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인칭 시점 Feb 02. 2023

영원하길 염원하며, <바빌론>

무너져도 영원할 시네마틱 글로리에 대한 광적인 헌사


광기에 조련된 밤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뉴욕 웨스트에그의 밤을 수놓았던 개츠비의 파티를 떠올려보자. 낯선 살들을 섞으며 강처럼 흐르는 술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곳은 결코 정적을 허락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옆 사람을 고함과 광란의 춤사위로 채찍질한다. 체력의 한계가 허락하는 순간까지 쾌락의 절정을 향해 몰아치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이 찾아오면 전날 밤의 광기는 참혹할 만큼 공허한 환희가 빚어낸 환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도 그들은 다시 개츠비의 저택으로 모인다. 광란에 젖은 밤보다 공허하고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해.


<바빌론>의 오프닝에 등장하는 '서부판 개츠비의 파티'도 마찬가지다. 아, 개츠비의 이름을 빌리는 게 실례일 수도 있겠다. <바빌론>의 오프닝 파티는 섬뜩할 만큼 난잡하고 기괴하니 말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오물을 머금은 채 난교를 벌이기도 하고 사지를 털어내는 격동적인 춤으로 코끼리도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광기를 발산하기도 한다.


영화는 1초의 침묵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파티장 사방을 휘저으며 격식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쾌락의 단면을 샅샅이 훑는다. 마치 내밀한 속내를 들키는 것 같은 불쾌함에 사로잡히기도 전에 이곳에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온다. 바닥에 널브러진 광기의 잔해 사이로 허적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폐하다. 그래도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일상은 반드시 어젯밤보다 괴로울 테니 말이다.



데이미언 셔젤은 대조와 명암이라는 세밀한 칼날로 1920년대 미국 영화 산업의 단면을 벼려낸다. 낮과 밤, 사라지는 것과 영원한 것, 그리고 성공한 자와 성공하고 싶은 자의 이야기로 3시간이라는 러닝타임은 빈틈없이 메워진다. 각자의 위치에서 정의한 욕망을 거침없는 대사로 풀어내는 캐릭터들의 입체감도 압권이다. 가식 한 톨 찾아보기 힘들 만큼 명확하고 강렬한 욕심은 오프닝을 집어삼킨 광란의 파티에 대한 명분이 되어준다. 그렇게 정처없이 밤을 휘젓던 꿈은 해가 뜨면 정확한 목표점을 겨냥한다. 바로 할리우드라는 꿈을 빚어내는 촬영 현장이다.


그늘조차 없는 벌판에서 영화인들의 열정은 작열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린다. 문제는 열정만큼 선명한 그림자가 삽시간에 가려진다는 것이다. 욕설과 고함에 쫓기며 바삐 움직이는 발걸음 사이로 어두운 비극은 찰나의 배경처럼 지나간다. 실감 나는 소품에 찔려 죽은 엑스트라부터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 총질 한 방에 제압되는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일상은 주연들의 서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적당한 선에서 해치워진다.


카메라의 앵글이 가리키지 않는 곳에서 비일비재한 비극을 내려다보는 영화인들의 표정은 그저 덤덤하다. 그렇게 자본과 시간에 쫓기는 예술 앞에서 철저하게 도구화된 삶들을 대하는 20년대 할리우드의 방식은 서늘할 만큼 비정하다. 셔젤이 시간 단위로 플롯을 쪼개가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아내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만큼 그들의 비극이 찰나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핏빛 터전에 자신의 꿈을 거침없이 심는 넬리 라로이라는 캐릭터는 그 누구보다도 강렬하다. 영화의 초반부는 '본 투 비 스타'를 목 놓아 외치는 그녀의 열정에 헌정되는 서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든 주목을 받으며 자신의 재능을 적재적소에 각인시키는 영민함은 당대 할리우드 성공 공식에 완벽히 부합하는 전제조건이다.


중요한 건 성공의 속도에 비례해 찾아오는 위기다. 넬리의 대사는 언제나 '배우'가 아닌 '스타'로 귀결된다. 배우가 되기 위한 노력보다도 스타에게 필요한 재능에 기대온 것이다. 그렇게 스타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성 영화가 도래한 20년대 후반, 결국 그녀는 급변하는 시대가 배우에게 요구하는 바를 충족하지 못한다. 언제나 목소리가 약점이었던 그녀에게 유성 영화의 등장은 노출보다도 끔찍한 치부를 발가벗긴다. 준비되지 않은 성공 위에 쌓아올린 그녀의 탑은 사정없이 흔들리며 할리우드의 냉혹한 영광이 무엇인지 처절하게 보여준다.



