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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Mar 01. 2020

변화함으로써 존재하기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said the Cat.

"I don't much care where-" said Alice.

"Then it doesn't matter which way you go," said the Cat.


 어디로 가야 하나요? 소설 속 앨리스가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체셔 고양이를 비롯한 이상한 나라의 친구들은, 앨리스에게 어디로 가라는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는다. 그들은 앨리스의 말꼬리를 잡고, 말장난을 하고, 앨리스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다. 자신이 원래 속해 있던 세계, 가정과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낯선 곳을 헤매는 앨리스의 모습은 이제 막 어른의 문턱을 넘으려 하는 사춘기 청소년 같기도, 혹은 사회에 갓 발을 내딛는 청춘 같기도 하다. 앨리스는 혼자 주저앉아 울기도, 그런 자신을 타이르기도 하며 낯선 세계를 모험한다. 모든 것이 이상하다고 불평하는 대신,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very few things indeed were really impossible, 44p)며 열린 마음으로 말한다. 앨리스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고민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알지 못할 때에도 모험을 계속한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딘가에 예쁜 정원이 있을 거라고 믿고 그곳을 향해 가지만 수도 없이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하냐는 질문에 친절하게 답변해주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해서 가던 길을 간다. 마치 앨리스처럼.


 ‘어디로 가야 하나요?’ 라는 질문은 사실 ‘내가 누구인가요?’ 라는 질문과도 같다. 내가 향해서 가야 할 곳, 나의 목적지, 나의 방향이 곧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앨리스는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고정된 하나의 답변을 원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을 즈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만일 존재하더라도 그 대답은 수천 수 만 가지일 것이지, 결코 단 하나는 아니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앨리스’라는 앨리스의 믿음은 이상한 나라에서 몇 번이고 시험 당한다. 잘 외우던 시를 잊어버리고, 키가 갑자기 자라고, 다시 줄어들고, 뱀처럼 목이 길어지기도 하며 앨리스는 그녀가 ‘앨리스’라는 증거들을 자꾸만 잃어버리게 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모험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게 행동하며 앨리스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그들은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 그것도 모자라 앨리스의 상식을 비웃기까지 한다. 앨리스가 정답이라고 믿어 온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동물들과, 아무런 규칙이 없는 엉망진창의 경주, 아기를 돼지라고 부르는 부인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앨리스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이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사실 저자가 의도한 바가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가 정답이라고 믿어 온 모든 것들이 사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 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것은 세계뿐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어떤 시를 잘 외우고,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잘하는지와 같은 속성으로 앨리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상한 나라에서의 앨리스는 그 모든 속성을 잃어버린다. 그렇다면, 이제 앨리스는 앨리스가 아니게 되는 것인가? 시를 똑바로 외우고 키가 여느 소녀들과 비슷한 앨리스만이 진짜 ‘앨리스’인가? 그렇지 않다.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이다. 시를 못 외우고 목이 길고 키가 지나치게 크거나 작아도, 앨리스는 여전히 앨리스이며 낯설고 이상한 모습들 또한 모두 그녀의 일부인 것이다. 앨리스를 ‘앨리스’로 만드는 필연적인 속성 같은 것은 없다. 체셔 고양이의 웃음과 고양이의 존재가 따로 존재할 수 있듯이, 속성은 그 자체로서 존재를 말해주지 못한다. 다만 그것들은 다양한 형태로 누적되어 한 존재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 속에 숨어 있던 수많은 얼굴과 마주하고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이 아닌,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이 ‘Who am I?’ 라는 앨리스의 질문에 대한 캐롤의 답변이다. 


"Then it doesn't matter which way you go," said the Cat.


 책에는 끊임없이 넌센스와 언어유희가 등장한다. 이상한 나라의 동물들은 젖은 몸을 말리기 위해 ‘건조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가주어 it의 지시 대상을 찾고, 대구(whiting)로 구두를 닦는다고 주장한다. 주목해야 할 점은, 아무 논리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넌센스에도 나름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령, whiting(대구, 구두약) does the boots and shoes(140p) 라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우리가 절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들에도 나름의 논리와 질서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이는 캐롤이 책을 통해 앨리스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맥상통한다. doxa, 즉 우리의 상식과 기존 질서는 한 방향만을 긍정하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이 ‘맞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그러나 캐롤의 넌센스는 한 대상에 깃들 수 있는 모든 의미를 긍정한다. 세계를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아집이며, 우리 또한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정체성이 하나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기호이고 자의성을 띠기 때문에 기표와 기의는 얼마든지 미끄러질 수 있다. 한 단어와 지시 대상에 필연적인 연결 고리가 없고, 이 때문에 언어유희와 넌센스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 또한 언어처럼 필연적으로 따라야 할 길은 없다. 체셔 고양이가 앨리스에게 말했듯, 어느 길을 가든 그것은 그저 우리 마음이며 가고 싶은 곳이 없다면 어디로 가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 앨리스가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앨리스는 앨리스이다. 다른 길을 가고, 다른 모습을 한다고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앨리스의 긴 여정 끝에는 터무니없는 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법의 내용이 아닌 언어로 표현되는 형식만을 중요시하며, 재판보다 형벌을 더 우선시하는 말도 안 되는 재판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형 선고를 남발하는 재판장에서, 앨리스는 이 재판이 엉망진창이라고 용기 있게 말한다. 앨리스는 몸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또 모험의 그 어느 순간보다도 용감해진다. 용감하게 재판의 부조리를 지적하는 그녀에게 카드 병정들이 달려드는 순간, 앨리스는 꿈에서 깨어난다. 앨리스가 부조리를 그렇게 큰 목소리로 비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긴 여정 내내 앨리스는 자신과 세계에 대해서 고민하고 성찰한다. 처음에는 한 가지 모습의 자신, 하나의 목적지만을 찾았지만,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으면서 이내 한 가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는다. 자신의 상식과 맞지 않는 일이 벌어져도 그것을 틀렸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더 이상 겁먹지 않게 된다. 변화무쌍한 스스로의 모습을 그 자체로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 엄격한 교육관 아래서, 앨리스는 언제나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옳고 그름의 구분을 어른이 나서서 해주지 않고, 모든 방향을 긍정하는 이상한 나라에서 판단은 언제나 앨리스의 몫이었다. 함부로 무언가가 ‘말도 안 된다’고 단언하지 않는 열린 마음과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겸허함은 앨리스를 성숙하게 했고, 자신이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용기를 주었다. 우리의 여정 또한 앨리스와 같은 길을 따르게 될 것이다. 나와 세계의 모든 모습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존 질서에 의존하지 않고서 자신의 힘으로 상황을 판단하게 되는 것.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우리의 얼굴을 내 자신의 모습으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이 ‘이상한 세계’에서의 모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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