않고 홀로 서울 자취방에서 시간을 빈둥거리기는 싫었다. 그래서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갔다. 당시 내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부산까지 완행열차로, 마지막 밤 열차를 타고 내려가 광안리에서 바다 일출을 보고, 아침 해변을 거닐다가, 남포동 거리를 누비는 것이었다. 부산에 있는 친구는 동해안 별신굿을 보러 같이 가자 했다. 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1999년 2월 17일. 부산역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는 하늘소리 회원인, 친구의 선배일 뿐이었다. 그는 부산역으로 나를 마중 나온 친구와 동행했다. 친구와 나를 태워 광안리 해변에 내려주었다. 친구와 둘이서 밤새워 술을 마실 거라는 우리 계획을 듣고는 아가씨 둘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소주를 마시려는 계획이 내심 불안해 보였는지 집에 가지 않고 우리 옆에 남았다. 그는 술을 하지 않았다. 소주 한잔이면 얼굴이 빠알개지면서 혼자 술을 다 마신 사람처럼 헤롱 거리고 있으면서 빈 소주잔을 앞에 두고 앉아서 옆 사람들을 보디가드 하는 사람이었다. 술 취한 후배들을 한 명 한 명 집까지 태워주고 돌아간다고 했다. 그날 밤도 그는 소주잔에 생수를 채워 마시며 조용히 우리 곁에 머물러 주었다. 말없이 있을 뿐, 우리 이야기에 끼어들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시간을 삼키며 있다가 일출을 보고 들어가는 우리 둘을 친구 아파트 앞까지 태워주고 갔다. 

친구는 "행님요, 고맙습니데이"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허리 숙여 인사하며 그를 보냈다. 친구는 그에 대해 말해주며 요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자기들도 알지 못할 미묘한 데가 많다고. 그는 가톨릭 풍물패의 북잽이였다. 친구는 그 풍물패 회장으로 창립멤버였다. 나와는 아주 우연히  서울 어느 포장마차에서 밤새워 술을 마신 인연으로 절친이 되었다. 친구는 소주를 잘 마신다. 바다가 보고 싶을 때면 훌쩍 서울을 떠나 부산에 내려왔고, 그때마다 친구는 나에게 잠자리와 식사, 술, 놀 거리 등을 제공해주었다. 

다음 날, 동해안 별신굿을 보러 가는 길에도 그가 동행했다. 나와 친구가 가는 곳마다 우리 둘을 태워 주었다. 오디오도 고장이 나버린 오래된 낡은 중고차 PRIDE. 그 덕에 우리는 그의 생생한 목소리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의 노래는 운치 있고, 울림이 있고, 시를 읊조리는 듯, 낭만적이었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미워서도 아니고 좋아서도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말없이 돌아서서 조용히 가련다

별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잘나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높~이 뜬 당신이기에 고개 숙여 걸으며 두 눈을 감는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밤, 그는 장사익의 뜨거운 고백을 노래했다. 나에게도 사랑 고백을 하였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 생각했는지, 그는 말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이별인 줄 알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태종대 바다를 거닐고 있었다. 핸드폰이 없던 그 당시 나는 삐삐를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삐삐가 울렸다. 그가 연락을 한 것이다. 부산을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연락이 닿은 나에게 건네줄 게 있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서울행 막차로 열차표를 교환하고 남포동에서 기다렸다. 손때가 묻고 색이 바래 누레진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서, 까만 양복을 입은 채로 그가 나타났다. 퇴근하고서, 나에게 이 시집을 건네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시집의 시들을 다 읽고 오느라 늦었단다. 시집은 칼린 지브란의 <예언자>였다. 그는 칼린 지브란의 신봉자였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여라' 사랑 예찬론자였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그 시집을 시집보내듯이 나에게 건네주며, 그는 '나랑 사귀려면 그 정도의 자격을 갖추려면 다시 공부해서 S 대 수학과에 가야 하나'라는 생각을 했단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다시 공부해서 S대 수학과에 가고 싶은데, 그리고 거기서 나를 만났더라면 서로 사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나에게 잘 가라고 마지막 작별을 하면서 그는 칼린 지브란의 <예언자>를 읊었다.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그를 따르라.

비록 그 길이 힘들고 가파를지라도. 

사랑의 날개가 그대를 감싸 안거든 그에게 온몸을 내맡겨라.

비록 그 날개 속에 숨은 칼이 그대를 상처 입힐지라도 


돌아서는 그를 떠나 서울로 왔지만 나는 그를 보내지 않았다. 삐삐로 매일 밤 연락을 주고받았고, 내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그는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를 붙잡았고, 남도를 누비며 우리는 만났다. 고성 통영 진주 88 고속도로를 달려 지리산 남원까지. 낡은 자가용 PRIDE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하여 동해안을 따라서 강원도 양양까지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나는 그에게 이끌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참 좋았다. 따뜻한 사람, 그의 따뜻함이 좋았다.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너른 품을 가진 사람, 내가 '아' 말하면 '어'하고 알아듣는 듯한 그런 경험은 경이로웠다. 아하, 이렇게 수용받고 공감받을 수도 있구나. 그는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상을 좋아했다. "생각할 수 있나요? 그럼 지금 당신은 최상의 조합입니다."라는 철학적인 말을 진지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친구들은 우리들의 연애를 지켜보며 영화 한 편을 찍는다고 했다. 영화 제목, "섬 소년, 섬 소녀 만나다." 제주도 섬 소녀는 통영 사량도 섬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와 마음 한철을 보내며 나도 통영을 사랑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은 그의 고향이다. 통영에서 배를 타고 1시간 남짓 들어가면 상도와 하도 2개의 섬이 마주보고 있는 아름다운 섬 사량도.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사량도 섬 소년은 어린시절 행복한 유년기를 보냈으나 이후의 청춘은 불행하고 고단했다. 

