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9호
이번 주의 생각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거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어왔다.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목적이나 계획을 가지고 한 게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질문에 꾸준히 노출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어떤 유형의 증거로 남아야만 의미가 있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스스로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그건 절대 아니라고 명확하게 짚어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얼마 전 조승연 작가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한국의 문화나 정서상으로 무언가에 에너지를 쏟고 공부를 하는데 물질적인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으면 앞부분에 한 것들이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제가 베트남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면 가장 먼저 주변 사람들한테 들어야 하는 반응은 '그거 어디에 쓰려고?'에요. 근데 어디에 쓰려는 생각을 자꾸 하면 저는 재미있게 뛰어들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해요. '쓸데없는 거야'라는 생각만 버리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게 되죠.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보이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아도 아낌없이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을 정도로 공부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부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스며든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모든 공부의 목표가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이었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희생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즐거울 수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과에 따라 과정의 의미가 좌우되었다. 반면, 대학생이 되고 난 후에는 배우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너무 크고 그 공부를 이어가는 것이 어떤 유형의 결과보다 더 중요해졌다. 예를 들면, 불어 시험이 목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불어공부를 즐겁게 이어가는 과정 자체가 중요해진 것이다. 재밌어서 도서관에서 미학 책 들을 찾아 읽고 전시를 보러 다녔다. 공간 디자인 수업을 듣기도 하고 관련 인터뷰를 찾아 읽었다. 다른 사람에게 당장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내 안에 그 경험들이 쌓여있다는 것, 배우고 느꼈던 그 사실 자체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앞으로는 '그거 어디다 쓰려고?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괜한 의심 하지 말고 씩씩하고 명랑하게 '글쎄~'하고 넘겨야지, 그리고 더 치열하게 재미를 쫓아다녀야지.'하고 다짐하게 되는 밤이다.
이번 주의 콘텐츠
Book
정혜윤 <사생활의 천재들>
고민은 무거워도 행동은 가볍게, 거창한 질문 앞에 우리의 행동은 사소한 것부터. 이것이 한 점 중심에서 네가 출발할 수 있었던 이유야.
우리에게도 늘 어떤 식으로든 두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낮의 길과 밤의 길. 세상이 살라고 하는 길과 내가 살고 싶은 길 우리 마음도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혼자이고 싶은 것과 함께하고 싶은 것. 용감해지고 싶은 것과 편안해지고 싶은 것, 싸우고 싶은 것과 고요해지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과 초연해지고 싶은 것. 뜨겁고 싶은 것과 서늘하게 마음을 비우고 싶은 것. 속하고 싶은 것과 벗어나고 싶음. 떳떳하고 싶음과 벗어나고 싶음. 자부심과 자기 비하. 살고 싶음과 죽고 싶음.
체호프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자꾸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들이 넘어지는 건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누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지? 누구의 영향을 받아보지? 그때는 그것에 제 자신을 만들어가는 길이란 것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있던 것도 있습니다. 그 시절 이래로 지금까지 저는 영원한 학생이기에 배움을 추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삶의 동력인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시절의 제가 바빴다기보다는 부지런했다고 생각합니다.
Book
존 윌리엄스 <스토너>
자네는 항상 세상에게서 실제로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니까.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기로 선택했는지,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잊으면 안 되네.
그가 짐작했던 것만큼 훌륭한 책이었다. 문체는 우아했고, 명석한 지성과 냉정함이 열정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글 속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그녀의 모습이 어찌나 생생한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자신의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