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토리텔러: 힐빌리의 노래
※ 이 리뷰에는 '힐빌리의 노래'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못 배운 부모와 배운 자식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다.” 몇 년 전에 스치듯 봤던 이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자식을 키워낸 많은 부모들의 심장을 쓱 긋는 잔인한 말이라 슬펐다. 홀로 세상을 마주한 뒤 저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을 보여 한 없이 작아질 많은 자식들을 생각하니 저몄다. 그들이 화해할 수 없다면,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영화 ‘힐빌리의 노래’는 그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주인공 J.D는 예일대 법학과 학생이다.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여름 인턴십 1차 면접 장소에서 누나 로지의 전화를 받는다. 엄마, 베벌리가 마약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 한두 번이 아닌 일이지만 이번엔 꽤나 심각한 상태다. J.D는 이틀 뒤 2차 면접이 잡힐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향으로 내려간다. 초라한 안색에 신경질적인 베벌리와 그런 엄마가 답답한 J.D. 어린 시절에는 유쾌하고 명랑한 엄마를 따랐던 J.D였지만 그들 사이의 골이 깊어지면서 관계도 멀어졌다.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그들 가족에게 있었던 일을 보여준다.
J.D의 가족은 백인 하위 계층이다. ‘계층’이란 말이 우습지만, 결국 가난한 집안이란 말이다. ‘힐빌리’는 우리나라 말로 치면 ‘달동네’와 비슷한 어감이라고 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힐빌리에서 J.D는 성장했다. 약물 중독으로 재활원에 있는 가족쯤은 누구나 있는 그곳에서 예일대 법대생인 J.D는 개천에서 난 용이다. J.D는 2차 면접 전까지 어떻게든 엄마를 믿을만한 재활원에 입원시키려 하지만 의료보험도 없는 베벌리를 받아주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찾아낸 재활원에서 J.D는 빌다시피 원장을 설득하여 베벌리의 입원 허가를 받아내고 카드를 돌려막으며 입원비까지 정산하지만, 베벌리는 입원을 거부한다. 그녀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제 모습이 끔찍하면서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른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J.D는 베벌리와 크게 다투는데, 누나 로지는 베벌리의 편을 든다. 본인보다 누나에게 더 형편없었던 엄마를 기억하는 J.D는 그런 누나를 이해 못하지만, 로지는 말한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는 엄마를 용서했어.”
베벌리는 고등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한 우수한 학생이었다. 분명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것이다. 어쩌면, 꿈을 이루는 방법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겐 기회가 없었다. 좀 더 배울 기회, 배운 것을 써먹을 기회, 인정받을 기회. 먹고사는 일만으로 숨이 벅찬 환경에서 그런 기회는 신기루 같다. 배울 돈이 있으면 식량을 사고, 더 못날 경우엔 술이나 약을 산다. 그게 반복되면 자연스레 기회를 얻을 노력조차 않게 된다. 베벌리에겐 기회를 주기 위해 뒷받침해줄 누구도 없었다. 베벌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전혀 똑똑하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행복했을까? 자신의 재능을 알고 한계를 아는 그녀에겐 사는 게 지옥 같았을지도 모른다.
베벌리가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못하자 할머니가 등장한다. 베벌리가 동거하는 남자의 아들에게 물든 J.D가 비행을 일삼자 할머니는 J.D를 데려간다. 호되게 꾸짖고 제대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 마트에서 계산기를 훔치다 걸린 J.D에게 말한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한텐 기회도 안 와.” J.D는 무료 급식 기사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면서도 자신의 그릇에는 언제나 큰 덩이의 고기를 얹는 할머니를 보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그가 예일대 법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딸 베벌리에게 주지 못한 기회를 손자 J.D에게만은 주려고 했던 할머니의 노력에 있다.
