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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isopher Apr 09. 2021

어느 시인의 실존적 죽음

영화 '강변 호텔'이 생각나서




제법 잘 나가는 시인이 있었다. 시집을 몇 권 냈는지 잘 모르겠지만 대중적으로 꽤 알려진 시인이다. 아내 와는 일찍 헤어진 덕분에 남겨진 두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한 아버지로서 시인, 그는 지금 북한강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지내고 있다.

한겨울 호텔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담배를 물고 상념 가득 차 보이는 시인은 창밖을 내다본다. 두 명의 젊은 여성들을 보고 있다. 이윽고 걸려 오는 전화, 아들이다. 호텔 부근에 왔다며 묵고 있는 방이 몇 호실인지 묻는다.

아들과 통화를 하며 방을 둘러본다.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양말에 흐트러진 이불과 방안,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시인은 자신이 내려간다며 로비 커피숍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아들을 만나지 못한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 아들들도 그도 커피숍에 있었지만 만나지 못한다. 마치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는 것처럼, 왜 오지 않을까. 서로 걱정은 하면서도 계속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기다리다 못한 아버지가 호텔 밖을 나선다. 호텔 밖은 그림처럼 눈이 쌓여 있다. 아까 보았던 두 여성이 거닐며 풍경에 감탄하고 있다. 그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시인,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며 연신 머리를 숙인다. 경계의 시선, 하지만 왠지 범상치 않다고 느낀 여성은 남자가 유명한 시인임을 알자, 이내 반가움을 드러낸다.

그녀들과 인사를 마치고 호텔 커피숍으로 향한 시인, 두 아들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같은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 사이 오가는 추억마저도 지푸라기 같아 보인다. 자리를 옮겨 막걸리를 마신다. 모두가 제법 취했다. 취기에 힘입어 아들들은 엄마 이야기를 했지만 시인은 더 할 말이 없다. 하고 싶은 말도 굳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때 그 여성들이 식당을 다. 아들들과 식사를 끝낸 시인 먼저 호텔에 가서 쉰다면서 아들들을 따돌린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찾아와 자작 시를 읊는다. 아름다운 여성들을 위해 지었다는 시, 감동받은 여성들은 시인에게 술을 건넨다. 연거푸 술을 들이켜는 시인, ‘감사합니다.'를 반복한다.

다음 날 아침 커피숍, 선잠에서 눈을 뜬 아들들, 집에 돌아가기 전 아버지인 시인을 만나기 위해 그가 묵고 있는 방에 들어간다. 열린 화장실 문틈, 쓰러져 있는 시인, 오열하는 아들들, 시인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다. 비통한 아들들의 울음에 잠이 깬 그 여성들, 침대 위에서 서로를 꼭 잡고 숨을 죽이며 흐느낀다.


(...) 반대로 내가 나를 고립시키기 시작하면, 소통은 점점 더 빈약해지고 공허해진다. 소통의 완전한 단절이라는 극단적인 경우에 나는 나 자신이기를 중단한다. 왜냐하면 나는 점점이 공허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1)


-대한민국 파출소 경관-


1) 칼 야스퍼스, 「철학Ⅱ」 ,신옥희, 홍경자, 박은미 옮김, 아카넷, 2019,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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