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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가이드 Jul 26. 2023

제주를 대표하는 이미지 돌하르방 이야기

제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돌하르방. 큰 눈에 커다란 주먹코, 삐뚤게 쓴 벙거지가 해학적이게 보이기도, 근엄해 보이기도 한다. 돌하르방은 화산섬 제주에 널려 있는 현무암을 깎아서 만든 석상으로 제주에 존재했던 세 개의 읍성(제주읍성, 대정읍성, 정의읍성) 각 문 앞에 세워 읍성을 보호하는 수문장 역할과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돌하르방의 시작에 대한 가장 명확한 기록은 1754년(영조 30) ‘목사 김몽규가 성문 밖에 옹중석을 세웠다.’라고 전해지는 기록이다. 옹중석은 돌하르방을 부르던 옛 이름이었다. 그 이전 기록에도 석상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그 석상이 지금의 돌하르방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돌하르방은 처음 총 48기가 세워졌는데 제주읍성의 3개의 성문에 각 8기씩 총 24기, 대정읍성 3개의 성문에 각 4기씩 총 12기, 정의읍성 3개의 성문에 각 4개씩 총 12기를 세웠다고 한다.


옹중석이라는 이름을 돌하르방으로 바꿔 부르게 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세워진 이 석상은 1971년에 제주도 민속자료 2호로 지정하게 되는데 그때야 비로소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조선시대에는 옹중석, 벅수머리, 우석목, 무석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다 민속자료로 지정할 때 기록으로 전해지던 이름이 아닌 그 당시 아이들이 이 석상을 부르던 ‘돌하르방’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관에 의해 만들어졌던 석상에 민이 부르던 이름을 붙임으로써 명실상부 제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가 됐다.


제주에서는 수없이 많은 돌하르방을 볼 수 있지만 민속자료로 지정된 돌하르방은 특별히 45기의 돌하르방이 지정됐다. 1754년에 성문 앞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48기의 돌하르방 중 1960년대 국립민속박물관(서울)으로 옮겨진 2기,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며 사라진 1기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45기의 돌하르방이 지정된 것이다. 지금은 원래의 위치가 아닌 제주도 각 처에 옮겨져 세워져 있다. 그나마 정의읍성에 있던 돌하르방만이 예전의 그 자리에서 지키고 있다.





돌하르방의 모습에 대한 연원은 현재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격렬한 논쟁은 김병모(현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가 조선일보 1990년 10월 6일 자에서 발리 석상을 근거로 남방 유래설을 주장하자, 최기호(전 교수)가 대표 집필한 몽골 비사 연구회에서 조선일보 1990년 12월 2일 자로 이에 대한 반론으로 몽골의 석인상인 훈촐로에서 유래됐다는 북방 유래설을 제기하며 시작되었다. 뒤이어 제주 향토사가 홍순만이 조선일보 1990년 12월 20일 자에서 돌하르방의 외지(外地) 유래론에 반대한다며 제주 자생설을 역설하기도 했지만, 남방기원설, 북방기원설, 제주 자생설 모두 명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육지의 돌장승과 형태적 유사성과 차이로, 육지에서 전래하면서 제주만의 조형 특성이 가미된 조형물이라는 연원이 가장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재밌게도 3 읍성의 돌하르방 모습은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인다.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돌하르방의 모습은 제주목 제주읍성 앞에 세워진 돌하르방이다. 제주읍성 돌하르방은 크기가 157~238cm로 3 읍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웅장할 뿐 아니라,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여 성문지기 수문장으로서의 당찬 위상을 한껏 뽐내고 있다.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의 돌하르방은 108~177cm로 제주읍성의 돌하르방에 비해 크기가 작고, 얼굴과 몸의 표현도 제주읍성의 돌하르방보다 훨씬 단순하게 표현됐다. 늠름한 수문장의 모습이라기보단 귀여운 조각품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지역마다 돌하르방의 모습이 달라진 이유는 첫째로 조선시대 3 읍성 간 거리가 멀어 정확한 돌하르방의 모습을 공유하기가 어려웠던 점을 들 수 있다. 처음 돌하르방 제작을 지시한 김몽규 목사가 석상의 모습을 묘사하며 제작을 지시했지만,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의 석공에게 석상의 제작 동기나 목적, 형태 등과 관련된 정보가 정확히 전달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제주읍성에서 집무를 보는 목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정의현성, 대정현성의 돌하르방까지 점검하기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돌하르방을 제작한 돌의 성질이 달라 표현의 한계가 지역마다 다르다는 점이다. 돌하르방은 성문 앞에 세워졌기 때문에 석상을 제작하는 큰 돌을 성문 근처에서 찾아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의 성문 앞에서 찾은 현무암은 성질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고, 3 읍성 중 표면 기공이 큰 다공질의 현무암이 분포했던 지역은 얼굴 부위나 손가락 등의 세부 표현이 몹시 거칠게 조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3 읍성의 돌하르방을 보면 돌의 형태가 조금씩 다른 것을 찾을 수 있고, 각 성문을 쌓았던 현무암과 성질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돌의 성질이 다르게 되면서 이렇게 다양한 모습을 가진 돌하르방이 있지만 현재 돌하르방을 이미지화한 복각품은 제주읍성 돌하르방의 모습으로만 만들어지고 있어 아쉬운 감이 있다.





한때 돌하르방 코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지금 유명 관광지 앞에 있는 돌하르방은 코가 반질반질하기까지 한다. 1980년대 신혼여행으로 주목받던 제주에서 가장 핫한 아이템이 돌하르방이었다. 요즘은 카카오의 캐릭터 라이언이 돌하르방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유명 커피 브랜드 프릳츠의 캐릭터 물개가 돌하르방의 모습을 하기도 한다. 여전히 제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상징되고 있다. 어떤 이미지든 돌하르방을 보고, 간직하는 많은 사람에게 액운을 막아주고 수호신 역할을 했던 돌하르방의 의미가 그대로 전달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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