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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Mar 29. 2019

공주님 구하기

박찬욱 <아가씨>

 

 우리는 구원을 갈망한다. 우리가 체험한 최초의 구원은, 부모로부터의 무조건적 사랑과 보살핌이었을 것이다. 부모의 보살핌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후에, 우리는 최초의 구원과 닮아 있는 구원을 기다리게 된다. 종교, 성공, 혹은 사랑의 얼굴을 한 구원을 기다린다. 마치 성 꼭대기에 혼자 사는 공주님처럼. 그리고 수많은 작품들은 우리의 갈망을 반영한다. 영화 <아가씨> 또한 마찬가지이다. 부잣집에 살지만 이모부의 학대와 협박에 고통 받는 히데코(김민희 분) 가진 것 없는 하녀 숙희(김태리 분)에게는 구원이 필요하다. 백마 탄 왕자님 따위가 아니라, 이전의 삶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날 완벽하고도 확실한 구원.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 구원자가 필요하다.


 영화는 한 여자가 하녀가 되기 위해 저택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비는 쏟아지고 여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길을 떠난다. 여자는 도착한 저택에서도 하대를 받고 침실 대신 벽장에서 잠자는 신세다. ‘아, 불쌍한 여자’ 라는 생각을 관객들이 할 즈음, 장면이 전환되고 여자의 나레이션이 깔린다. “당신은 나를 타마코, 불쌍한 조선인 하녀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 진짜 이름은 남숙희다.” 그렇다. 숙희는 불쌍한 여자가 아니었다. 숙희는 후지와라 백작(하정우 분)과 손잡고 아가씨를 등쳐먹어 큰돈을 손에 넣으려 저택에 잠입한, ‘나쁜 년’이었다.


 진짜 불쌍한 여자는 저택의 아가씨 히데코였다. 영화의 1장은 히데코의 가련함을 보여준다. 저택에만 갇혀 생활하고 친구 한 명 없는 히데코. 재산을 노리는 이모부(조진웅 분)의 아내가 될 신세인 히데코. 세상 물정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불행하고 아름다운 히데코. 숙희는 나쁜 년이었지만, 이런 히데코의 가련함과 아름다움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지껏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힌 것 중에, 이만큼 이쁜 것이 있었나?” 숙희는 아가씨와 함께하기쁨에 도취된 나머지 아가씨에게 배신당하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만다. 아가씨에게 배신당했음을 깨닫는 1장의 마지막, 숙희는 말한다. “우리 이즈미 히데코 아가씨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그분은 처음부터 그냥, 나쁜 년이다.”


 그렇다. 숙희와 히데코는 모두 ‘그냥 나쁜 년’들이었다. 이 지점에서 박찬욱은 ‘구원의 조건’처럼 여겨져 온 ‘착하고 온화한 (혹은 수동적인) 성정’을 박살낸다. 숙희는 도둑질과 사기로 연명해 온 쥐새끼 같은 년이고, 히데코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쥐새끼 같은 숙희를 속여 넘긴 천하의 썅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겐 구원이 필요하고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


 1장이 구원 이전의 삶을 보여주었다면, 2장과 3장은 두 나쁜 년들이 어떻게 구원 받고 그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는지 보여준다. 2장은 히데코에게 가해져 온 이모부의 폭력을 고발한다. 폭력은 처음에는 히데코의 이모(문소리 분)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탈출을 감행한 이모는 붙잡혀 죽임 당해 벚나무에 매달리게 된다. 그리고 폭력은 대물림되어 히데코를 향하게 된다. 히데코는 이모부가 부른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음란한 소설을 낭독하도록 강요당한다. 소설 속 여성은 인격체가 아니라 남성의 욕망과 환상에 의해 파편화된 육체이다. 히데코는 그런 소설을 낭독할 뿐 아니라 소설 속 체위를 남성들에게 직접 보여주도록 강요당한다. 도망칠 수는 없다. 도망쳤다간 이모처럼 이모부의 지하실에서 죽임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모부로부터 히데코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남성으로부터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 확장된다. 남성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도구화, 파편화되는 여성은 히데코만이 아니다. 이모부가 원할 때에는 그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지만, 평소에는 ‘자지, 보지’와 같은 말을 입에 담기만 해도 매를 맞는 히데코의 모습은 남성 중심주의 사회 속 여성의 위치를 그대로 보여준다. 또, 이모-히데코로 이어진 폭력의 대물림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억압받아 온 여성 역사의 압축판이다. 이러한 폭력의 역사를 끝내고 히데코를 구원하는 것은 누구일까?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쥐새끼같은 하녀, 숙희다.