반면 잭 콘래드는 넬리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인물이다. 전대미문의 성공을 이룬 스타이자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있으며 주변의 폄하를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설렁설렁 던지는 실없는 농담과 지독한 여성 편력에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가 영화 내내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잭은 할리우드에 시종일관 품격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품격이 고결하고 소수를 위한 무언가가 아니라 영화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영화의 발전에 전력을 투구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는 걸 역설한다. 주변의 질시나 비판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꿈에 알맹이를 가득 채워넣으며 성공의 무게를 견디는 그에게서 할리우드의 초석을 닦은 스타들의 헌신이 연상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잭에게 무궁한 영광과 단단한 마음을 허락하진 않는다. 가십 기자 엘리노어와의 대담에서 잭은 거스를 수 없는 비참함을 묵묵하게 삼킨다. 시대의 변화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그녀의 말 앞에서 그는 서서히 변방으로 밀려나는 자신의 입지를 수긍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변명과 불만을 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잭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그가 '스타'가 아닌 영화 산업에 종사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영원히 빛나진 않더라도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만족하고 자신을 좀 더 낮추며 다음 행보를 찾아가는 잭의 선택은 셔젤이 지난 세대에게 바치는 존경의 헌사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이런 잭을 극도로 절제된 연기를 통해 체현해낸 브래드 피트의 연기는 캐릭터의 위상에 걸맞은 빛을 발한다.



화려한 조명 뒤에서 리드미컬한 재즈 리듬을 빚어내는 트럼페티스트 시드니 팔머도 눈여겨볼 캐릭터다. 미국의 1920년대를 '재즈 시대'라 일컫는 만큼 영화 산업에서도 재즈의 파급력은 막강했다.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미국 남부에서조차 흑인 뮤지션이 주류였던 재즈에 대한 수요는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시드니를 위시한 흑인 뮤지션들은 결코 주연이 되진 못했다. 적어도 할리우드에서는 백인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만들 음악을 조율하는 역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카메라의 앵글이 잘못된 거 같다고 말하는 시드니의 모습이 자신들의 재능과 노고가 주목받지 못하게 만드는 할리우드의 편협한 시선에 대한 일갈처럼 다가오는 이유다.


시드니 본인이 할리우드의 주연이 된 순간부터 찾아오는 역설은 기가 막히도록 잔인하다. 자신을 돋보이도록 만드는 조명 때문에 백인처럼 보인다며 흑가루를 바르라며 건네받는 모습에서 클로즈업되는 시드니의 표정은 애처로울 정도로 절망적이다. '흑인다움'을 강요받는 흑인이라는 영화 속 설정은 성공과 정체성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야만 하는 당대 흑인 사회의 비극적인 애환을 장면 곳곳에 펴바른다. 시드니 역을 연기한 조반 아데포의 표정이 매순간 무겁게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이들 사이를 오가며 혈혈단신으로 할리우드 드림을 외치는 매니도 빼놓을 수 없는 핵심이다. 영화 내내 내레이터의 역할을 수행하며 욕망에 경도된 영화인들의 속내를 파헤치는 그는 3시간에 걸쳐 한 순간도 빠뜨리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는 캐릭터다. 어수룩한 청년이 무엇이든 하겠다는 포부로 영화 현장에 발을 들이고 날카로운 직관으로 꿈의 기반을 다져나가는 일련의 과정은 디에고 칼바의 절절한 눈빛에 설득력을 한껏 담아 추진력을 얻는다. 모국어 대신 영어를 쓰고 마누엘 대신 매니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그는 어떻게든 할리우드의 주류로 진입하려는 이방인의 최선을 구현해내며 당대 할리우드가 숨기고 싶어했던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부터 매니가 이끌어가는 서사의 장력은 그야말로 끊어질 듯 강렬하다. 일생을 거는 선택도 마다하지 않고 이성과 본능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그의 모습은 완숙의 단계 직전에서 꺾일 듯 말 듯 위태롭다. 이토록 요동치는 파고 위에서 불안과 분노, 그리고 애절함까지 모두 섭렵하는 디에고 칼바의 다채로운 표정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리고 아직 할리우드에선 낯선 얼굴에 믿고 볼 만하다는 확신을 심어준 셔젤의 디렉팅에 박수를 보낼 만한 대목이기도 하다.



<바빌론>은 결코 무너지는 영광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거칠면서도 뜨거운 열정을 쏟은 한 시대의 선구자들에 대한 헌사이자 영원히 기억될 순간을 지금 세대에 환기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다. 3시간이라는 지독한 러닝타임은 영화를 사랑하는 진심과 좋은 영화를 위한 노력이 전달되는 과정엔 생략과 압축이라는 결례를 범해선 안 된다는 셔젤의 단호한 신념이 낳은 결과물이다. 산란하는 빛 사이로 각인되는 '영화적 영광'은 시대를 막론하고 영원할 것이라는 엘리노어의 말처럼 <바빌론>은 100년 전 누군가 빚어놓은 '영화 같은 인생'에 영광의 숨결을 불어넣는 작품이다. 영원하길 염원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적으로 뽑아본 21세기 영화 TOP 1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