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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se lee May 16. 2021

행복은 눈썹

봄 10호



이번 주의 생각


네가 4시에 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는 어린 왕자의 말처럼 어떤 일들은 시작하기도 전에 설렘을 몰고 오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이면, 저는 가만히 앉아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일들을 떠올려봐요. '과거의 추억'이 될 수도 있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녹슬지도, 바래지도 않은 이런 순간 들을 생각해요.


*

저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요. 30분 정도 일찍 카페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책을 읽다가 약속시간이 다가오면 창문을 내다봐요. 곧 문을 열고 들어와 설레는 얼굴로 두리번거리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뛰어오는 친구를 바라보는 일이 행복하거든요. 애매하게 일찍 도착했거나 친구가 조금 늦게 도착할 때는 지하철 역에 있는 서점에 갑니다. 도착한 친구와 자연스레 책 이야기를 하다가 지하철 역을 빠져나가는 기분이 근사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참 좋지만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아해요. 서로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지나가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고 대화를 시작하면 잠시 포개졌다가도 금세 제자리를 찾는 관계가 그리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또 다들 잠들어 있을 때 혼자 깨어있는 걸 좋아해요. 조용해진 새벽에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면 마치 다른 행성에 살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리고 누가 깰까 봐 조용히, 천천히 간식을 챙겨 방에 들어와 오물거리며 무언가를 쓰고 읽는 시간에는 고양이가 된 느낌이에요. 저는 비행기를 타도 불이 꺼지는 시간을 기다립니다. 모두 잠들었을 때 머리 위의 등을 켜고 잔잔하게 보내는 시간을 좋아해요. 야외에서 낮잠 자는 것도 좋아해요. 예전에 엘에이에 갔을 때 야외 벤치에서 잠든 적이 있어요. 햇살 아래에서 잠드는 기분이 색달랐고 아이들이 잔디밭에서 뛰어노는 소리,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자장가가 되어주었던 그 낮잠에 특별한 광채가 담겨있는 것 같아요. 평생 마음속에 간직할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한 장 갖게 된 거죠.


그리고 저의 어릴 적 꿈은 동화작가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놀며 이 땅에 사랑스러움을 뿌리고 다니는 듯한 글을 좋아합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글을 읽다 보면 저도 그 정도의 일에 함께 즐거워하고 감탄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듯했거든요. 가령 이런 것들이에요.


꽃은 줄곧 초록색 방 안에 숨어 아름다운 모습을 준비했다. 꽃은 세심하게 색깔을 골랐다. 천천히 옷을 입으며 한 장 한 장 꽃잎을 매만졌다.


아니, 크눌프가 옳았다.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 일요일처럼 살았다.


그러니 이 초록색 자동차

너에게 줄게 비행기 편으로.

선물이야. 내 상상에서 나온 선물


마음과 시간이 담긴 물건들을 좋아합니다. 편지를 받는 것이 행복한 만큼 제가 편지에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일, 봉투에 상대의 주소를 쓸 때의 기분도 좋아요. 이걸 받게 될 상대의 표정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되거든요. 또 자기 직전에 노트에 가감 없이 메모를 해두는 것도, 아침에 일어나 그걸 다시 읽는 기분도 참 좋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지난날을 떠올리며 또박또박 예쁘게 쓴 글씨보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서 엎드려서 쓴 글씨에 그 순간이 온전히 담겨있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좋아하는 물건에도 좋아하는 티가 나는 게 좋아요. 몰스킨이 시간이 지날수록 너덜너덜해지는 게 좋고 좋아하는 책을 이곳저곳에 챙겨 다녀서 손때 탄 게 좋아요. 형형색색의 밑줄이 그어져 있고 종이 끝이 접혀있는 모습이 어쩐지 남들과는 다른 물건을 가진 기분이 들게 해요. 주변 사람들의 그런 물건들이 멋져 보이기도 하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져요.


