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욕꼬질이들 Nov 04. 2024

30대의 끝자락에 한 소개팅

물 흐르듯 흘러서 지나감


소개팅을 했다


이제 선이라고 해야 하는 거겠지만 나는 그만큼

철들지 않아서 소개팅이라고 해두겠다


나는 소개팅을 한 적도 몇 번 없지만 해서 잘된 적이 단 한번 있었는데 나르시시스트 가스라이팅 스토킹 자살협박 등등 종합 선물 세트의 남성과 잘 되었었기 때문에 잘 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치고 싶다


어느 날 친한 동생이 카톡을 했다


언니, 만나는 사람 있어요~?
남편 거래처 사람인데 물류회사 다닌대요.
만나볼래요?


안 그래도 요즘 결혼도 하고 싶고 아기도 낳고 싶다고 생각이 바뀌고 이런저런 모임에도 나가볼까 기웃거리고 딴청을 많이 부리던 차다


“없어. 응 만나볼게. “


예전에는 시간이 아까우니 사진 정도는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사실 예전에도 안 물어봄), 이제는 소개팅 자체가 나에게 희귀한 이벤트라고 생각이 드니 미리 물어보는 행위가 더 귀찮았다.

동생 남편의 안목을 반 정도 믿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00 실장님 소개로 연락드린 000입니다.
함께 아는 사람이 없어서
둘이 만나서 얘기하는 거 괜찮으세요?


소개팅은 원래 둘만 만나는 거 아닌가?

요즘 트렌드가 바뀌었나.


“네 만나서 얘기하는 거 좋아요. 초큼 어색하겠지만ㅋ“


“제가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


“아뇨 같이 노력해요! ㅋㅋㅋㅋ“


ㅋ를 너무 많이 썼나?

뒤에 ㅎ 만 가끔 붙이는 남자에 비해 경박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카톡 말투 하나하나에 자기 검열을 시작했다.

그래도 자기가 노력하겠다는 말이 멋지다


“네. 못 드시는 거 있으세요? 간단히 술 곁들이는 건 괜찮으신가요? 알려주시면 만나기 전 날 몇 군데 찾아서 보내드릴게요. 골라주시면 예약해 두겠습니다. “


소개팅 AI처럼 물 흐르듯 흘러가는 그의 메시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100점과 같았다


장소


센스 있어 현재 스코어 100점짜리 AI 소개팅남은 약속처럼 만나기 전 날 내 사무실 근처에 있는 식당들 세 군데를 보냈고 마음에 드는 데가 없으면 다시 알아보겠다고 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들이고 다 좋아 보였다.


일식집을 고르려다 야키토리는 연기가 많이 나서 비염이 있는 내가 콧물파티를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무난하게 이탈리안을 골랐다


의상


사랑에는 정열의 레드지!


나의 작정한 마음을 대변할 레드 스웨터에, 블랙 미니스커트, 검정 스타킹, 발목까지 오는 부츠를 신었다


맞춰 입을 아우터가 없는 비상사태가 발생했지만 만나기 한 시간 전 급히 샀다.

가을에 입는 카키색 야상 재킷인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팅이 망하더라도 이건 남겠구나 안도(?)했다


붙는 미니스커트를 오랜만에 입는다

배가 볼록하게 나와있다

요즘은 힘을 주어도 배가 들어가지 않아 당황스럽다

이틀 전에 폭풍 공복 소개팅 의상 쇼핑을 마치고 치킨을 반 마리 넘게 폭풍 흡입한 나 자신을 원망했다


만남


AI 소개팅남이 5-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고 미안하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첫 만남에 늦는 것은 대단한 감점 요소입니다. 하지만 내 주변으로 식당을 찾아줬고 예약도 해줬으니 5-10분 정도는 보류하겠습니다.‘


갑자기 속으로 서바이벌 게임의 심사위원이 되어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죄송하다며 그가 등장했다.

