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21)
디지털 노마드 트립에서 만난 필리핀 아줌마도 귀국하기 며칠 안 남아서 가기 전에 언제 보자고 연락을 하던 중이었다. 아줌마는 볼에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로 마라톤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더니 별일 없으면 같이 하자고 했다. 안 그래도 마라톤 행사가 있다고 도로가 통제될 수 있다는 안내가 페이스북에 뜨길래 행사 안내 링크에 들어갔는데 미리 신청했어야 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바이크를 타고 타패 게이트 쪽을 지나가다가 행사 부스를 봤던 게 생각이 났다.
“아, 미리 신청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갈게요. 좀만 기다려줘요! “ 하고 메시지를 보냈다. ”응. 그냥 같이 뛰어도 된대. 일찍 오는 게 좋아. 와서 사진도 찍고 해. “ 하고 아줌마에게 답장이 왔다. 무에타이 예약한 걸 내일 가겠다고 취소한 뒤, 무에타이 가려고 했던 복장 그대로 방에서 나와 타패게이트로 볼트를 불렀다. 20% 할인 행사 중이었다. 집 앞에서 바이크를 기다리면서 비가 많이 왔을 때 요 앞이 종아리가 잠길 정도로 범람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이제는 이곳도 떠날 때가 되었네. 아쉽다.
타패게이트에는 에코투어리즘이라는 걸 표방하며 나이트 런 행사장이 열렸다. 우리나라 트로트 가수 같은 옷을 입고 노래를 하는 남자 가수가 와서 공연을 하고 형형색색의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무대 앞에서 열광하며 공연을 즐긴다. 페이스페인팅 하는 곳이 있길래 줄을 서서 기다려서 한쪽엔 태국 국기, 한쪽엔 형광색으로 별을 그려달라고 했다.
아줌마는 내가 하는 동안 다 기다려 주고 곳곳에서 사진도 찍어 주었다. 알고 보면 우리 엄마 나이 보다 세네 살 정도 어리고 나도 아줌마 아들 또래여서 엄마 뻘인데 운동을 많이 해서 근육질이고 체력이 좋아서 그런지 그렇게 나이 차이가 안 느껴진다. 영어도 잘해서 지역 사회 속으로 들어가 섞이고 젊은 여행자들하고도 잘 섞이며 생각과 문화 등을 나눈다. 영어를 잘하면 중년 이후의 삶이 더 풍성해질 것 같다. 한국어를 쓰는 사람이 아닌 문화권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섞이면서 이해의 폭도 더 넓어지고 더 새로운 것에 노출될 기회도 생기고 재밌을 것 같다. 아줌마는 자기의 k-drama 역사를 말하면서 자기가 본 드라마 속에서 쓰는 언어를 쓰는 한국인인 나와 대화를 하고 자신의 감상을 나눈다. 아줌마는 이병현과 강하늘, 박서준을 좋아했다. 주몽부터 올인, 풀하우스 같은 옛날 드라마도 봤다고 하면서, 내가 몇 가지 드라마를 추천해 주는데 이미 봤다는 것도 있어서 신기했다. 내가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을 추천해 주니 자기 김고은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빗방울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니 대회 주최 측은 무료로 우비도 나누어 주었다. 나는 연보라색을 골랐다. 등록을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무료로 물과 음료를 주었고 끝나고는 수박, 파인애플과 같은 과일도 갖다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수박은 즉석에서 썰어주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세 번을 먹었다. 마라톤 대회에 처음 참가해 보는데 너무 평화롭고 조직적이었다. 시작할 때 폭죽을 터뜨려주는데 너무 신났다. 통제된 도로를 따라 경찰차와 오토바이가 계속 엄호해 주고 5k와 10k의 길 구분이 잘 되어있다. 중간중간 대포 카메라가 사진을 찍어주는데 사진인지 동영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미스코리아라도 된 양 카메라와 박수 치며 환호해 주는 시민과 여행자들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알고 보니 사진은 나중에 돈을 내면 내 얼굴이 나온 사진을 열람하여 다운로드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폭죽을 쏘며 타패게이트의 황토색 벽돌색 길을 따라 신나게 출발하였다. 한 번도 이런 러닝에 참가한 적이 없어서 5k가 어느 정도로 힘든지,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감이 안 왔다. 미리 입간판에 인쇄된 지도를 보니 올드타운의 안팎을 따라 뛰는 것인데 여차하면 집으로 가는 길로 빠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줌마는 허리를 다쳐 천천히 가겠다고 했고 나도 슬로우 조깅을 하기로 했다. 그러다 내가 조금 뛰어 보기 시작했고 아줌마랑은 멀어졌다.
