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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커트 Mar 01. 2020

교차로의 데지레

미국 문학 작품 속 교차하는 소수자성

Kate Chopin <Desiree's Baby>

Richard Wright <The Man Who Was Almost a Man>


1. 데지레

    대상화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대상화한다는 것은 그가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이(혹은 사회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발화할 권리’를 박탈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발화는 주체적으로 이루어지나 평가는 외부에 의해 행해지기 때문이다. 대상화란 타자화다. 때문에 모든 소수자들은 대상화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 혹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 대해 발화하지 못한다. 발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세상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세상에 의해 다각도로 평가 받고, 그 평가 기준을 충족하도록 ‘욕망된다.’  

    Kate Chopin이 Desiree's Baby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대부분은 ‘데지레’라는 이름에 담겨 있다. Desiree, to be desired, 즉 (타인에 의해) ‘욕망된다’는 뜻의 이름은 데지레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자 당시 미국 여성의 삶을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데지레의 삶은 세 가지 차원으로 분리된다. 발몽드 씨의 딸, 아르망의 아내, 그리고 아르망 아이의 어머니이다. 데지레에게는 데지레 자신으로서가 아니라 저 세 가지의 역할로서의 삶만 주어진다. 어릴 때 친부모에게 유기되어 신원이 불분명한 데지레를 두고 아르망은 ‘she was nameless’라고 표현한다. nameless라는 표현은 그저 신원이 불분명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타인의 욕망 실현의 도구로서만 일평생을 살아간 데지레에게는 죽을 때까지 이름이 없었다.

    아름답고 유순한 데지레는 ‘idol of Valmonde’였다. 모든 백인 아가씨들은 데지레처럼 되어야 마땅했다. 데지레가 갖춘 모든 덕목들이 모든 백인 남성의 욕망 실현의 도구로써 훌륭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유순함 모두 남성이 원하는 아내로서의 덕목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노예제 유지에도 중요한 지점이다. 흑인 노예 제도가 합법이던 당시, 아름답고 유순한 백인 여성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던 백인 남성의 역할과 상호 보완적으로 노예제를 지탱했다. 한 소수자를 대상화하고 착취함으로써 또 다른 소수자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착취한 것이다. 또, 여성의 삶이 ‘백인-남성 중심주의’ 유지를 위해 얼마나 철저하게 도구화되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은 데지레가 아이의 엄마가 된 시점이다. 아이가 혼혈아와 같은 피부색을 보이자 아르망은 데지레가 백인이 아니라고 몰아붙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아이를 사랑한다고 하던 그인데, 그녀가 백인이 아니라는 잠정적 결론만으로 그 사랑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는 데지레라는 인격을 향한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데지레를 아내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백인) 혈통을 물려줄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욕망을 사랑했을 뿐이다. 대상화된 소수자를 향한 ‘너를 사랑해’ 라는 말은 ‘너는 내 욕망 실현에 쓸모가 있다’는 말과 동치이다. 아르망의 얄팍한 ‘사랑’은, 자신의 욕망 실현에 쓸모가 없어지니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발몽드 가의 우상과도 같던 데지레, 아르망의 완벽한 아내였던 데지레는 흑인의 피가 섞인 것 같은 아이를 낳는 시점에서 좋은 ‘어머니’의 소임은 다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녀는 아르망이(혹은 사회가) 제시한 세 가지 평가 과목 중 하나에서 낙제했다. 그런 그녀의 삶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평생을 타인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간 데지레는 느닷없이 백인이 아니라는 의심을 사고 남편과 갈라선다. 수행할 타인의 욕망은 사라졌고 당시에는 인간 이하였던 흑인의 삶만이 기다리고 있다. 데지레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데지레는 태어난 적도 없었던 사람이다.


2. 데이브

    사람은 누구나 보이는 것 이상을 쉽게 상상하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폭력만을 경험한 사람은 폭력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지 못한다. 폭력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며 자신이 살아남으려면 그 누구보다 강한 폭력을 휘두를 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폭력이 폭력을 낳는 이유이다. Richard Wright의 단편 ‘The Man Who Was Almost a Man’의 주인공 데이브는 폭력 속에서 살아온 흑인 소년이다. 그러나 데이브의 소원은 그 폭력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다. 폭력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그의 소원은 총을 갖는 것이다. 누구보다 더 강한 폭력의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17살 소년 데이브의 삶은 녹록치 않다. 그는 하루 종일 일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당하고 아버지의 매질을 견딘다. 주목할 만 한 점은 흑인인 데이브를 괴롭히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그와 같은 흑인이라는 점이다. 데이브에게 가장 심한 폭력을 휘두른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 흑인인 아버지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일평생 착취한 백인 지주에게는 더없이 비굴하고 순종적이지만, 집안의 아내와 아들에게는 사정없이 매질과 폭언을 일삼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바로 폭력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이 낳았고 폭력을 낳은 폭력의 아들이자 아버지이다. 

