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좋은 영화가 많았던 올 한 해의 최고작 열 두 편
올해도 별다른 글은 올리지 못했지만, 연말이 되었으니 또 한 해를 결산할 때가 된 것 같네요. 작년에 본 영화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12편을 선정해 보았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로로든 신규 공개된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이전에 공개되었던 영화들 중에서 제가 올해 처음 본 작품들은 제외했습니다. (순수하게 제가 올해 처음 본 영화들로만 순위를 매긴다면, 단언컨대 최고의 작품은 드디어 관람할 기회가 생겼던 벨라 타르의 1994년작 '사탄탱고'였을 거에요. 이 영화는 제가 살면서 본 영화들 중 최고의 작품들을 고르라고 해도 고민없이 가장 먼저 떠올릴 작품 중 한 편이 될 것 같습니다.) 올해도 참 좋은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나름대로 순위를 고르다 보니 아쉽게 빠진 작품으로는 다르덴 형제의 '토리와 로키타', 쥐스틴 트리에의 '추락의 해부' 그리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가여운 것들'이 떠오르네요. 또, 매우 기대하고 있던 영화 중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처럼 아직 미국에 개봉하지 않아서 보지 못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럼, 12위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열정은 멈추지 않는다. 이란 정부에 의해 구류 상태에 놓인 그가 이란과 튀르키예의 접경지대에서 촬영 중인 가상의 영화를 배경으로 만든 ‘노 베어스’는 (전작 ‘택시, 그리고 ‘3개의 얼굴들’에 이어서) 일종의 모큐멘터리로 보이는데, 자파르 파나히는 이번 작품에서도 본인이 놓인 상황적인 한계를 창작의 씨앗으로 활용한다. 그가 극중에서 원격으로 감독 중인 영화와 그가 놓인 현실은 끊임없이 병치되며 주제의식을 세공해가지만, 영화의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딫힐 때마다 그저 처연해진다. 현실적 제약을 영화적 허용으로 돌파하고야 마는 자파르 파나히의 영화세계는 여전히 놀랍고도 감탄스럽다. (No Bears / خرس نیست)
오직 대런 아로노프스키만이 만들 수 있는 드라마. 폐쇄적인 공간 속 한 인물의 삶의 일부를 지긋이 지켜볼 뿐이지만, 간혹 등장하는 플래쉬백을 통해 엮어가는 인물들 사이의 드라마는 이를 데 없이 섬세하다. 좁은 집 안에 스스로 틀어박힌 한 인물의 일주일을 따라간다는 점에서 ‘더 웨일’은 종교적으로 읽히는데,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과거의 사건과 이 영화의 과감하고도 황홀한 엔딩을 떠올리면 더욱 더 그렇다. ‘더 웨일’은 한 인물이 어떻게 파멸로 치닫는지에 대한 지독한 클로즈업인 동시에 한 가족이 어떻게 화합으로 가닿는지에 대한 뭉클한 파노라마이다. 그러니까, 파멸과 화합을 한데 욱여넣은 괴팍하고도 강렬한 드라마. (The Whale)
누리 빌게 제일란의 신작 ‘마른 풀에 관하여’는 일상적 소재들을 다루는 장광설인 동시에 인간의 황폐함을 담아내는 서사시라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과 궤를 같이 하지만, 이전에 보기 쉽지 않았던 기묘한 유머가 돋보인다.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듯) 이 영화는 다른 인물의 관점을 배제한 채 관객들이 극중 주인공 사메트(데니즈 젤리로을루)의 관점만을 좇아가게 하는데, 그토록 집요하게 펼쳐낸 인물들의 사연은 그 핵심이 종종 의도적으로 텅 비어있다는 점에서 마치 마른 풀처럼 황망하다. 이전 걸출한 세 작품에 비해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누리 빌게 제일란 영화세계의 집대성과도 같은 작품. (About Dry Grasses / Kuru Otlar Üstüne)
