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을 한 지도 어언 3~4년이 지났다.
스스로도 좀 놀랍다.
아직도 내가 이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니.
애초에 복싱에 대한 열의는 별로 없었다.
그저 몸관리를 위해 운동이 필요했고, 우연찮게 복싱을 선택했을 뿐.
그래서 실력이 더디게 느는 것 같아도 개의치 않았다.
그냥 오늘 하루 운동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주먹도 예전보다 잘 뻗어졌고, 허리 돌림과 몸놀림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허우적대던 내게 변화가 오는 게 신기했다.
조금씩 감이 온다는 말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때마침 관장님이 생활체육대회 출전을 권했다.
응? 아니, 내가 무슨...
복싱을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생체는 대단한 대회가 아니다.
2분 2라운드 정도의, 많아야 두 경기를 하는 가장 기초적인 시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상대를 만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다.
소위 고인물도 대회에 자주 보인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난 약간의 자신감은 붙은 상태지만,
힘도 체력도 달리는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한데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는 관장님의 말에 더욱 고심이 깊어졌다.
간간이 매스 복싱은 했었지만, 시합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링 안에서는 늘 긴장의 연속이고, 풀 스파링은 무서워서 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 될 이유들을 찾다가 문득 자문해 보았다.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는 할 수 있을까?
복싱 시합은 나에게 막연한 버킷리스트 같은 일이었다.
실력이 나아지면 부담감이 줄어들까.
몸 상태가 지금보다 더 좋아진다는 보장이 있을까.
다음은 기약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생체 중에서도 비교적 가볍게 출전할 수 있는 편이었기에
결국 출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생체에 나가기로 결정한 날부터 부담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관장님은 무조건 우승할 거니까 걱정 말라고 했다.
(우리 관장님은 정말 최고다)
시합을 앞두고 운동량도 조금 늘렸다.
그래야 긴장이 덜 될 것 같았다.
평소보다 강한 강도로 스파링을 하다가 살짝 멍이 들었을 땐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고질병인 목 디스크도 걱정됐다.
회사에는 몇몇에게 생체 출전 사실을 알렸는데,
은근히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출전을 포기하기도 민망한 상황이 됐다.
시합을 피하지 않으려는 하나의 장치이기도 했다.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과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동시에 안은 채
생체 시합날을 맞았다.
시합 전날 잠을 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컨디션은 그렇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였던 것 같다.
아침에 체육관에 모여 대회장으로 다 같이 출발했다.
나를 제외하면 20대 초반 이하의 어린 친구들이어서 분위기는 가벼웠다.
이번 대회는 비교적 작은 규모였다.
가까운 몇몇 체육관에서 모인 것 같았다.
접수대에서 이름을 확인하고, 몸무게를 체크했다.
난 한 경기만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15번째 시합이었다.
그때부턴 온통 내 상대로 누가 나올지에 대해 신경이 쓰였다.
저 사람이 얼마나 강한지는 몸 푸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요즘은 서 있는 것만 봐도 감이 온다.
다부진 근육에 까무잡잡한 피부,
저런 놈과 시합에서 만나면 난 어떻게 될까.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불안함과 초조함이 조금씩 커졌다.
다른 경기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몸을 푸는 건 쓸데없이 체력을 소진한다고 생각해서 대기하는 동안 누워있기도 했다.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고,
글러브와 헤드기어, 처음으로 낭심보호대까지 착용하니
전장으로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 복싱 스타일은 그저 돌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힘이나 기술은 모자란 편이기도 하고,
적어도 생체에서는 돌격이 최선의 전략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작을 알리는 공이 울리고, 이내 나는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강하진 않았지만, 확실히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1라운드 중반부터 급격히 체력이 저하되고 있음을 체감했다.
평소보다 몸이 무거웠고, 힘이 잘 실리지 않았다.
특별히 기억나는 장면은 별로 없다.
긴장한 탓인지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때린 기억보다는 맞은 기억이 더 많다.
2라운드가 끝날 때쯤에는 거의 걸어 다녔지만,
힘이 닿는 한 계속 들러붙어 주먹을 날렸다.
어느덧 시합 종료 공이 울리고, 나는 패배를 직감했다.
경기를 마친 후에는 굉장히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해야만 하는 일을 끝마친 기분이었다.
비록 지기는 했지만 후회가 남는 경기는 아니었다.
다만 이후 며칠간은 무슨 전쟁 나갔다 온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이번 생체를 기점으로 복싱을 계속할 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예전부터 계속 나는 복싱과 안 맞는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아무리 운동 삼아서 한다고 해도 결국 복싱의 끝은 스파링과 시합인데,
링에 올라가는 게 두렵다는 점이 한 몫했다.
안전한 운동을 놔두고 굳이 싸우는 종목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한편 같은 체육관의 20대 초반 친구가 시합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며,
재능의 중요성에 대해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이 친구는 복싱을 배운 지 5개월 밖에 안 됐지만 뛰어난 피지컬로 상대를 압도했다)
어쨌든 여러 고민 끝에 느낀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생체 출전은 잘한 일이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통해 배운다.
시합을 앞둔 상태에서의 훈련이나 마음가짐은
막상 닥치지 않았다면 와닿지 않았을 일들이다.
실전에서는 평소 실력이 다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더 빡세게 준비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체력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다음에 또 시합에 나간다면 러닝과 웨이트를 열심히 할 것 같다.
또한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서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내 할 일에 집중할 것이다.
다만 당분간은 출전할 생각이 없다.
2. 재능 없는 사람이 계속하는 게 더 대단한 일이다.
어떤 분야든 재능이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재능 vs 노력은 큰 의미 없는 논쟁이다.
재능이 없으면 포기할 건가?
재능이 있으면 열심히 안 할 건가?
재능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컨트롤할 수 있는 쪽에 집중해야 한다.
처음에는 내 경기 영상을 보는 게 힘들었다.
수준이 낮다고 비웃었던 다른 시합 영상보다
더 형편없던 나머지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턱걸이 한 개도 못할 정도로 약한 내가
스파링만 하면 무서움에 떨던 내가
복싱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던 내가
시합에 나가서 이만큼이라도 했으니까 말이다.
실력이나 결과가 어떻든, 남들이 어쨌건
하루하루 운동을 마치면 뿌듯하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다.
일단 복싱은 계속하기로 했다.
실은 다른 운동으로 갈아타기도 번거롭고,
그동안 해 온 게 아깝기도 하다.
이참에 복싱 고인물이 되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