시인 박준에게 여행의 취향은 '미각 다음에 시각 다음에 생긴 여행의 취향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했는데, 역으로 나에게 여행의 취향은 사람에 관한 것, 그리고 시각,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생긴 것이 미각이다. 내게 통영은 그가 어린시절 추억을 들려주었던 곳이며, 통영 바닷가, 사량도 해변, 세월을 낚는 어부와 세월은 잊은 풍경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이다. 





그는 나와 결혼하기 위해 오빠 앞에 무릎을 꿇는 굴욕을 감수했다.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지 않고 묵묵히 뜨거운 침묵으로 모욕과 수모를 감내했다. 서울 출장을 왔던 오빠는 그와의 상견례에서 그에게 소주잔을 집어던졌다. "야이 새끼야, 니가 감히 !!!" 소리를 지르며 손에 들고 있던 소주잔을 날렸다. 오빠가 던진 소주잔은 그의 이마에 가 닿았고, 그의 이마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상견례 자리에 합석했던 남동생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고, 그는 병원 응급실에서 이마의 상처를 꿰매고 서울에 살고 있는 그의 누나 집으로 갔다. 나는 오빠에게 붙들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빠의 폭력에 저항하지도 않았고 얼어붙은 몸으로 침묵한 채 가만히 있었다. 오빠는 나에게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했다. 마음은 '왜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느냐, 내 인생에 무슨 권한이 있느냐,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나에게 지시하고 시키느냐'고 소리치고 항변하고 싶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오빠 말을 그저 듣기만 있었다. 무거운 침묵은 오빠에 대한 순종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거부하고 싶지만 나는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하지 못했다. 그저 무거운 침묵으로 응답할 뿐, 얼어붙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러했듯이, 20년의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도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드는 호랑이 앞에서 나는 도망치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쭈그리고 서 있는 한 마리 어린 토끼였다. 폭력에 항거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방관했던 비겁함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는 죄책감이 되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예전처럼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만났다. 내가 가는 곳마다 그는 나를 보디가드 해 주었고,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가 운전하는 폐차 직전의 중고 자동차 PRIDE를 타고 전국 팔도를 유랑하였다. 

긴 시간이 흐르고 나는 오빠에게 결단의 편지를 썼다. '집에서 결혼을 종용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을 하기 위한 만남이 아니다. 평생 친구로 지낼 수 있다. 오빠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와 그는 남녀 관계이기 이전에 인간적인 관계로 평생 동반자로 지낼 것이다. 오빠가 결혼을 반대할 수는 있지만 그와 나의 만남을 금지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만류하더라도 나는 그와 만날 것이다. 나는 나대로 살겠다. 나에게 결혼해라, 유학 가라 이래라저래라 내 삶에 끼어들어 간섭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나대로 살겠다.'는 내용의 장문의 편지였다. 


고향 제주에서 엄마는 점쟁이를 찾아갔다. 막내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엄마의 노력은 마치 과거의 당신찍시 아들을 낳기 위한 고군분투처럼 눈물겨웠다. 막내딸을 시집보내야만 이승에서의 당신 책무가 끝나는 것처럼 딸을 시집보내기 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훗날 언니에게서 전해 들으니 점쟁이가 그 해 안에 딸을 시집보내지 않으면 영영 결혼하지 못하고 혼자 살게 될 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전화를 걸어 그의 생년월일을 물었다. 궁합이라도 보겠단다. 이후에 다시 전화를 걸어 엄마는 말했다. "맞는 것은 궁합밖에 없더라.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을 거면 그 사람이라도 데리고 와보라"

그렇게 하여, 해를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엄마의 일념과 추진으로, 1999년 11월 28일 늦은 가을날에 그와 나는 가족이라는 가부장제도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장에서 나는 오빠의 손을 잡고 입장했고, 오빠에게서 나를 인도받은 그는 나의 남편이 되었다. 나의 손을 그의 손에 건네주고 나서, 신부의 부모 자리에 앉아 돌아가신 아빠 역할을 했었던 오빠는 소리 없이 울었다. 소리 없는 통곡으로 눈에선 눈물이 소낙비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결혼식 사진 속의 오빠는 눈이 퉁퉁 붓고 눈가가 빨개져 있다. 오빠에게는 눈물의 결혼식이었다. 


사랑의 종착역, 눈물의 결혼식은 또 다른 가족으로 가는 출발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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