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를 배우다

나는 왜 체스를 두는가

by D군

나는 성질 급한 직관형 인간이다. 심사숙고하는 타입이 아니다. 나란 인간은 직관을 매우 중시하는데, 성질까지 급하니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번뜩 떠오르면 주저 없이 실행한다. 모든 성격이 다 그렇듯, 이런 내 성격도 장점과 단점이 있다. 일단 판단이 빠른 건 장점이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굉장히 빨리 선택한다. 살아보니 알게 된 건데, 선택이란 건 대개 빠를수록 가산점이 있다. 반대급부로 판단의 정확도가 낮다는 건 단점이다. 사람의 판단은 정확도와 속도가 반비례한다. 직관을 믿고 순식간에 판단했다 쓴웃음을 지은 적이 몇 번 있다.


위기는 회사에서 일어났다. 개발 한 프로그램을 테스트하던 때였다. 도무지 생각한 대로 동작하질 않았다. 분명 기획서대로 개발을 했는데, 자꾸만 예외가 발생했다. 비즈니스 로직을 점검했을 땐 문제가 없어 보였다. 기획서도 다시 점검했는데 문제없었다. 결국 코드를 한 줄 한 줄 읽으며 디버깅했다. 두 시간 동안 실랑이를 벌인 후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기획서에 없어서 자의적으로 판단했던 부분이 문제였다. 빠르게 판단하느라 경우의 수를 놓쳤다. 다행스럽게도, 상용 배포 되기 전에 수정할 수 있었다.


급한 성격을 좀 죽여야 한다. 아찔한 사고를 겪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업무 할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신중해지는 연습이 필요했다. 문득 고등학생 때 잠시 유행했던 체스가 떠올랐다. 그때 쓰던 건 문방구에서 팔던 천 원짜리 싸구려 체스 세트였다. 그래도 야자 시간에 선생님 몰래 키득키득 웃으며 즐겁게 뒀다. 체스를 둘 땐 한 수 한 수 신중하게 뒀던 기억이 났다. 물론 기본적인 전략도 모르고 엉성하게 뒀지만 말이다. 분명 성격 교정에 도움이 될 거 같았다. 바로 체스 공부를 시작했다.


유명한 체스 이론서 두 권을 샀다. 인터넷 강의도 구매했다. 체스닷컴 계정을 생성했다. 공부를 하면서 바로 실전에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름대로 고민하며 뒀는데도 늘 구멍이 있었다. 레이팅은 올라갈 기미를 안 보였다. 이쯤 뒀으면 이 정도는 돼야 할 텐데, 싶은 수치는 너무나 멀리 있었다. 능력에 비해 눈이 높았다. 레이팅의 산은 한 발짝 올라서면 세 발짝 떨어지곤 했다. 차분해지겠다는 목표는 이미 잊고, 레이팅 욕심에 눈이 멀었다.


이젠 패배가 익숙해질 때쯤 간신히 원래 목표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체스 선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취미로 체스를 둠으로서 차분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목표다. 이렇게 생각하니 경기를 할 때 주안점이 변했다. 중요한 건 승리가 아니었다. 항상 최소 세 수 앞을 내다보려 노력하는 게 중요했다. 그냥 두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뒀을 때 상대가 어떻게 대응하고 그 대응을 어떻게 받아칠지 고민했다. 때론 강제 수가 없어서 도저히 세 수 앞을 못 보는 경우도 있었다. 때론 열심히 생각했는데 상대의 대응이 완전히 내 예상을 벗어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내다보는' 노력을 했다.


이제 조금은 차분한 사람이 된 거 같다. 생각 없이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일상 속에서도 체스를 두는 것처럼, 몇 수 앞을 내다보려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상대는 이렇게 느껴 저렇게 행동할 거고 그럼 나는... 같은 수 읽기가 내면에서 습관화 됐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정도면 소기의 목표는 충분히 달성했다. 체스는 참 평생 가져갈 좋은 취미 아닐까 싶다.


아 참고로 목표 레이팅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그래도 코앞이다. 9월 초까진 도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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