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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열 Mar 07. 2022

지금 뭔가 일어났어

하마구치 류스케,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중 인물은 성, 이름 중 하나로 표기하고 싶었으나 편의상 자주 불리는 이름으로 작성했습니다. (예: 가후쿠 유스케->가후쿠, 가후쿠 오토->오토)



극중극


롱테이크가 많아서 영화보다는 연극을 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원작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 <바냐 아저씨>, 그리고 극을 올리기 위한 워크숍 이야기로 세 개의 큰 뼈대가 얽혀 있다. 그 뼈대 속에서 가후쿠와 미사키, 가후쿠와 오토와 다카츠키, 가후쿠와 윤과 유나의 이야기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오토의 여고생 이야기와 <바냐 아저씨>의 녹음테이프, 오디션, 대본 리딩 등 중간중간 삽입되는 대사들이 장면, 작중 상황과 묘하게 겹친다. 이 대사들은 이전에 있었던 일을 요약하기도 하고, 지금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전달하기도 한다.

대사를 제외한 영화는 다른 소리와 장면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 각 나라의 말로 대사를 읽는 소리, 손바닥을 부딪히고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도쿄, 히로시마, 홋카이도의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바다를 바라보며 대본을 볼 수 있는 책상과 의자. 가끔은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적막의 순간이 있는데, 관객들이 숨죽이고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게 정말 좋다.

연극 워크숍에는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각자의 언어로 하나의 극을 연기하는데 즉석에서 짜인 상대방의 언어를 모른 채 연기를 해야 하는 오디션부터 쉽지 않다. 그러나 서로 통하지 않는 말로 대본을 감정을 배제한 채 수없이 읽고 연기를 했을 때, 상대방의 언어와 기교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오토의 목소리, 쌀쌀맞은 미사키의 목소리, 대본 리딩에 할애한 긴 시간은 대사 없는 장면과 함께 영화에서도 ‘언어와 기교가 상관없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은 듯하다. 상황은 대본을 통해 완곡하게, 감정은 장면을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는 듯이. 윤의 집에서 유나는 이렇게 얘기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내겐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때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빨간 SAAB 900 3 도어 해치백


빨간 올드카가 도쿄와 히로시마의 고가를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며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를 떠올렸다. 가후쿠의 십오 년 된 차는 어찌 보면 가후쿠라는 개인의 삶이자 내면이다. 그 안에서 그는 차를 몰고, 극 대사를 소리 내어 연습하고, 죽은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는다. 누군가를 자신의 차에 태운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의 삶에 들이는 것을 의미하는지 좀처럼 타인을 자신의 자동차에 태우려 하지 않는다. 죽기 전에는 오토가 자동차에 탔으며, 그 뒤에는 미사키가 운전수로 탑승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윤, 그리고 항상 바깥에서 보던 타카츠키까지 차에 들인다. 소설에서의 2 도어 컨버터블이 3 도어 해치백으로 바뀐 것은 운전수인 미사키 외에도 윤과 타카츠키까지 가후쿠의 내밀한 공간에 발을 들이게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차를 모는 건 외부와 단절된 내밀한 행위고 그 안에서 가후쿠는 자신의 행방을 스스로 정한다. 그러나 불륜 현장 목격과 녹내장으로 인한 자동차 사고는 거의 동시처럼 찾아온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온전히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게 된 가후쿠는 어쩔 수 없이 미사키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히로시마에서 볼 만한 곳, 혼자 조용히 생각하기 좋은 곳을 가달라고도 한다. 마지막에는 미사키의 고향인 홋카이도까지 차를 타고 떠난다. 그녀의 손에 운전대를 온전히 맡긴 채, 교대하지 않고.

자동차는 비슷비슷한 풍경을 지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가로등, 구불구불한 언덕길, 터널과 휴게소. 규칙적으로 자동차를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드레일, 차선은 하나의 소실점을 만들고, 유리창에 반사되어 흘러가는 풍경과 함께 역설적으로 시간을 제거한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장면 속에서 오로지 자동차의 엔진 소리만이 끊임없이 들리고, 그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눈이 내린 홋카이도에 도착한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


가후쿠 부부(유스케도 오토도 일단은 가후쿠니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게 사이좋은 부부였다. 정신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성적으로도 큰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가후쿠는 드라마를 만들 때마다 그 드라마의 남주인공과 관계를 갖고 드라마가 끝나면 관계를 정리하는 오토를 이해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연히 정사를 목격하고도 모른 척 돌아 나온 뒤에도 아내에게 묻지 않는다. 오토가 그 사실을 고백하려 ‘저녁에 얘기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땐 늦게까지 집 밖을 배회하다 집에서 죽어있는 오토를 발견한다.

오토는 본인의 대본에 “그야 물론이지. 내 생각엔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렇게 두렵지 않아.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야.”라고, 사실은 가후쿠에게 하고 싶었을지 모르는 말을 쓴다. 가후쿠가 두려워한 것은 아내의 외도 자체가 아니다. 아내가 본인의 외도를 고백해서 둘의 관계가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그 사실을 외면했고, 결국 아내의 죽음으로 영원히 미완이 되어버린 관계를 도쿄에 묻고 히로시마로 도망친다. 내연남이면서 남편 앞에서 이런 소리를 할 정도로 뻔뻔하고 비윤리적인 다카츠키의 말에 관객을 흔드는 힘이 있다면 그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그런 걸 바란다면 자기만 더 괴로워질 뿐이겠죠. 하지만 나 자신의 마음이라면,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분명하게 들여다보일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진정으로 타인을 들여다보고 싶다면 나 자신을 깊숙이 정면으로 응시하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편, 자신이 사는 곳에서 히로시마로 도망쳐 온 가후쿠와 미사키는 닮은꼴이다. 사건이 터지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가후쿠는 미사키에게 그녀의 고향으로 가달라고 부탁한다. 만 하루를 꼬박 차를 몰고 산사태가 덮친 미사키의 집을 가서 현실을 마주할 때, 가후쿠는 아내를 떠올렸다. 그는 아내에게 그의 본심을 말하고 외도의 이유를 묻고 싶지만 그녀는 영원히 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보고 싶다. 아버지는 행방을 알 수 없고 산사태로 어머니를 잃은 미사키와, 폐렴으로 딸을 잃고 지주막하출혈로 아내를 잃은 가후쿠는 가족에게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다. 원치 않던 고용주와 쌀쌀맞은 운전수였던 두 사람은 서로가 잃어버린 아버지와 딸처럼 서로에게 위로를 전한다. <바냐 아저씨>의 소냐처럼, 앞으로 살면서 고난뿐일지도 모르지만 꿋꿋이 살아가자고, 그리고 죽은 뒤에 신에게 이렇게 사는 게 힘들었다고 말하자고.

만약 오토가 살아 돌아왔다면 가후쿠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왜 바람을 폈냐고 책망했을까, 자신이 무엇이 부족했냐고 자책했을까. 이혼하자고 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을까. 가후쿠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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