멀끔하고 훤칠하다

엄격한 심사위원이 사라지고 나의 니트처럼 붉은 열정이 피어오른다


“아니에요. 오시는 데 힘드셨죠?”


베테랑 소개팅 기계와 같은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리액션 기계가 되었다.


서로의 입에서 직업, 여행, 취미 등등 이야기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그의 얼굴이 나랑 잘 어울리는 얼굴인가 내가 좋아하는 이목구비인가 찬찬히 뜯어보았다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의 홍수를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공백을 참기도 밥을 먹기도 힘들어서 밥을 반 이상 남겼다

그는 AI 답게 나와 속도를 맞춰서 덩달아 안 먹었다.

맛있게 와구와구 먹고 싶었지만, 너무 긴장이 되고 나와있는 나의 배가 너무 눈에 거슬려 도저히 밥이 들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내 배를 지긋이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깨는 뭉쳐오고 와인을 마실수록 배는 더 나오고 눈빛은 퀭해지지만 건강한 척을 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작고 환기가 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나는 콧물 파티, 리액션 파티를 했고,

바틀 와인을 주문한 그는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었는데, 내가 와인 마시는 사진을 보고 나와서 내가 와인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나는 최근 술을 끊었고 담배도 안 피우고 와인, 골프, 클래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는 운동을 열심히 하지는 않는
헬창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정희원 교수님의 저속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단순당 정제곡물을 자제하고, 술을 끊었고 담배도 안 피우고, 일 끝나면 운동하거나, 집에 가서 집안일만 하다 다음날 일 가는 일상이 위주인 나를 소개하기에 저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러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저 사람은 잘 놀고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 같은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매우 재밌는 사람이지만 그와 유우머 코드가 다름. 아무튼 그럼.)


내가 그에게 별생각 없이 하는 질문도 나랑 잘 맞는지 시험하는 것 같이 느껴졌고(맞기도 하지), AI처럼 성실히 답하고 나에게 되묻지 않는 그가 나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 않구나 싶었다


마지막 질문으로 그는 노랑머리인 나에게 클럽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39세 여자한테 42세 남자가 물어본 질문이다

당황한 상태로 좀 가봤지만 내 스타일은 아닌 거 같다고 매우 혀가 길게 늘여서 답변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개팅 로봇 둘이 만난 거처럼 공허함이 느껴지던 찰나 그가 시계를 보았다


“갈까요?”


“네”


목요일 밤 10시의 홍대 거리는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알고 보니 흡연자였던 그는 나를 지하철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담배 이슈로 중간에 멈춰서 인사를 건넸고, 나도 인사를 한 후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철로 직행했다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해요. 좋은 밤 보내세요.ㅎ


AI 소개팅남은 마무리 카톡까지 군더더기가 없다.


“네 저도 감사해요. 좋은 밤 보내셔요 :)“


덕분에 즐거웠어요라고 할 법도 한데 목구멍으로 나오지 않았다


‘빠릿빠릿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관리도 잘하고 진취적이고 열정이 넘치는 분이어서 외적으로는 끌렸으나, 저는 담배와 술을 멀리하고 약간 너드남에 착하고 순박하고 똑똑하고 차라리 게임하는, 바른 사람이 좋아요. (침착맨, 최강록 셰프, 가수 이지혜 남편 문재완님, 정희원 교수님, 닥터프렌즈 우창윤 선생님 등.. 하.. 다 유부남이네…)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화 중에 그가 장윤주의 외모를 칭찬했는데, 잘 놀고 쭉쭉빵빵한 스타일의 여자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외모 예선전에서 떨어진 것도 같지만,

정신이 피폐해질 만큼 재밌고 짜릿한 연애를 할 체력과 하등의 이유가 더 이상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이성과 이성 간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몰랐던 나의 안 좋은 습관이나 버릇(때때로 깐죽대고 팩트폭행을 날림)들도 깨달았다.


힘들고 괴롭지만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또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