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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Mar 01. 2020

당신을 정확하게 사랑하는 일*

에드워드 양 <하나 그리고 둘>

    영화는 어느 결혼식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다들 행복해 보이는 결혼식이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신랑의 전 애인은 분노하며 식장에 나타나선 눈물을 흘리며 돌아간다. 또, 유독 피곤해하던 할머니는 결국 그날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겨우 ‘길일’에 잡은 결혼식인데, 하객으로 참석한 가족들과 친지들은 피로연을 즐기다가 난데없이 응급실을 찾아야 했다. 이때 누군가가 말한다. ‘그래도 길일이라 쓰러지시기만 한 거야. 아니었으면 돌아가셨을걸.’ 그 어떤 날도 모두에게 같은 날일 수는 없다. 같은 날 누군가는 결혼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고, 또 누군가는 아마 다시 뜨기 힘들 눈을 감는다. 그 개별적 사건들조차도 온전한 ‘하나’가 아니다. 누군가에겐 행복한 결혼식이 누군가에게는 괴로운 배신의 현장이다. 할머니가 쓰러지신 슬픈 일 또한, 어떤 누군가에겐 그래도 돌아가신 게 아니니 다행인 일인 것이다.

     쓰러지신 할머니는 딸네 집으로 옮겨지고, 그곳에서 아주 깊은 잠을 주무신다. 영화는 잠든 할머니 곁에서 가만히 말을 걸곤 하는 가족들의 일상을 하나 둘 보여주기 시작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영화가 가족들의 일상을 찬찬히 보여주되 아주 먼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풍경 속 어디에 주인공들이 있는 건지 알기 힘들 만큼 멀리서 보여주기도 하고, 그들이 등지고 있는 배경에 초점을 맞추어 보여주기도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는 ‘그 속에 있었다면 보기 힘들 것’에 주목하는 시선으로 주인공들을 따라간다. 이는 막내아들 양양이 아버지에게 던진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아빠, 사람들은 영원히 한쪽 면만을 보고 살아야 하는 건가요?’ 아빠는 그런 양양에게 카메라를 선물하고, 양양은 그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영원히 모르는 ‘또 다른 쪽’을 양양은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마치 양양의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처럼 주인공들을 담는다. 

    영화가 진행되며 가족들은 각자 일탈(그러나 크게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은)을 경험한다. 엄마는 지금까지의 삶이 보잘것없었다며 집을 떠나고, 아빠는 옛 첫사랑에게 흔들리고, 큰딸 팅팅은 친구의 전 애인과 묘한 관계를 맺는다. 이 세상을 흔들진 못하지만 나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일들. 그들은 그 일들로 인해 삶이 뒤바뀔 것이라 믿지만, 결국 일상으로 쓸쓸히 돌아온다. 이유는 모두 같았다.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아서’. ‘모두에게 같은 일’이 존재하지 않듯,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차원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 즉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일’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사진에 명시와 함축이라는 두 가지 메시지가 공존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비단 사진에만 해당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의 삶 또한 한 장의 사진과도 같다. 이곳에는 명시와 함축이 공존하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나의 삶, 나의 세상은 명시의 영역에 해당할 것이다. 집을 떠난다면, 옛 첫사랑을 다시 만나면, 친구의 전 애인이 나를 사랑한다면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이 세상만큼은 변화할 것이라는 믿음. 내 시선과 경험에 입각해서, 내 생각과 계획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착각. 그러나 내 삶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가능성과 우연, 조건, 환경이 함축되어 있고 또 무엇보다 내 삶에는 타인이 들어와 있다. 내 삶 속에 들어와 있는 타인의 세계는 영원한 몰이해의 영역, 함축의 영역, 그리고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뒷모습과 같은 영역일 것이다. 같은 경험을 공유했지만, 자신에겐 사랑이었던 일을 실수로 치부하는 남자에게 상처받은 팅팅은 할머니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묻는다. “왜 세상은 우리 생각과 다른 걸까요?”

    그 함축의 영역에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던 명민한 양양은 어느 날 특별한 경험을 한다. 자신이 몹시 미워하던 소녀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언제나 양양에게 쌀쌀맞은 표정이었던 소녀. 양양은 믿을 수 없게도 그녀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불가해한 세상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배신이나 위험의 얼굴을 하고 어느 날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쌀쌀맞은 표정과 아름다운 뒷모습 중 어느 하나가 ‘진짜’ 소녀의 모습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두 가지가 모여 소녀를 이루고 있고, 둘 중 어느 것도 생략될 만한 것이 아니다. 영화의 제목은 한자 二를 ‘er’이 아닌 ‘yi yi’로 발음한다. 두 개의 획이 모여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따로 놓고 보면 독립된 하나씩의 획이라는 것을 강조하듯이. 우리 삶에 함축된 수많은 것들과 우리 눈에 보이는 ‘반쪽짜리 진실’ 중 어느 것이 진짜 삶의 모습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다만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삶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내 삶이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이 세상에는 뜻밖의 기쁨이나 아름다움도 존재한다고.

    결혼식으로 시작한 영화는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 믿고, 그래서 볼 수 없는 것들을 사진으로나마 찍고자 했던 어린 양양은 잠든 할머니에게 한 번도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음의 키가 자란 양양은 할머니에게 편지를 띄운다. 할머니가 가신 곳과 같이, ‘알 수 없는 것들’을 자신은 더 알아 가고 싶다고. 볼 수 없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다고. 어쩌면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그것을 불가해의 영역에 놔두는 일일 것이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그렇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보기 위해 ‘눈을 감겠다’고 이야기한 팅팅처럼. 내가 보고 싶은 대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세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일. 내 삶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일. 그리고 내 삶을 정확하게 사랑하는 일.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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