현지인들이 대다수인데 가끔 나와 같은 외국인도 있었다. 뛰다가 보니 비가 와서 그런지 습하고 꿉꿉하다. 머리까지 다 땀에 젖어서 올백머리가 되었고 헉헉대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엔 물을 주는 것을 마시다가 가방에 넣었는데 무거워져서 후회하고는 다음엔 아깝더라도 몇 모금 마시고 조금 걸으면 나타나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나중에 도착해서 수박 먹고 있는데 현지인 아줌마가 자기가 나랑 중간에 같이 대화하고 달렸었던 사람이라며 셀카를 같이 찍자고 했다. 앞을 달리면서 얘기하기도 하고 다 비슷비슷하게 생겨서 누가 누군지 모르겠다.
혼자 뛰라고 하면 반드시 중도 포기 했을 텐데 같이 달리니 남다른 걸 처음 느껴본다. 여러 사람을 제치면서 달리는 희열이 있기도 하고 한 무리를 보내고 또 다른 무리와 뛰면서 도전을 이어나가는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올드타운을 따라 뛰면서 보는 빈티지한 벽돌들은 평소에 바이크를 타고 다니면서 보던 것들이다. 로띠도 팔고 음료수도 팔고 야시장도 지나가는데 엄청 유혹이 된다. 사람들이 힘내라고 박수를 쳐주고 응원을 해주니 너무 고마워서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나중에 뛰는 사람들을 보면 크게 응원을 해 주어야겠다.
나 비록 패션 조거지만
긴팔 긴다리 휘저으며
껑충껑충 뛰며 골인했다!
목마르고 지친데 어느새 시작했던 지점과 비슷한 풍경이 멀리서 보이면서 와, 이제 다 온 거야? 하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와 러닝 이거 도파민이 장난이 아니구만? 도착 지점에 다가갈수록 흥분이 과해지면서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너무 기뻐서 내 인생 최대의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이걸 해내다니, 내가 이걸 해내다니!!!!! 나중에 받은 사진을 보면 중간 지점쯤 지쳐서 쩔어있는 표정 가득하고 골인 지점엔 저세상 희열이 담겨있어서 그 엄청난 대비에 너무 웃음이 났다. 골인 지점에서 누군가 나를 찍어줄 것이라고도 생각을 못했다. 뛰고 난 뒤에 흥분감과 성취감이 엄청나서 다음에 캠퍼스러닝 행사에 지원해서 또 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수박을 먹으며 아줌마를 기다리는데 내가 아줌마를 한참 앞섰는데 10분도 차이가 안 났다. 아줌마가 확실히 운동을 잘하니 나중에 금방 따라 잡혔나 보다. 아줌마와 그냥 헤어지기 아쉬워서 미슐랭 로띠 트럭까지 산책 삼아 걸어갔다. 한국 갈 일이 얼마 안 남아서 여기까지 온 김에 먹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숙소도 걸어서 금방이라며 같이 가 주었다. 오후 6시 이후에 연다고 쓰여 있어서 밤에 이곳을 올 일이 없었는지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트럭이 문을 닫아서 못 먹었다. 그런데 밤에 조명 켜진 이 거리가 낮과는 달리 엄청난 분위기를 가졌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찍었던 아르바트 거리 느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