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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lee May 22. 2021

나를 구하는 텍스트

봄 11호


이번 주의 생각


어제 카피라이팅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언덕을 내려가는데 얼마 전, 선미가 선물해 준 시집의 ‘비’라는 시를 적어뒀던 게 생각나 메모장을 열었다.


비는 형태에 따라 거동이 다르고, 또 저마다 그에 알맞은 소리를 낸다. 전체가 하나의 복잡다단한 기계장치라도 되는 양 밀도 있게, 증기가 응결되며 생기는 무게를 동력으로 삼는 태엽시계와도 같이, 무모하면서도 정확한 삶을 살아간다. - <사물의 편> 중에서


무모하며 정확한 삶이라. 문득 인간도 저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한강진역으로 향했다. 평소의 나였다면 ‘정확한 삶은 재미없지!’라고 했을 것 같지만 적어도 어제는 아니었다. 가끔 내가 꾸는 꿈이 망상에 불과한 것 같다는 나약한 생각에 빠질 때가 있다. 최선을 다했는데 (외적)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 또는 그게 과연 최선이었는지 스스로 의심이 들 때. 전자의 경우엔 결과가 내 노력에만 달려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비교적 가볍게 넘길 수 있지만 나의 최선에 의심이 들 때는 스스로가 더 작고 초라하게 느껴져 자기혐오에 빠지기 쉬웠다. 과거의 내가 '지나친 낙관주의자'처럼 느껴져 씩씩하게 다시 털고 일어서려는 스스로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고 그간의 노력을 무자비하게 말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문제는 지금까지 ‘그게 내 최선이었다’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고 늘 나의 최선을 의심한다는 것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보다 조금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선'이라는 단어가 나를 한계 짓는 말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게 내 최선이었지만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윤과 통화하다가 내가 최선의 두 가지 뜻을 멋대로 섞어 사용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최선의 첫 번째 뜻은 '가장 좋고 훌륭함'. 두 번째 뜻은 '온 정성과 힘'. 생각해보면 가장 좋다고 모든 정성을 쏟은 것이 아니고 온 힘을 다 했다고 해서 가장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이를 구분해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거에 내가 했던 것들이 가장 좋고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 ‘그때 온 힘을 다 했어?’라고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랬다고 할 만한 일들이 제법 생각났다. 낮에 헤더가 카페에서 들려준 <지적인 낙관주의자>의 저자 인터뷰 내용을 다시 훑어보고 김사과 작가의 <풀이 눕는다>를 읽기 시작했다.

*

어쩌면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 기분을 아는지 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난 고개를 들었다. 몰라보게 깨끗해진 하늘을 푸른 어둠이 빠른 속도로 메워가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니 뭔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비가 물러간 젖은 거리는 고요했고 좋은 냄새가 났다. 물기를 머금어 축 늘어진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아름다웠다. 자동차들이 시원하게 물을 가르며 달려 나가는 것도. 세상은 아름답다. - <풀이 눕는다> 중에서


오늘 아침에는 눈을 뜨니 민주 언니가 새벽에 보내 둔 메일이 도착해있었다. 요즘의 생각과 변화, 애정 어린 시선과 사랑을 담은 언니의 메일은 책 <달러구트 꿈 백화점>의 한 문장으로 끝난다.


“목적지요? 사람은 최종 목적지만 보고 달리는 자율 주행 자동차 따위가 아니잖아요. 직접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고 가끔 브레이크를 걸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야 제 맛이죠. 유명 작가가 되는 게 전부가 아닌걸요. 전 시나리오를 쓰면서 사는 게 좋아요. 그러다가 해안가에 도착하든 사막에 도착하든 그건 그때 가서 납득하겠죠.” - <달러구트 꿈 백화점> 중에서


가끔 혼자 마음속 파란 동굴에 들어가고 싶은 날이 있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걸 알면서도 지독히 혼자가 되고 싶어 진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내가 하는 행동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행해야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적절히 가질 것, 가까운 사람 들과 건강한 대화를 나눌 것, 좋은 곳에 방점을 찍는 텍스트를 접할 것. 읽고 있는 책과 인터뷰, 보는 영화, 듣고 있는 노래 같은 것들이 나를 충분히 구하고도 남는다는 걸 이젠 알고 있다.



이번 주의 콘텐츠


Interview

옌스 바이드너 박사 (인터뷰어 : 김지수)

자기 방어적 비관론이 유익할 때도 있지 않나.

기대가 적을수록 실망도 적을 것이란 논리인데, 그런 태도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작아지게 만든다. 실제로 그렇지 않던가? 불행을 피하는 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자진해 심리적 비용을 치르며 비관주의를 선택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어둡게 해석할까.

재앙에 무방비 상태였던 원시 시대의 공포 감정이 남아 있어서다. 공포가 희망보다 생존에 유리했으니까. ‘잘 지내냐?’고 물으면 ‘죽지 못해 산다’고 엄살을 떤다. 하지만 사람들의 사회생활은 대부분 그들이 표현하는 것보다 낙관적으로 굴러간다. 개인사를 따져보면 가족과 친구들은 버팀목이 되어주고, 수입도 증가하고 있다. 낙관보다 비관을 택하는 건 일종의 자기 방어적 습관이다.


Book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상시 접속 중인 사람은 결코 온전하게, 충분히 혼자일 수 없기에 그렇다. 또한 결코 혼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창밖을 바라보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세계를 상상하기가 어렵'기에 그렇다. 그런 사람은 '가장 가까운 주변에 있는 진짜 사람과 소통하기 어렵'기에 그렇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다. 선택은 자유의 신호이며, 자유롭기 위해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안정과 자유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견디지 못하고 , 서로를 욕망하는 동시에 원망한다. 그리고 이렇게 대립하는 두 감정의 비율은 평형과 화해를 이루는 완벽한 중용으로부터 자주 벗어나 매번 달라진다.


Book

프랑수아 누델만 <건반 위의 철학자>

자아는 내면의 불협화음과 리듬을 감추는 하나의 구조물이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 끊임없이 타협하며 산다..
꿈은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하면 어느새 저만큼 달아나 있다. 꿈은 꿈을 재배열한다.
우리는 하나의 주체로서 내면을 흐르는 복수의 리듬에 따라 사랑하고 인식하고 사유하며 자아를 구성한다.
음악의 비언어적인 부분을 굳이 철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언어로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을 제대로 즐기는 것이었고, 음악의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는 과정에 깃드는 순수한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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