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운한 애미의 컬쳐샥 그리고 자기결정권
요즘 아이가 부쩍 볼살이 통통하게 차올랐다. 그런 통통한 아이의 볼을 보고있으면 나의 손이 간질간질하다. 만지고 싶어서. 나는 아이의 살결을 만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 딸 가진 엄마의 특권이랄까. 딸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피부는 제 2의 뇌라는 말을 들었고 부모의 따뜻한 스킨십이 아이의 뇌 발달에 좋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나는 마음껏 아이와 부대끼고, 만지며, 아기 냄새를 맡고 나의 영혼까지 순수하게 치유되는듯한 그 느낌을 온전히 누렸다.
아기였던 딸은 유치원생이 되었다. 아이가 다섯 살만 돼도 아빠는 딸을 만지는 데 있어서 굉장히 조심스럽다. 그런데 엄마인 나와는 아직도 같이 목욕도 하고 로션도 발라주는 사이다. 한마디로, 나와 딸의 거리는 아주 가까운 것이다.
하지만 어느날, 나에게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워온 '거리두기'를 엄마인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그 찹쌀떡같이 통통하고 부드러운 볼을 만질라치면 양 미간을 찌푸리며 스윽 피한다. 그리곤 외친다.
"스페이-스! (Space!)"
그 볼록하고 말랑말랑한 배를 쓰다듬어 주려할 때도,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려 할 때도 (그러면서 슬쩍 뽀뽀하려고 할 때도) 어김없이 그녀는, 나를 보며 "스페이-스!"를 외친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분명 학교에 보내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이의 뇌 발달을 핑계삼아, 그리고 스페이스보단 정이 넘치는 한국문화에서 나고 자란 나는 부비부비 살을 부대끼며 스킨십이 넘치는 육아를 해왔더랬다. 그런데 학교에 간지 이제 고작 세 달 된 아이가 스페이스를 외치며 나의 스킨십을 거부하니,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이게 정녕 이민사회에서 말로만 듣던, 부모 자식간의 문화차이란 말인가. 벌써 햇수로만 9년째 미국에 살고 있는 나는 수많은 이민자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화 차이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해 이미 많이 들어왔다. 그 문화차이로 일어나는 부모-자식 간 갈등의 이야기도.
그러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문화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우리 아이를 친밀하게 키울거야'
라고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 문화차이가 벌써 이렇게 성큼, 우리의 현실로 문 앞에 다가왔음을 느끼자 마음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남편에게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그는 '그것도 한때야' 그런다. 맞긴 맞는 말이긴 한데 서운한 감정은
어쩔수가 없는가보다. 한참 딸이 학교에서 '스페이스' 에 대해 배우며 사람 간 거리두기, 사람 간 지켜야 할 선 같은 걸 배우는지라 그녀의 배움을 방해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리고 나와 남편은 딸이 아기일때부터 딸의 '자기표현'에 대해 굉장히 신경을 썼었다. 우물쭈물 하고 싶은 말을 생각대로 하지 못하는것만큼 큰일나는 건 없다고. 딸이 '노' 라고 할 때, 그 노'가 진짜 '노'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해야, 나중에 대인 관계 속에서 원치 않는 상황이 생겼을 때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남편은 '선택장애'적 성향을 갖고 있었던 나에게도 자기가 원하는 걸 똑바로 알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했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걸 말하거나 행동할 때 어떠한 편견이나 판단 없이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었다. 그만큼 인격적인 존중은 우리가족의 중요한 모토와 문화중 하나로 무언의 동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아기에서 어린이로 넘어가는 경계선에서, 딸을 향한 존중 또한 한층 짙어져야할 때라고 느낀다. 딸에게서 컬쳐샥을 느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딸이 보여준 거리두기는 컬쳐샥 그 이상의 것이다. 단순히 애미의 서운함을 넘어 이것은 딸들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연습이자, 실전인 것이다.
부디 나의 딸이 어떤 상황속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느낌을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자신과 타인의 존엄성을 지켜줄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도와주고 싶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아기냄새와 함께 딸도 나도 더 진한 사람냄새를 지닌 존재로 성장해 가고 있다.
(그래도 이 애미는 틈틈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