할머니, 베벌리, J.D, 3대에 걸친 이 가족의 서사가 절절하다. 베벌리가 원망한 할머니 또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베벌리가 자랄 때는 어떻게 기회를 주어야 하는지 몰랐다. 베벌리는 주어지지 않는 기회에 목말라하다 스스로를 망쳤지만, 자식인 로지와 J.D에게는 어떻게든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방법으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여러 남자와 만남을 반복했다는 것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에 엄마의 진심이 있었겠지. 어찌 됐든 베벌리의 노력도 자식들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은 되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때 깨달았다. 어떻게 베벌리가 자식을 망치고 있고, 자신이 어떻게 J.D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지. 말하자면, J.D는 할머니와 베벌리가 삶을 버티면서 얻은 교훈으로 ‘개천에서 난 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J.D는 고향에 내려가 있는 동안 2차 면접 안내 전화를 받는다. 당연히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 1차 면접에 합격한 것이다. J.D는 기쁘지만 동시에 불안하다. 면접장소까진 차로 10시간, 그 거리를 달려가도 합격할 거란 보장이 없다. 엄마는 불안정한 상태고 그녀를 돌봐줄 사람은 없다. 슬쩍 면접을 포기하려는 의사를 내비치는 J.D에게 누나 로지는 말한다. “엄마 핑계 대지 마.” J.D는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1차 면접 장소는 근사한 레스토랑이다. 샤르도네와 소비뇽 블랑을 구분하는지, 테이블 위에 주르륵 늘어선 포크를 제대로 사용하는지 마저 평가당하는 자리. 기업 법률 고문인 아버지와 종종 말다툼을 하게 된다는 지원자, 본인들의 능력에 확신이 있는 파트너들, 우월하지 않은 삶을 살아보지 않은 이들 사이에 놓인 J.D. 그런 J.D의 출신을 아무렇지 않게 우스갯소리로 삼는 무례한 사람들. 그는 아르바이트에 찌든 몸을 하고서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내내 그런 사람들을 봐야만 했을 것이다. J.D는 몸을 축내가며 노력해야만 겨우 얻을 수 있을 것을 당연하게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J.D는 그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나의 부모님이 남들보다 못 배우고, 못 벌더라도 바꿀 수 없다. 함부로 연을 끊을 수도 없다. 그리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다. 못 배운 부모가 자식을 배우게 만들려면 배운 부모보다 곱절의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단 것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커갈수록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과 본인이 비교될 수밖에 없고 가끔은 제 처지가 부끄럽고 원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시점을 지나 성숙하면 깨닫는다. 이런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해 나의 가족이 얼마만큼의 희생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더 해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지.
J.D는 곁에 있어달라 붙잡는 엄마를 두고 2차 면접을 위해 차를 탄다. 그녀의 삶을 바쳐 만든 J.D의 기회를 놓쳐버릴 수 없어서. 뛰어난 경쟁자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막막하지만, 자신을 믿는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시간에 2차 면접 장소에 도착한 J.D의 모습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상처 받고, 또 치유받았다. 베벌리가 느꼈을 한계와 절망이 공감되었다. 망가진 그녀를 보면서 아팠고, 단단하게 성장한 J.D를 보면서 안심이 되었다. 못 배운 부모와 배운 자식은, 그래. 처한 상황에 따라 화해를 하지 못할 순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의 한계를 가족이 지었다면 그걸 깨부수는 것 또한 가족들이 나를 믿어주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가끔씩 뿌리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적이 있었다. 더 배울 수 있는데, 더 하고 싶은데, 망설이며 결국 스스로 선을 그어 버렸던 순간이 스친다. 왜 배우고 싶은지가 아니라 배우는데 얼마가 드는지가 더 중요한 환경에선 배움의 가치와 가격을 자연스레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승자는 가격이다. 이제 더 이상 가격을 우위에 두지 않아도 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종종 그때의 기억 때문에 괜히 가족을 탓하고 싶었던 못난 옛 마음도 같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만큼의 나를 만들어주기 위해 가늠하기 어려운 노력과 희생을 기울였을 가족을 생각한다. 사랑하지 않으려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친애하는 나의 적, 나의 가족.
※ 타이틀은 허지웅 작가가 쓴 동명의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