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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인칭 시점 Nov 09. 2023

그들의 노란문은 아직도 찬란하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

어린 시절이 끝나면 그때부터 시가 시작되는 거예요.
-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


시와 영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무수히 많겠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숱한 세월의 감각을 모아 곤두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하나의 행에, 다른 누군가는 롱 쇼트로 찍힌 10초짜리 장면에 지난 20여 년의 세월을 담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와 영화는 함축의 예술이다. 이를 구현하는 자들은 삶의 능선마다 자신만의 표식을 남긴다. 어디서, 어떻게 예술이란 걸 시작했는지 스스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모든 예술엔 태동기라는 게 있다. 엉성하기 짝이 없지만 매일 전대미문의 발자국을 하나씩 찍어나가는 태동기 말이다. 90년대 한국에선 영화가 그랬다. 이전까지의 영화가 '즐기고 마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90년대에 들어서자 영화는 공부의 대상이자 시대의 거울이며 대중문화의 산실로 거듭났다. 군부를 향한 청년들의 저항의식이 무기력감으로 변할 즈음, 영화가 등장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자며 그들의 어깨를 다독인 것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는 그 시절 영화를 향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시네필들의 탄생과 좌충우돌을 그려낸다.



노란문은 서교동에 자리했던 영화 연구소였다. 노랗게 칠한 대문을 지나면 사방이 노란색으로 칠해진 영화 아카이브가 모습을 드러낸다. 히타치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담긴 8mm 필름 다발과 각종 외화를 녹화해둔 VHS,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전문 서적들이 벽을 가득 메운 채로 말이다. 멤버들은 이곳에 모여 다양한 작품을 보고 비평하며 영화에 대한 견문을 넓히곤 했다. 더 나아가 영화 한 장면을 쇼트별로 쪼개 카메라 구도와 오브제 배치 등도 면밀히 분석했다고 하니 '연구소'라는 말이 퍽 잘 어울린다.


노란문은 영화를 구상하고 구현해내는 공간이기도 했다. 당시 이론에만 갇힌 제도권 영화 교육에 신물이 났던 최종태 감독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였다. 노란문에선 멤버들이 각자 카메라를 쥐고 피사체를 정한 뒤 생동감 있는 카메라 워킹으로 담아내는 게 중요했다. 그에 따르는 의도나 결과가 하찮아도 상관이 없었다. 해본다는 자체가 중요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도 멤버들에게 <영화사 연구> 탐독이나 기호학 개념 학습을 장려하는 등 영화적 기본기를 익히는 과정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정리하자면 노란문은 영화 동호회이자 영화 연구소이며 영화 실습소였던 셈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거장으로 거듭난 봉준호 감독도 노란문의 핵심 멤버였다. 그는 노란문에 들어가 최종태 감독 밑에서 기본기를 익히며 영화인의 꿈을 키웠다고 회고한다. 그런 열정이 전염이라도 되듯 연세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영화를 좇아 노란문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것이다. 전공을 막론하고 영화라는 교집합 하나로 모인 노란문 멤버들은 그렇게 90년대 시네필 전성시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다큐멘터리 속 노란문 멤버들의 회고는 곧 90년대 한국 현대사의 회고이기도 하다. 군부 시절의 상징이었던 문화 검열이 막을 내리자 자유분방한 창작을 앞세운 예술이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영화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부 주도 혹은 산업 주도적인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벗어나 개인 집단이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상영할 수 있는 포석이 깔렸다. 요즘으로 치면 독립 영화의 시대가 열린 셈이다.



당시 개봉한 단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꽤나 재밌다. 가령 1991년작 <호모 비디오쿠스>의 주인공은 마틴 스코세이지의 1976년작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트래비스를 오마주한 복장을 하고 등장한다. 혼란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의 분노를 얄싹한 모히칸 헤어에 응축해놓은 채 가게 속 텔레비전을 응시하는 모습은 분명 당대 한국에 여전히 불만이 남아있는 청년의식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노란문처럼 서울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화 연구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영화를 보며 공부했을까.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 프랑수와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그리고 마틴 스코세이지의 <분노의 주먹>까지 내로라하는 명작들이 90년대 시네필들의 교본이었다. 하지만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선 한 번 보고 마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몰래 영화를 복제해 수도 없이 돌려보며 프레임 단위로 분석하고 영화 속 콘텍스트마저 파고들었다. 그것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간절하고 본능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노란문이 대단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현실에 자신들의 열정과 노력을 알릴 기회를 만들고 끝내 이뤄냈다는 것이다. 선봉장은 단연 봉준호 감독이었다. 세기의 명작으로 평가를 받는 <대부>의 한 시퀀스를 뜯어보며 공부했던 과거를 한 시상식에서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에게 존경을 담아 직접 전했다는 일화는 비현실적으로 뭉클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취미가 아닌 업으로 생각하며 몰두했다는 봉준호의 열정이 낳은 쾌거라고 해야 맞을까. 아니면 그런 봉준호가 자라날 수 있도록 자양분이 되어준 노란문의 쾌거일까. 뭐가 됐든 그들의 존재는 아주 유의미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노란문 멤버 모두에게 평생을 걸 만한 무언가가 되진 못했다. 누군가는 영화와 전혀 무관한 일을 업으로 삼아 살길을 찾아갔고, 몇몇은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아직도 영화 산업에 종사하며 오랜 꿈을 이어오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영화가 소중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기꺼이 청춘을 걸 만한 무언가였고 언제든 곱씹어도 따뜻함만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었으니 말이다.


노란문 창간호 인삿말엔 이런 말이 나온다.


영화를 공부한다는 것은 워낙 개인적인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서로의 정보와 자료를 주고 받으며 두세명씩 모이다 보니 어느덧 30명이 넘게 되었고,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영화 연구소라는 이름까지 붙여봤습니다.


노란문 멤버들에게 영화는 함께 공부해야 더 깊은 풍미를 느낄 수 있는 무언가였다. 별다른 성과가 없더라도 함께 모여 생각을 나누고 좋은 영화의 특징을 하나씩 새겨나가는 일. 어쩌면 그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이 지금의 한국 영화 산업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그들이 손수 칠했던 노란문이 여전히 선명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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