    소설은 노예 해방이 이루어진 1865년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흑인들의 삶은 노예제가 시행될 때보다 특별히 나아진 것이 없었다. 제도의 변화가 인식의 변화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드러나는 관계만으로도 알 수 있다. 데이브의 아버지는 왜 백인 호킨스 씨의 눈치를 그렇게까지 보는가. 그들은 왜 죽도록 일하는데도 가난하고 불행한가. 사회는 흑백을 분리하고 각자에게 어울리는 소임이 있음을 주장한다. 노예제의 폐지는 다만 흑인이 맡을 소임이 노예는 아니라고 정정했을 뿐,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흑인이 맡을 소임은 결코 백인만큼 고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흑인들은 합법적으로 착취당하고 소외당했다. 이 기본적인 전제는 노예제의 폐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자의적인 논리에 의해 흑백을 ‘분리’ 하고, 흑인(을 비롯한 비-백인)을 ‘대상화’ 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사회가 가진 권력이고 구조적인 폭력이다. 데이브의 아버지를 비롯한 모든 흑인들은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였다. 일평생을 폭력 아래 살아간 아버지는 그 폭력을 대물림한다. 사회에 나가서는 모두에게 무시당해도 나라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미천한 흑인이지만 집에서만큼은 폭군 행세를 해도 된다. 그는 사회가 그 자신에게 그러했듯 아내와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 아래에서 데이브는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총이었다.

    데이브가 생각하기에 총은 권력의 결정체이다. 한 번이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토록 원하던 총을 손에 넣은 데이브가 쏘아 죽인 것은 누구였을까. 노동력을 착취하는 호킨스 씨? 자신을 때리던 아버지? 그가 쏘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늙고 지친 노새였다. 이는 폭력이 대물림되는 양상과 매우 유사하다. 폭력은 먼저 자신을 해친 쪽으로 흐르지 않고 그저 더 약한 쪽으로 흐른다. 데이브가 일만 하다 죽은 노새와 자신의 신세가 비슷하다고 느끼는 지점도 의미하는 바가 많다. 데이브의 아버지와 데이브 또한 비슷한 신세이기 때문이다. 노새가 데이브에게 그러했듯, 데이브 또한 아버지에게 같은 처지를 공유하는 동지일 수 있었다. 어쩌면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데이브는 실수로 노새를 쏘아 죽였고 아버지는 데이브를 때렸다. 데이브는 ‘자기 자신인’ 노새를 죽였다. 아버지 또한 데이브를 때리면서 스스로를 죽인 것이다. 데이브는 결국 총알을 낭비하고 빈 총을 들고 도망친다. 그러나 누구를 쏘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소년이 어디로 도망쳐야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3. 블랑슈

    데이브와 데지레의 삶은 어디가 다르고 어디가 비슷한가. 각자의 삶,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이 만나는 교차로는 어디인가. 사실 데지레와 데이브를 억압하는 지배층의 논리는 같은 것이다. 백인 남성에게는 있는 ‘이성’이 여성이나 흑인(비-백인)에게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자는 이성이 없고 따라서 열등하기 때문에 백인 남성의 아이를 낳아 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흑인 또한 같은 논리로, 노예나 할 것 같은 단순 노동만이 그들에게 어울리는 일이었다.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권력에는 여성과 흑인 모두 같은 목소리로 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단일한 것이어야 할까.

    데이브와 데지레, 그들보다도 더 발화할 권리를 완벽하게 박탈당한 채 살아간 인물이 있다. ‘Desiree's Baby’의 흑인 여성 노예 블랑슈이다. 블랑슈는 데지레와 데이브의 고통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다. 백인 여성이 ‘순결한(성욕이 없는)’ 존재로 대상화된 반면, 흑인 여성은 짐승과도 같이 성욕이 왕성한 존재로 대상화되었고 성폭행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없었다. 아르망의 아이를 몇 명씩이나 낳았다던 블랑슈 또한 그 아이들을 자신의 의지로 낳았는지 알 수 없다. 작품 내내 블랑슈는 아르망의 암묵적인 정부처럼 언급되었지만, 블랑슈의 대사는 단 한 마디도 없다. 블랑슈의 발화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똑같이 아르망의 아이인데도 데지레의 아기는 침대에서 잠을 자고 블랑슈의 아이는 그 아기를 위해 부채질을 해 준다. 데지레가 나가라고 지시하면 군말 없이 그렇게 한다. 

    성폭행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없는 블랑슈의 고통은 아마 데이브가 이해하기엔 힘든 일일 것이다. 자신의 아이가, 같은 아버지의 다른 아이를 위해 부채를 부쳐주는 고통을 데지레가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데지레의 고통, 데이브의 고통, 그리고 블랑슈의 고통은 같은 지배 체계 내에서 발생하는 것인데도 각자 다르게 가지를 뻗어 나간다. 소수자는 모두 대상화되고, 대부분 대물림 된 폭력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이 완전히 같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들을 억압하는 하나의 논리 구조에 대항할 첫걸음이 될 것이다. 사실 데지레와 데이브, 그리고 블랑슈는 1800년대 미국에서만 존재했고 이젠 사라진 이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대상화되고 폭력 아래 살아간다. 그것을 끊어낼 힘을, 교차로에서 찾아야 한다. 그들의 고통이 각각 다른 형태로 뻗어져 나가는 지점은, 뒤집어 말하면 ‘타인의 것’처럼 보이던 낯선 고통이 내가 느껴온 고통과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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