 자신의 품속에서 아가씨를 보듬는 기쁨에 도취되어 있던 멍청한 숙희는 결국 아가씨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살을 기도하는 히데코를 ‘구해주며’ 히데코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후지와라 백작과의 계략을 모조리 털어놓는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히데코는 숙희와 손을 잡고, 숙희는 후지와라 백작을 속이기 위해 히데코에게 배신당하는 연기를 한다. 이모의 시체가 매달려 있던 벚나무에서 히데코가 숙희에 의해 자살을 실패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어린 시절 벚나무에 매달린 이모의 시체를 본 히데코의 마음에, 벚나무는 ‘희생의 공간’으로써 침전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귀환되어 히데코는 자신을 대물림된 폭력의 두 번째 희생자로 상정하고 벚나무를 죽음의 장소로 택한다. 그러나 숙희가 히데코의 몸을 붙잡음으로써 자살은 실패한다. 숙희는 히데코의 목숨을 구하고, 일평생 도구화된 육체로서 살아온 히데코를 한 인간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함으로써 그녀의 인생을 구원한다. 또 이 순간은 히데코에 의한 숙희의 구원이기도 하다. 언제나 남의 것을 훔치고, 필요하면 남의 이름으로 살아온 숙희가 처음으로 (사랑의 관계 속에서)‘소유하게 된’ 인간이 히데코인 것이다. 또, 언제나 사기를 치며 살아온 그녀의 거짓 삶은 히데코에게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구원 받는다.


 서로를 구원한 두 여자는 3장에서 지금까지 받아 온 억압을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써 구원을 완성한다. 먼저 그들은 히데코가 남자들 앞에서 읽어 온 음란한 소설들을 파괴한다. 그냥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담아 찢고, 물에 담그고, 먹물로 훼손한다. 또, 히데코가 자살하기 위해 지니고 다니던 독약을 후지와라에게 먹여 재우는 장면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폭력이 피해자의 죽음(자살)이 아닌 가해의 중단(독약을 먹고 잠드는 바람에 히데코를 강간하지 못하게 되는 후지와라)으로 종식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바지를 벗고 추하게 잠든 후지와라 백작은 히데코가 두려워하던 ‘이모부의 지하실’로 끌려간다. 지하실에서 이모부에게 손가락을 잘리고, 성기까지 잘릴 위기에 처한 후지와라는 결국 수은 담배를 피워 이모부와 자신 모두 질식사하는 길을 택한다. “그래도 자지는 지켜서 다행이다” 라는 후지와라의 마지막 대사에는 성기로 대변되는 남성의 권위의식에 대한 조소가 담겨 서사를 더욱 통쾌하게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히데코와 숙희의 섹스를 담았다. 히데코가 이전에 낭독했던 소설 속 두 여성의 섹스와 똑같이 은령을 사용하는 섹스였다. 히데코의 내면에서 ‘은령’은 폭력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을 테이지만, 은령을 이용해 섹스하는 히데코는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다. 남자들 앞에서 대상화되던 히데코는 은령을 사용한 섹스 소설을 읽었지만, 욕망의 주체가 된 히데코는 정말 사랑하는 숙희와의 섹스에서 은령을 직접 ‘사용한다.’ 이는 폭력의 도구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되찾아 온 일종의 ‘전유’이다. ‘전유’는 박찬욱이 이 영화의 제목을 통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젊은 여성을 일컫는 낱말 ‘아가씨’는 남성 중심적 문화에 매몰되어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쓰이곤 했다. 그러나 이 영화 이후, ‘아가씨’라는 낱말은 서로를 구원한 두 나쁜 년들, 두 공주님들의 이야기로 전유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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