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평온한 일상이 씻을 수 없는 죄악이 되는 공간.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아우슈비츠는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만큼 잔인한 곳으로 그려집니다. 러닝타임 내내 숨통을 옥죄는 사운드와 감옥 같이 느껴지는 사각 프레임은 장벽 너머 보이지 않는 공간에 깔려 있는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만 같이 느껴지죠. 그만큼 모든 장면이 강렬하게 다가오지만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메타포들이 있습니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 꽃은 희비의 경계로 작용합니다. 아우슈비츠 장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참극을 가리기 위한 도구이면서 회스 가족의 안락한 일상을 상징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특히 초반부에 아내 헤트비히가 막내에게 꽃을 설명해주는 장면에 달리아라는 꽃이 나오는데, 달리아의 꽃말 역시 화려함과 불안정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회스 가족의 화려한 일상과 늘 공포에 시달려야 하는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상반된 현실을 보여주듯 말입니다.
더불어 달리아는 꽃의 색깔에 따라 꽃말이 바뀌는 품종으로 유명한데, 가령 흰색은 순수와 성실, 빨간색은 힘과 열정, 그리고 검은색은 배신과 슬픔을 의미합니다. 공교롭게도 영화에선 딱 세 번 화면이 페이드 아웃되며 단색으로 채워지는 구간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순서대로 흰색, 빨간색, 그리고 검은색이죠. 이는 마치 유대인들의 평온했던 일상이 나치의 억압이란 외부적 힘에 의해 서서히 비극의 수렁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암시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강은 많은 문화권에서 중요한 메타포로 쓰이곤 했습니다. 인류의 4대 문명 앞에 모두 강의 이름이 붙듯 풍요와 번영의 상징이기도 하고, 신화 속에선 삶과 죽음의 경계로 그려지기도 하죠.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강은 이런 의미들을 군데군데 비춰주고 있습니다.
회스 가족에게 강은 중요한 공간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휴식을 취하거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이들이 물놀이를 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은 수용소의 시커먼 연기와 대비되며 풍요로운 지배층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소각 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 강은 영화 속에서 더 이상 여유로운 공간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루돌프가 낚시를 하다가 발견하는 사람의 유골, 그리고 강에 떠밀려 내려오는 잿더미 등으로 인해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하죠.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가 아이들을 나룻배에 태운 채 범람하는 강을 거슬러 가는 장면은 상당히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위협적으로 범람하는 강은 마치 그리스 신화 속 저승의 스틱스 강처럼 다가오고, 루돌프는 아이들이 죽음의 고비에 휩쓸리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부성애를 발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죠. 루돌프가 수용소의 소각 작전을 구상한 인물이라는 걸 감안하면, 가족의 삶과 유대인의 죽음을 동시에 책임지는 이중적인 인물의 면모가 드러난 대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 유독 동화적인 장면으로 그려지는 대목이 있는데, 바로 한 소녀가 수용소 인근에 사과를 놓고 갈 때마다 <헨젤과 그레텔>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깔리는 장면입니다. 놀랍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화 속 이야기와 소녀의 서사가 절묘하게 맞물린다는 걸 알 수 있죠.
우선 두 이야기 모두 음식을 땅에 던져 놓는 목적이 있습니다. 동화에선 헨젤이 숲속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빵 부스러기를 떨어뜨리고, 영화에선 소녀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사과를 떨어뜨리죠. 하지만 이 행동이 역효과를 불러온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동화에선 새들이 부스러기를 다 쪼아먹는 바람에 헨젤과 그레텔은 졸지에 길을 잃어버리고, 영화에선 사과로 인해 생긴 분쟁 때문에 수용자가 간수에게 죽게 되는 듯한 장면이 등장하죠.
일반적으로 동화라는 건 권선징악, 순수한 선이 모든 걸 이겨낸다는 걸 전제로 하는데 영화는 이 전제를 과감하게 전복시킵니다. 밤마다 순수하게 선의로 남을 돕고자 했던 소녀의 마음이 수용자들을 더 곤경에 처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결국 영화는 소녀의 이야기와 <헨젤과 그레텔>을 엮어 아우슈비츠는 동화 같은 순수한 마음이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더불어 이 동화가 아우슈비츠 학살의 주인공인 루돌프의 목소리로 전달된다는 게 소름 끼치는 대목이기도 하죠.
영화에서 유의미한 변곡점을 하나만 꼽자면 그건 아마도 루돌프의 전출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화로운 줄만 알았던 회스 가족의 미세한 균열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기 때문이죠.
