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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Jan 23. 2021

신이라도 된 것 마냥 구는 당신.

5.

동물학대를 멈춰주세요.


동물병원에는 하루에도 몇십 명의 환자들이 방문한다. 쓸개골이 탈구돼서 수술을 받으러 온 아이도 있고, 정체불명의 이물 때문에 내시경을 받기 위해 온 아이도 있고, 종양의 삼태가 심각해 호흡곤란으로 내원하는 아이도 있다. 제각각의 이유로 병원을 방문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오는 보호자의 마음만은 똑같을 것이다. 사실, 근무하기 이전에는 동물병원에도 이렇게 많은 환자들이 내원하는지 모르고 지냈었다. 동물을 키워본 적이 없어 평생 가보질 않았으니 얼마나 많은 증상이 있고,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병원을 찾는지 알 수 조차 없었으니 이 분야에서는 완전히 무지했었던 셈이다.


오늘은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가 입원을 했다. 증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후유증이 염려된 당분간 병원에 입원해있기로 했다. 내 역할이 담당 수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얼마나 다쳤는지 어떤 후유증을 달고 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입원실 안에 링거를 꽂은 채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면 괜히 마음이 미어지곤 한다. 그런 아이를 잠깐 보고와도 마음이 불편한데 그 공간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치료하는 테크니션 선생님들과 수의사 선생님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어쩌면, 동물병원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보호자의 근심 같은걸 끌어안아 지켜내는 소중한 숙명이 아닐까 싶다. 


동물병원 회진 시간에 슬프면서 즐거운 소식은 바로 퇴원 소식이다. 특히 정들었던 아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동물병원 내 모든 아이들이 소중하고 가엾지만 유난히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있다.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안기기만 하면 떨어지지 않는 아이가 그렇고, 작은 몸체로 병원 여기저기를 제 집인 마냥 활보하고 다니는 아이가 그렇다. 우리 사무실은 꽤나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찾아오기 어렵지만, 가만히 편집을 하고 있다 보면 슬그머니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품 깊숙이 껴안아 주고 싶은 욕구가 넘치지만 행여나 증세가 악화될까 봐 마음으로는 꾹 참고 쓰다듬는 정도로 대신한다.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동물병원이라는 공간이 일의 공간이지만, 어중간한 사랑과 사명감으로는 일하기 어려운 곳임이 분명하다. 주사를 놓다가도 예민함이 폭발해 상처를 내는 아이도 있고, 밥을 먹지 않아 강제 급여를 하는 중에 손가락을 깨무는 아이들도 있다. 물론, 일반인들도 한두 번 정도야 애교 수준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매일 출근을 해야 하는, 그것도 24시간 365일 근무가 필요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질 수도 있겠다. 내가 일해야 하는 직장에서 협조조차 되지 않는 클라이언트가 나에게 폭행을 가한다고 생각해보자.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지 않은가 ... 하지만, 내가 본 테크니션 선생님 그 누구도 화를 내지 않았다. 수의사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로 예민한 상황이 일어날 때마다, '괜찮아, 다 끝났어'와 같은 문장으로 어르고 달래기 바쁘다. 나는 그런 선생님들을 보면서 존경스럽기도 하고, 가끔은 부정할 수 없는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동영상을 몇 편 봤다. 밤거리에 목줄을 잡고 요요하듯 빙빙 무언가를 돌리는 영상, 아이가 무언가의 얼굴을 때리는데 부모가 촬영하며 웃기만 하는 영상, 무언가를 때리고 집어던지며 태연한 듯이 방송을 진행하는 영상. 대상은 모두 강아지였다. 영상을 보고 처음 드는 생각은 잔인하다기보다 '어떻게'라는 생각이었다. 


