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하디 착한 아이고자 했던 모범생은 결국 '나' 잃었다.
1. 넌 꿈이 뭐니?
초등학교 시절, "넌 꿈이 뭐니?"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제 꿈은 통일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장래 희망에 관한 질문이었을 테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기억에 남은 것인지, 왜 그런 대답을 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어렸을 적부터 본능적으로 직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던 것 같다.
파일럿, 한의사, 선생님, 기업가, 대통령 등등 하루건너 바뀌는 장래 희망들을 빼면 살면서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딱히 없다. 어떤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이 일생일대의 사명처럼 느껴지는 고3 수험생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어른들의 질문은 '어느 대학에 갈 거니?',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니?' 등과 같은 것들이다. 과연 우리나라 수험생 중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고3 때 이미 정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대학 진학을 위해 언제부터 간절히 꿈꿔왔던 것처럼 행동하고 포트폴리오를 작성해야만 한다. 그래야 합격 확률이 좀 높아질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진짜 꿈을 찾을 시기를 놓치고 만다.
2. 어긋난 사랑
어린 시절, 어머니의 곁에서 자주 공부하곤 했다. 아니, 공부를 점검받곤 했다.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한자를 100개씩 외워야 했다. 다음날에도 100개, 그리고 또 다음날에도 100개씩 누적해서 외우고 평가받았다. 한 주가 끝나는 날엔 누적 700개의 한자를 적어내야 했다. 10살짜리 아이에게 그 혹독한 훈련은 참으로 힘겨웠다. 못하겠다고 펑펑 울고 나서도 기어이 꾸역꾸역 한 자 한 자 눌러쓰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초등학생 때 다녔던 학원만 해도 참 다이나믹하다. 서예학원에 다니며 정신 수양을 하고, 피아노학원 연습실에 갇혀 꾸벅꾸벅 졸았다. 태권도학원은 왜 다녀야 하는지도 모르고 다들 하니까 좋아라 가서 놀았다. 생각해보니 영어 과외와 빨간펜, 구몬, 재능교육 학습지까지 여럿 했었더라.
나중에 생각해보면 참 대단했다. 그 시기를 견딘 나도 나지만 IMF로 일자리를 잃고도 다시 일어선 아버지와 새벽 동대문시장에 나가며 물건을 떼다가 선물 가게를 했던 어머니가 참 대단했다. 반지하에 살며 빠듯한 살림이지만 큰아들은 공부로 성공시켜보겠다고 이것저것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내주며 투자하셨다. 하지만 현재 그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고 계시니 얼마나 서운하실는지.
겉으로 보면 청소년기 시절은 다소 무난하고 무탈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반장을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고, 내신 성적도 한자리 등수를 오르내리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받아쓰기를 하나라도 틀리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를 안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착한 아이 말이다.
하지만 그 착하디 착한 아이이고자 했던 모범생은 결국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일까?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면, 또 공부만 해야 하는 걸까? 대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 지금 당장 내가 배우고 싶은 것만 공부하고 싶은데 사회는 교육과정이라는 걸 굳이 만들어 괴롭게 하는 걸까? 그렇게 대학에 가고 취직하면 평생 일만 하다 죽겠지.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오히려 부담만 더 생기는 건 아닐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선생님과 부모님,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온 내게 나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도저히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어차피 똑같은 삶이라면 차라리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이 덜 괴롭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