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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Jun 10. 2021

여름에 추천하는 책

성장과 사랑

1. 빨강의 자서전 / 앤 카슨, 한겨레출판 

그리스 신화 속 헤라클레스와 게리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소설이다. 신화 속 헤라클레스는 빨강 섬의 괴물 게리온을 죽이고 그의 소떼를 훔쳐 오라는 과업을 부여받는다. 소설은 헤라클레스가 아닌 게리온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며,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이 사랑한 아름다운 청년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 게리온은 신화 속의 흉측한 괴물이 아닌 외롭고 힘없는 소년이다. 등 뒤의 괴물 같은 날개를 숨기고 살아가는 게리온은 헤라클레스와의 사랑을 통해 고독에서 벗어나 따뜻함을 느낀다. 그러나 그 사랑에 온전히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후에는 헤라클레스의 사랑이 없어도 혼자 날개를 펴고 날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서사가 없는 괴물이 주인공이 되어, ‘괴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신만의 특성을 받아들이는 성장담이다.


2.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 마음산책

사랑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소외당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아홉 편을 묶었다. 영국의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저자 라히리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서와 고립감을 이 단편집의 모든 소설 속에 녹여내고 있다. 그러한 고립감은 사랑하는 관계 속에서도 존재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진실을 은폐하게 되고, 그렇게 서로를 진실로부터 소외시키게 되는 것이다. 그 소외감은 사랑의 어떤 면은 폭력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나 이 책이 사랑의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고 철저히 혼자서 살아가라고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살아가려 노력한다. 그들은 사랑이 주는 고독과 상처에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3.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안희연, 창비 

젊음, 성장, 그리고 ‘살아 있음’ 자체에 대한 시집이다. 성장의 과정을 여름에 빗대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은유이나 안희연의 세계에서 ‘여름’은 눈부시고 싱그럽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시집 속 화자들은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 실패하고,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절망하며 몇 번이고 주저앉는다. 시인에게 성장이란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구도자가 스스로 감행하는 고행과 같이 절박하고도 맹렬한 것이다. 그리고 계절이 몇 번 지나가면 여름이 돌아오듯 성장 또한 일평생에 걸쳐 되풀이되는 고통이다. 시인은 그러한 고통의 시간에 이유를 질문하기보다는 그 모든 시간을 사랑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자라난 슬픔들을 여러 그루의 나무들로 여기며 슬픔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긍정한다.


4. 여름의 빌라 / 백수린, 문학동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소설가 백수린이 지면에 발표한 단편 소설 여덟 편을 묶었다. 결핍 없이 완전해 보이는 사람들의 위선과 균열을 섬세하게 관찰한 소설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백수린의 작품세계는, 완벽해 보이는 대상에서 흠결을 찾아내고 비판하거나 조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흠 잡을 데 없는 저택이 사실은 폐허라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도 그 폐허 위에 새로운 집이 지어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표제작 ‘여름의 빌라’는 한국인 부부 주아와 지호가 독일인 부부와 함께 시엠레아프를 여행했던 일을 주아의 시점에서 회상하는 편지로 진행된다. 주아는 독일인들의 위선에 염증을 느꼈으나 그들과 자신 모두 아픔이 있었음을 깨닫고, 폐허에서도 끝까지 살아남는 것은 폭력이나 갈등이 아닌 생명과 화해임을 이야기한다.


5. 내가 아니라 그가 나의 꽃 / 이원하 , 달 

한 편 한 편이 서정시와 같은 에세이집이다. 수록된 모든 글들은 어떤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자의 마음에 대한 에세인데, 모두 구체적인 시간성이 떼어내진 채 우화처럼 진행된다.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산문에서 잘 쓰이지 않는 은유로 표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생경한 경험을 하게 이끈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부드러운 ‘해요체’로 풀어내는 글들은 언뜻 관습적인 여성성을 표방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사랑 속에 숨어 있는 섬뜩한 맹목이나 음흉함은 독자들의 상식을 여러 번 전복한다. 한정적인 장소만을 배경으로 하지만 풍부한 언어만으로 서술자는 자유롭게 온 세상을 누빈다. 책은 서술자가 낯선 곳으로 삶을 개척하겠다는 다짐으로 끝맺는데, 독자들에게는 이 책 자체가 하나의 낯선 장소이자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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