또 저는 너무 유명하진 않지만 근사한 것들을 찾는 걸 좋아해요. 아는 사람만 찾아올 것 같은 공간에 가고 싶고 너무 유명하지 않은 브랜드의 물건을 사고 싶어요. 저도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진을 찍는 것이 목적이 아닌 공간에서 찰칵 소리가 끊임없이 나는 건 싫어해요. 그래서 간판이 없거나 카메라 사용을 자제시키는 곳을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어떤 작가가 궁금해졌을 때에도 많이 유명하지 않은 책부터 시도해보게 되고 노래는 타이틀곡보다 수록곡을 좋아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구경하고 상상하는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지하철에 타서는 앞에 앉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통화 내용을 들으며 어떤 사람일까, 어떤 일을 할까 상상해봐요. 옆에 앉은 사람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나 읽고 있는  제목을 보며  사람이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일지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때론 미래의 저를 상상해보기도 해요. 삼각지역에서 4호선으로 갈아탈 , 코너에 작은 서점이 하나 있어요.  서점  구석에서 어딘가 아쉬운  들을 팔았는데 얼마 전부터 주인이 바뀌었는지 근사한 꽃들이 놓여있는 거예요. 지나갈 때마다 발걸음을 늦추고 꽃을 둘러보면서 얼마  꽃을 사서 지하철에 호다닥 올라  미래의 저를 상상해봐요. 웃기죠 ㅋㅋㅋ  이름은 뭘까? 색깔은? 누구에게 주게 될까? 이런 상상들이요. 전시를 보러 가서도 마찬가지예요. 좋아하는 작품 앞에 오랫동안 앉아있는  좋아합니다. 그러면  옆에서 같은 작품을 유심히 보는 사람들이 궁금해지기도 해요. 작품 구경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각기 다른 작품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그 외에도 좋아하는 건 너무 많죠. 고궁이 있는 동네, 좋아하는 식재료로 요리하는 것, 애칭으로 부르는 것, 선물 고르기, 여름 냄새, 운동 마치고 집에 오는 길, 샤워하고 뽀송한 이불에 들어가는 것처럼 찾으려고 한다면 금방 챙길 수 있는 것들이에요.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은 생각보다 내가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해 주고 어떤 일을 겪든 다시 행복해질 사람이라는 걸 알려줘요. 눈썹이 눈에 보이지 않듯, 행복도 눈에 보이지 않을 때가 있잖아요. 그럼에도 행복은 항상 우리 안에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번 주의 콘텐츠


Book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모든 어른은 원래 어린이였으니까. 하지만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꽃은 줄곧 초록색 방 안에 숨어 아름다운 모습을 준비했다. 꽃은 세심하게 색깔을 골랐다. 천천히 옷을 입으며 한 장 한 장 꽃잎을 매만졌다.
잘 가.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볼 수 있다는 것.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아. 여우가 말했다. 본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드는 건 네가 그녀에게 쏟은 시간이야. 내가 장미에게 쏟은 시간...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따라 했다.


Book

헤르만 헤세 <크눌프>

아니, 크눌프가 옳았다. 그는 자신의 천성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따라 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았으며 모든 소녀들과 여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매일매일 일요일처럼 살았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움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이 금세 다시 사라져 버릴 거라는 두려움도 느끼게 돼. 이 두 감정은 서로에게 연결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래 지속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렇지 않아?


Book

앨런 긴즈버그 <리얼리티 샌드위치>

그러니 이 초록색 자동차 / 너에게 줄게 비행기 편으로 / 선물이야. 내 상상에서 나온 선물.
그리고 사람 심장 모양의 / 초록색 잎도 발견했다. / 그러나 누구에게 이 시대착오적인 / 밸런타인 선물을 보내랴.
적나라한 점심은 우리에게 자연스럽다 / 우린 실제라는 샌드위치를 먹는다 / 그러나 알레고리는 좀 과하게 넣은 상추. / 광기를 숨기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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