이토록 간결하게, 그러나 이토록 깊숙하게 마음을 울리는 드라마를 보기도 오랜만이다. 콤 베어리드의 ‘말없는 소녀’는, 지극히 단순한 이야기를 통해서도 훌륭하게 감정의 골을 파고든다. 과거의 사건을 계기로 말을 잃어버린 소녀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생활하게 되며 벌어지는 이 이야기는, 말하거나 듣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시각과 촉각으로 훌륭하게 형상화한다. 영화에서 언급되는 맑은 샘물, 그리고 환한 불빛이라는 두 가지 핵심적인 소재는 서서히 인물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이윽고 서로를 품어낸다.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하나씩 건드린 끝에 도달한 ‘말없는 소녀’의 엔딩은, 오래도록 남을 여운을 선사한다. (The Quiet Girl / An Cailín Ciúin)
올해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베르쿤 오야의 신작 ‘지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억(으로서의 영화)과 영화(로서의 기억) 사이의 관계를 흥미진진하게 파헤친다. 이전에 벌어진 (그렇기에 돌이킬 수 없는) 가족들 사이의 원형적 사건을 그 사건의 일부였던 아들이 스스로 영화로 제작한다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현실과 극을 종횡무진 오가며 사건 뒤에 감추어진 진실을 하나씩 들추어간다. 흑백과 컬러가 병용되는 ‘지지’에서 영상이 흑백으로 전환되는 시점은 누군가의 시점으로 재구성된 기억(혹은, 그렇기에 영화 그 자체)임을 암시하는데, 결국 상실 뒤에 감추어진 비밀이 드러나는 것이 컬러 화면을 통해서라는 점은 이 상실의 비극을 한층 더 깊게 사무치게 한다. (Cici)
역시 뛰어났던 전작 ‘운디네’에 주제적으로 이어지는 ‘어파이어’는, 크리스티안 펫졸트가 보이지 않는 감정의 기류를 이야기 속에 어떻게 다층적으로 담아내는지를 보여주는 또 한 편의 수작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야 마는 ‘산불’이라는 소재와 그에 뒤따르는 세 가지 색깔을 인물들의 속마음에 투영시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결국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때이른 질투와 뒤늦은 후회는 서로 뒤얽혀 불타오르고 만다. 맹렬하게 치솟는 붉은 불, 모든 것을 태우고 난 검은 그을음, 그리고 그 뒤에 덩그러니 흩날리는 하얀 재, 는 인물의 내면을 환기하며 이 감각적인 이야기를 더욱 더 입체적으로 조형한다. (Afire / Roter Himmel)
‘당신 자신과 자신의 것’ 이후 홍상수의 최고작. 근작으로 올수록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을 끊임없이 극 속에 투영하던 그는, ‘탑’에 이르러 그 자아를 기어코 분열시킨다. 동일한 공간의 다른 층위를 그 자체로 극의 원형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그의 이전 작품들이 겹쳐보이지만, 마치 옴니버스처럼 보이는 ‘탑’에서는 병수(권해효)가 층을 올라갈 때마다 변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탑이라는 오르막 속의 홍상수라는 골짜기를 내밀히 들여다보는 이 영화는, 결국 탄성을 자아내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다시 또 그 곳으로 향하는 영원회귀적 이야기로 끝맺음한다. 그러니까, ‘탑’은 미로 속을 헤매는 한 남자의 반복되는 오디세이와도 같은 영화다. (Walk Up / 탑)
크리스티안 문쥬는 선택한 주제를 지독하게 파고드는 걸 넘어서, 해부하고 해체한 뒤 전시하는 데 탁월한 재주를 지닌 예술가이다. 외지인에 대한 혐오를 다루는 신작 ‘R.M.N.’ 역시 마찬가지다. 루마니아의 현 상황을 날카롭게 도려내 그 상처를 전시하는데, 이는 자신 역시 이방인이라는 진실을 망각한 채 그저 눈 앞의 이방인들만을 배척하는 위선적인 태도에 대한 우화적이고 강렬한 일갈이다. 인간군상이라는 파국 그 자체를 집약시켜놓은 영화 후반부 마을 집회의 롱테이크 시퀀스를 지나 이제까지 쌓아올린 모든 이야기를 한 데 모아 거대한 질문을 던지는 엔딩을 보고 나면, 결국 크리스티안 문쥬가 영화 내내 역설하던 질문만이 선명하게 남겨진다. 대체 이방인은 누구인가. (R.M.N.)