지금껏 내가 봐온 보호자들은 자기 아이가 혹여나 잘못될까 품에 꼭 안고 들어오는 사람이 전부였다. 때론 아이가 불편할까 봐 먼 거리에서 택시를 타고 오기도 하고, 하루의 남지 않은 여유시간 대부분을 아이의 면회를 위해 쓰기도 하고, 좋은 병원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새벽 늦게 찾아오기도 하는 그런 보호자들이었다. 아이가 구토를 했을 뿐인데 행여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까 봐 잠옷 차림으로 병원을 찾는 보호자를 보면 저렇게까지 애가 탈 수 있을까 같은 먹먹한 생각이 들곤 한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보호자들을 봐온 내게, 앞서 말했던 영상 몇 편은 분노의 감정만큼 의문이 들게 한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하는 거야'같은 생각이 아니라 '어떻게 보호자라는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같은 생각에 좀 더 가깝다. 제 손으로 데려오고, 제 손으로 길러온 아이에게 대체 왜 무슨 이유로 그래야 한다는 것일까.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 보이기 위한 동물적 본능인가, 아니면 생명에 대한 존중조차 없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걸까.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논리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매체에서 등장하는 동물학대 관련 뉴스를 보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빈번히 일어난다. 온몸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은 아이가 등장하기도 하고 몸에 화살이 관통한 채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아이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아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의 어느 한 부분이 심하게 병들어서 곯을 대로 곯아버려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까지 든다.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지만, 학대와 같은 행위를 보면 이유 없는 행동도 있다는 걸 반증하는 것 같다. 동기 없는 혐오의 행위는 대부분 폭력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약한 것들을 대상으로, 서열 상 자기보다 하위에 위치해 있다고 느끼는 대상들에게 말이다. 이런 것들이 비단 동물들에게만 일어나는 문제인가. 왕따나 데이트 폭력 같은 사회 일부분의 현상들과 끔찍하게도 닮아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슬픔을 느끼지만, 그런 아이들을 죽게 만드는 사람들을 보면 이질감을 느낀다. 인간 대 인간으로 당연히 느껴야 하는 동질감이 나에겐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가치마저 상실해가면서 생명에 대한 존중을 포기하고 빼앗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길러보지 않았기에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동정심은 남아있다. 무엇보다 경중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아닌가.


동물 학대는 분명 근절되어야 한다. 여린 생명의 소중함을 위해, 이 사회가 가진 자정작용의 힘을 위해, 크게 보아 앞선 폭력의 행위들이 범죄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국가가 선진국인지 윤리적으로 성숙한 국가인지 판단할 수 있다' 유명한 인도의 지도자 간디의 말이다. 우리나라에 동물보호법이 강화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고통받고 죽어가고 있다. 앞서 말했던 사건 중 하나인 '쥐불놀이'로 불리는 사건 또한 반려견이 격리 조치되었지만 기간이 끝나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현행법상 학대당한 동물이 격리 보호 조치되어도 주인이 반환을 요청하면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의미가 아직은 생명보다 사유재산에 가깝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과연 우리나라가 윤리적으로 성숙한 나라인가, 윤리적인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은 나라인가 의문을 품게 한다.




나는 동물에게 잘해줄 자신이 없는 사람이다. 제 한 몸 간수하기도 바쁘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피로감에 지쳐 침대에 몸을 맡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반려동물은 어울리지 않다. 밥도 줘야 하고, 화장실도 치워줘야 하고, 나도 귀찮아서 하지 않는 산책도 해야 한다. 불가능한 일임을 알기에 나는 먼발치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물론, 아이들을 카메라에 담을 때에 꽤나 무거운 책임감을 껴안곤 하지만 적어도 생명 자체를 보살펴야 하는 책임감에서는 벗어나 있는 위치이지 않은가. 생명에 대한 책임감의 무게가 얼마나 막중했는지, 또 얼마나 고귀한지를 알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도 반려동물을 키우고자 하는 생각은 없다.


하루에도 몇십 명의 아픈 아이들이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하루에도 몇십 명의 아픈 아이들이 고통에서 잠든다. 같은 크기의 생명이지만 생의 길이가 매듭지어지는 순간은 너무나도 상이하다. 미디어의 삶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나에게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이는 두 세계관은 새로운 고통이다. 다른 양쪽 모든 곳에 시선을 두고 살아간다는 건, 그리고 내가 행동할 수 있는 힘이 그리 크지 않다는 건 나에게 늘 새로운 죄책감을 안긴다. 때론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다가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묻고 싶다. 신이라도 된 것 마냥 구는 당신에게, 대체 무슨 권리로 아이들을 학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 당신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자책을 위해 묻는다기 보다, 당신 스스로에게도 책임감 있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돈을 주고 구매했으니까? 당신이 분양받아왔으니까? 당신이 당신 스스로 한 선택이니까? ... 글쎄, 생명의 존엄을 돈으로 구매할 수 있다는 생각일까 아니면 생명에 대한 가벼운 사상이 만들어낸 괴물이 된 걸까.


제발 그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옳은 폭력은 없다. 누가 되었든, 어떤 대상이 되었든, 어떤 방법으로든 폭력은 허용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을 보이는 사람으로 변화하길 바란다. 시스템으로 막을 수 없다면 이렇게 간절히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 어쩌면, 아이에게 세상의 전부는 당신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보여주는 세상이, 그 작고 여린 아이에게 전부인 것처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를 학대하면서 그게 잘못된 행위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 싶다면, 이제라도 그게 잘못된 행위라는 걸 뉘우치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분노가 오지랖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될 수 있도록. 제발 지금이라도 동물학대를 멈추길 간절히 바란다.


※ 원문에 게시되는 글은 모두 의학적 소견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자세한 증상이나 문의는 가까운 동물병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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