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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네 Mar 02. 2024

작정하고 보려면 안보이더니

피에르 로티, 이스탄불

이스탄불을 떠나기 이틀 전. 해 지는 시간이 6시 45분인 것을 검색해 보고 노을을 볼까 싶어 피에르 로티를 향했다. 처음으로 햇살이 따뜻한 날이다. 지난주까지 계속 날이 흐리고 어둡고 바람이 불었다. 딱히 할 것도 없고 친구가 추천해 준 피에르 로티에 가려고 구글 맵을 켰다.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가는 버스가 많다. 55T나 99A를 타고 6 정류장, 6분 이동하면 된다. 부르사에서 산 황금색 실크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버스에는 남녀노소 현지인들이 많았다. 스카프를 얼굴에 두른 여자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들. 한국에 돌아가면 일상에선 볼 수 없는 시민 풍경이다. 버스에서 내려 구글맵을 켜 피에르 로티까지 걸어가는 15분 경로의 길을 확인한다. 밧데리가 얼마 남지 않아 비행기 모드로 놓고 가는 길만 확인하면서 간다. 언덕진 계단을 오르니 숨이 차다. 간간히 피에르 로티라고 방향 표지판이 되어 있어 이 길이 맞구나, 하면서 안심하면서 걸어 올라간다.



어느 정도 도착했을 무렵 아파트 같은 주거지 부근에 8살 정도 보이는 장난꾸러기 남자아이 세 명이 공을 차고 놀고 있다. 멀리서 날 바라보고 쓰시? 재팬? 하면서 다가왔다. 개구지고 긍정적인 말투와 표정의 어린이다. 나는 한국에서 왔어. 그랬더니 안뇽~ 하면서 인사했다. 나도 안뇽! 하고 인사했더니 셋이 깔깔거리고 웃는다. 눈을 마주치며 what’s your name? 하고 묻는다. 눈을 맞추면서 자신 있게 묻는데 여자에게 번호 물어보는 남자의 호기처럼 쪼꼬만 게 어른처럼 행동한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서양? (터키를 서양이라 하기 그렇지만) 비아시아권 어린이들에게서 어른에게 이런 자신감 있는 태도를 자주 느낀다. 보기 좋다.


아직 5시 조금 넘은 시각이라 사람이 많이 없지만 이미 전경에 가까운 자리는 다 차지가 되어있다.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니 날도 쌀쌀해졌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와 언덕 위 집들과 변해가는 하늘색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가슴이 뻥 뚫린다. 사진을 찍는데 실제의 모습이 전혀 담기지 않아 아쉽다. 앉을 수 있는 카페 야외 자리를 둘러보다 나도 경치를 바로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날이 추워지기 시작하고 목도 계속 아프다. 그래도 야외라 기침하기에 눈치가 덜 보인다. 터키식 차이를 많이 마셨으니 애플티를 마실까, 약 천 원을 내고 애플티를 마신다. 달달하고 사과향이 강하다.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하늘을 구경한다. 색의 변동이 크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붉게 물들어가는 것 같다. 그런데 하늘이 흐려서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야경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혼자 오니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다. 친구가 보고 싶다. 옆 테이블은 독일인인 것 같은 여성 두 명이 앉았다. 베이지색 털모자를 쓰고 베이지색 니트 코트를 입었는데 인형같이 생긴 얼굴에 스타일이 멋스럽다. 6시 40분이 가까워지도록 추운데 앉아서 기다리는데 노을을 보는 건 실패한 것 같다. 추운데 집에나 가자. 밧데리는 20 정도로 줄어들고 내려가는 길을 찾는데, 어랏 케이블카 같은 게 있다. 힘들게 걸어 올라왔는데 케이블카가 있네! 그냥 트램, 버스 요금만 내면 된다. 이스탄불 카르트를 찍고 줄을 서지 않고 바로 내려가는 트램을 탈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은 노을 보는 걸 포기했다. 날도 흐리고, 날이 좋은 날 올라와도 보지도 못하고. 영 인연이 없나 싶다. 몸이 안 좋으니 집에 가고 싶다. 여행 내내 감기 몸살로, 기침으로 죽을 것 같이 아팠다. 이제는 여행 갈 때 편도로 예약할 거다. 편도 가는 티켓과 2~3일 정도의 호텔만 예약하고 여행을 떠나는 게 좋겠다 싶다.



예기치 않게 노을은 부다페스트에서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부다페스트 마지막 날 밤 도심 속에서, 그리고 다음 날 부다페스트를 떠나는 공항에서. 마지막 날 저녁을 방 안에서 보내기 그래서 도심을 걷자, 하고 무작정 나와서 건물들 사이에서 본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은 너무 멋졌다. 보라색, 하늘색의 조화로운 색깔이 예쁘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나타나니 리프레시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오후 6시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 창밖에 석양이 붉게 지고 있다.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앉아서 계속 지켜보았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잠시 멈춰 사진을 찍고 지나간다. 헝가리 국립미술관에서 본 다양한 초상화들과 달리 이젠 사진이 일상 속 보편화 된 예술이 되었다. 어느새 비가 촉촉이 내리기 시작했다. 보딩을 위해 비행기로 향하는 길, 비를 맞는 게 기분이 좋다. 비와 함께 깜깜한 하늘 속으로 여전히 빛나며 사라질 준비를 하는 붉은 태양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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