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고 지적인 사람에게 동기를 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내가 오늘 상담사님에게 “민성씨는 동기가 없어.”라는 말을 해 나의 도피처를 생각해 본 것이다. 솔직히, 나는 매우 단단하고 안전한 땅 깊이의 벙커를 가지고 있다. 그 우아하고 지적인 스터프들이 가득한 방에서 나는 삶을 지속시킬 가족들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이런 동기가 없다는 헛소리나 하는 글을 쓴다.
과거에는 달랐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실제로 그랬다. 쥐구멍을 계속 파들고가면서, 샹들리에도 달고, 스피커도 탄노이로. 도피가 가능한 핍박받는 자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지 않는다. 쥐구멍에 가끔 사람들을 들이고, 내보낸다. 이 시골쥐는 분당촌놈이라, 좁은 시야로 세상, 사람을 재단한다.
강릉에서 고양이들과 페로니 맥주를 마시며 말을 했다. 나는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왜?”
“놀잖아, 먹고, 누나들이 예뻐해주고.”
“너네.”
나는 쥐구멍으로 숨고 싶어진다.
동기가 없다. 문제가 뭘까. 왜 난 동기가 없나? 타고난 승부욕 없음, 물질적 풍요, 다양한 조건의 갖춤. 등등이 있겠지. 이제는 뉴진스도 레지스탕스 스크럽을 짜는 세상이다. 나는, 바라는게 없다. 그것은 문제다. 바라는게 없으니, 세상을 살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허무주의, 니힐리즘에 빠져 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왔다. 사랑은 집어쳤다. 아마 그 괴물은 나를 뱉고 쓰다 삼킬 정도의 위인 그 이상은 아니다. 살고 싶지 않다… 며칠 전 누군가 내가 눈이 매우 맑다 했다. 그리고 내가 해탈한 사람 같다고 웃었다. 나는 내가 매우 탁한 사람이며, 해탈이라기 보단 포기란 면에 더 가깝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설명할 동기가 없는 나는 말 끝을 흐린다. 그녀를 납득시키고싶지도, 고양이가 되고 싶지도, 초인이 되고싶지도 않다. 세계는 나에게 가혹한데, 그렇다고 말을 못하는 나는 고양이가 되어서 “야옹” 만 하며 살고 싶다. 고양이에게 동기가 무슨 소용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