아내 헤트비히는 남편의 전출 소식을 듣자마자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아이들과 자신은 이곳에 남겠다는 선언을 하며 히틀러에게 부탁을 해보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하죠. 그리고 고민하던 루돌프는 이내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춰지는 두 사람의 모습은 다정하다기보단 다소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죠. 급작스러운 이별에 가슴 아파하지도 않고 서로를 위하고 아끼는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루돌프의 머리엔 오직 일밖에 없고, 헤트비히의 머리엔 오직 안락한 일상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처럼 영화는 두 사람의 엉성한 유대감을 중반부 이후부터 위험한 시험대에 올립니다. 전출을 앞두고 루돌프는 낯선 여성과 은밀한 만남을 갖는 것처럼 보이고, 헤트비히는 남편이 떠나고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평온한 일상을 보내죠. 심지어 루돌프의 전출이 취소된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변할 기미가 없습니다. 루돌프가 자신의 작전에 당신과 나의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헤트비히는 늦은 밤에 전화할 일은 아니지 않냐며 타박을 주기도 하죠.
가족이란 울타리를 만들었지만 정작 바라보는 목표는 정반대인 루돌프와 헤트비히. 결국 영화에서 전출은 정한 아빠와 엄마, 혹은 남편과 아내라는 가면을 벗겨내고 한 인간에게 숨겨진 야망과 본능을 조명하며 행복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대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더불어 개인의 욕심만 불거지는 상황을 통해 장벽 맞은 편 생사를 다투고 있는 수용자들의 삶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죠.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이 말은 어김없이 제 힘을 발휘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비명과 절규를 배경 삼아 회스 부부의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장면들은 남다른 섬뜩함을 선사하죠.
가령 형제끼리 놀다가 형이 동생을 실내 화원에 가두는 장면, 북을 치고 군인 모형을 정렬하며 노는 장면, 나치 완장을 차고 거수 경례를 웃으며 하는 장면 등은 아이들이 일상에서 보고 들으며 체득한 경험의 산물입니다. 특히 동생을 화원에 가둔 뒤 해맑게 웃는 아이의 얼굴은 건너편 수용소의 참극과 대비되어 순수함을 완벽하게 지워버리죠.
덩달아 수용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장면에서 아이가 주사위를 굴리며 노는 장면은 상당히 의미심장합니다. 아이는 장난을 치며 무심결에 주사위를 굴리지만, 그 주사위로 인해 무작위로 나오는 결과처럼 수용소 안의 누군가는 오늘도 우연한 죽음을 맞이할 테니 말이죠. 영화가 아이의 놀이를 통해 수용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저울질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영화는 어른들이 구축한 세상 속에서 피어난 순수함도 비극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엔딩입니다. 유대인 대학살 계획을 세운 루돌프와 박물관으로 변한 미래의 아우슈비츠가 교차되는 대목은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격언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하죠.
계단을 내려가던 루돌프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는 모습은 양가적인 감정을 이끌어냅니다. 유대인들을 죽일 궁리만 하느 자신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로 보이기도 하고, 끝내 게워내지 못할 정도로 몸과 정신에 박혀버린 악성의 흔적처럼 보이기도 하죠.
눈여겨볼 대목은 루돌프가 미래의 아우슈비츠를 마주한 뒤 다시 계단을 내려갈 땐 더 이상 구역질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장면은 마치 루돌프 스스로 깊은 죄의식보단 자신의 계획이 성공할 거란 확신과 정당성을 확인하는 것처럼 느껴지죠. 뒤이어 빛이 존재하지 않는 어둠으로 사라지며 암전되는 모습은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해버리는 루돌프의 인간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다가옵니다.
끔찍한 죄악에 저항하는 인간의 마지막 양심. 그 죄악의 결과를 알고도 남은 양심마저 집어삼키는 악마적 본능. 그리고 이 모든 걸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 어쩌면 영화 마지막의 정적을 깨뜨리는 구역질은 우리 모두가 시류를 거슬러서라도 쟁취해야 하는 일말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잘못된 역사 앞에서 일말의 죄의식을 갖지 않았던 이들. 그들의 삶을 건조하게 조명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그 어떤 홀로코스트 영화보다도 잔인하고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오직 차가운 공기로 모든 장면을 메운 영화 앞에서 우리는 위선과 무관심으로 얼룩진 인간의 잔인함을 괴롭게 목도해야만 합니다. 어쩌면 귀를 찌르는 엔딩의 사운드는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죄의식의 최솟값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