‘희망의 건너편’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던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이를 번복하고 만든 신작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그의 영화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수작이다. 아마도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 무심코 던지는 유머와 넌지시 드러난 감정이 영화 내내 흐뭇한 미소를 자아낸다. 이름을 몰라도 상대를 알아갈 수 있다는 마음은 갑작스레 끼어드는 세상의 방해로 인해 여러 차례 좌초되지만, 결국 세상의 차디찬 무정 속에서도 마음의 따스한 연정을 피워낼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하는 이 황량하지만 뭉클한 영화는, 감정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만든 기적의 순간들로 빼곡하다. (Fallen Leaves / Kuolleet Lehdet)
논쟁적 인물의 전기를 영화의 소재로 삼고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그의 주특기인 플롯의 교차적 활용을 유감없이 펼쳐낸다. 시작과 함께 던져진 세 가지 시대의 이야기는 별다른 맥락 없이 병렬적으로 제시되지만, 뛰어난 각본과 정교한 편집에 힘입어 이 거창한 서사는 결국 하나의 구심점으로 수렴한다. 이전 놀란의 영화에서 부족했던 ‘인물’에 대한 집중이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오펜하이머’는, 영화 자체의 구성이 이야기의 핵심 소재인 핵폭탄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여전히 놀란다운 영화다. 결국 분열(fission)과 융합(fusion)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오펜하이머’는, 얼핏 질서없이 흩뿌린 사건의 파편들을 우직하게 끌어모아 기어코 폭발시킨다. (Oppenheimer)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 복잡하게 얽히고 겹친 채 상호작용하는 극중극 사이의 관계는 웨스 앤더슨의 세계론을 확고하게 보여준다. 가상의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SF 소동극은, 사실 연출가 슈베르트(애드리언 브로디)가 상연 중인 연극이었다. 그리고 그 연극은 사실 각본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이 써내려간 극본이었다. ‘잠들지 않는다면 깨어날 수 없다’고 반복적으로 주문을 거는 이 이야기는, 세 층위의 (그 중 적어도 하나가 상상의 산유물인) 세계를 통해 그 자체로 진실과 거짓의 관계를 은유한다. 그러니까,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몽상하는 예술을 거쳐야만 희구하는 현실에 가닿을 수 있다고 믿는 웨스 앤더슨의 독창적 세계론이다. (Asteroid City)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역작인 동시에 그의 필모그래피 최고작. 정체불명의 감기에 걸린 만화가의 상상을 소재로 하는 이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캔버스를 통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일종의 영화적 활극이다. 그 가운데 훌륭하게 역설되는 것은, 병든 시대를 고칠 수 있는가, 그리고 잠든 정의를 깨울수 있는가, 에 대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의뭉스러운 물음이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병든 이도, (관 속에 들어앉은) 잠든 이도 죽음에 가까워져만 가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상상할 힘이 남아있다. 실재하지 않는 사건을 마치 실재했던 기억인 양 다루는 이 영화의 화법이야말로, 상상의 힘이라도 빌어 현실의 구렁텅이를 버텨내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다. (Petrov’s Flu / Петровы в гриппе)
이 중에서 '노 베어스'는 내년 1월 한국 극장 개봉인 것으로, 그리고 '지지'는 넷플릭스 독점작이라 넷플릭스에서 관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한국에서도 지금 극장 상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고요. '탑'은 한국에서 2022년 개봉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미국에서는 올해 개봉해서 늦게나마 챙겨볼 수 있었습니다. '마른 풀에 관하여', 'R.M.N.' 그리고 '페트로프스 플루'는 한국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것으로 얼핏 기억하는데, 아마 국내 개봉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것 같고요. 돌이켜보니 올해도 좋은 영화가 많아서 참 풍성한 한 해였습니다. 내년에도 좋은 영화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