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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석사논문- 80페이지짜리 인생 첫 창작물

by 모네

방학부터 5개월에 걸쳐 석사 논문을 완성하였다.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모두 해소되어 드디어 퇴고를 하는 날이 오는구나, 하고 잠시 회한에 젖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뿌듯했다. 존경스러운 선배 연구자들인 교수님들이 논문 심사 위원으로 나의 논문에 기재되어 있다. 생소하면서도 기쁘다. 드디어 온전히 나의 생각과 힘으로 쓴 나의 첫 창작물이다.


물론 재직중일 때 80페이지 분량의 실적 보고서를 작성한 적은 있다. 계획 수립부터 최종 작성까지 총괄자로서 담당하였지만, 구체적인 세부 추진 할당과 실행은 각 부서를 통해 지사에서 수행하였고, 성과 도출 과정을 작성한 초안을 받아서 작성하였기에 오롯이 나의 창작물은 아니었다. 실적을 입증할 자료는 별개로 취합하여 제출하여야 했지만 참고자료 및 인용에서는 자유로웠다. 그래서 잘한 타 기관의 작년도 보고서의 내용을 벤치마킹하여 녹이기도 한다. 다른 기관의 아이디어를 베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좋은 것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좋은 프로그램이 전파되는 순기능을 한다. 자신의 기관의 것이 모델이 되어 다른 곳에서 따라 한다면, 원 모델의 경우 다음에 모델 전파 실적으로 엮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석사 논문 수준이지만 논문을 작성하면서 온전한 나의 생각과 글로 표현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를 깨달았다. 처음에 진입 장벽으로 느꼈던 통계 프로그램은 오히려 시간이 걸리지 않고 수월했다. 챗 지피티가 없던 시절은 통계 프로그램 사용법부터 많은 방법론 책을 읽고 섭렵하여야 했을 것 같은데, 요즘은 챗 지피티가 어떤 버튼을 누르고 어떤 체크 표시를 해서 통계를 돌려라, 하는 순서를 자세하게 알려준다. 너의 논문 설계에는 일반회귀모형을 돌리면 된다, 프로세스 매크로 모델 몇을 돌리면 될 것이다, 하고 간단하게 알려주며, 이것이 괜찮은지는 비슷한 논문 서너 개를 열어봐서 확인해 보면 된다. 그리고 결과 분석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이를 바탕으로 그래프를 그리는 것까지 쉽게 알려준다. 수업시간에 stata만 배워서 spss 프로그램은 처음인데 친절한 챗 지피티가 없으면 졸업을 못할 뻔했다.


요즘 수업 듣는 교수님이 논문은 주제 발견이 70%라고 할 정도로 논문 작성에는 막상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다. 내가 왜 이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얼마나 흥미롭고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주제인지, 학문의 논리적 간극을 메우며 기여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3학기에는 최근 3년간 국내외 주요 학회지의 논문을 200편 넘게 읽으며 나의 관심을 충족하면서도 학문적 가치가 있을만한 아이디어를 찾아 탐색했다. 국내 대학원이라도 영어 역량이 중요한 것이, 국내 영어 자료로 검색해야 더 넓은 바닷속의 다양하고 번뜩이는 논문들을 접할 수 있다. 학우들 중에 입학을 위해 필요한 텝스 점수를 간신히 넘은 사람들도 있는데, 이들은 영어 논문 하나도 전문을 지피티에게 맡겨 번역하며 읽어 시간이 오래 걸리며, 그래서 영어 논문 읽는 걸 기피한다. 극단적으로는 한국 논문만 읽고 논문을 작성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한 80%가 영어 논문 인용이고 대충 쓱 결론만 읽고 인용한 것이 아니라 선행 연구 하나하나를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읽고 취지를 파악하고자 했다. 선행 연구의 한계와 시사점을 꼼꼼히 반영하여 연구모형을 설계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더 균형 잡힌 시각에서 새로운 가설을 도출했던 것 같다.


치앙마이에 거주하는 동안 한 달 반은 선행연구를 읽었고, 나머지 반은 20페이지가량의 초안을 작성하고 남은 시간은 휴식을 취하고 여행을 했다. 나의 연구에 부족함이나 오류들이 발견될 수 있겠지만 선행연구 읽는 것을 대충 하지 않은 성실함이 후회로 남지 않은 대목이었다. 물론 4-5개월 동안 매일매일 여러 시간을 투입하여 오롯이 논문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누워서 뒹굴뒹굴하고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많았다. 쉬는 동안 <피지컬 아시아>, <굿뉴스>, <더 리크루트 시즌 2>, <크라임씬 제로>, <다 이루어질 지니>, <어느 날 월터 형제들과 살게 됐다>, <84제곱미터>, <블랙도브>, <옥 씨 부인전>, <홈랜드 전 시즌> 등의 작품을 즐겼고 한낮에 서너 명 있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백수의 특권이었다.


이제 드디어 최종 심사를 위해 논문 제출 버튼만 누르면 되며, 나의 황금 같던 2년 간의 석사휴직 시간은 막을 내리고 있다. 나이도 두 살 먹었다. 이제 비문학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문학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백수지만 큰맘 먹고 책을 두권 주문했다.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이란 책과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이라는 책이다. 회사에 다니면 교보문고에서 책을 무료로 살 수 있어서 사놓은 책부터 읽고 복직하면 사려고 했는데 문화상품권 한 장이 생겼고, 치앙마이에서 큐알 결제를 많이 했더니 뭐에 당첨되었는지 네이버페이에 만원이 들어왔다. 사고 싶었던 책의 목록에서 내가 좋아하는 알베르 카뮈와 새로 알게 된 작가의 책중 챗 지피티와 나의 취향을 반영해 추천해 준 한 권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제 다시 회사로 돌아갈 때까지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먹고 집 근처 카페에 나와 책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 삶을 즐기고, 회사에 돌아가기 전에 마지노선으로 남겨둔 4백만 원 정도를 활용해 마지막으로 장거리 여행을 할 계획이다. 모로코를 생각 중인데 아직 어디로 떠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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