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스토리텔러: 카고, 래버너스
※ 이 리뷰에는 '카고'와 '래버너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좀비 장르는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는다. 마니아 층이 확실하고, 소재만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자극적인 고어 효과와 절대 약자의 입장에서 쫓긴다는 긴장감을 깔고 가기 때문이다. CG와 특수 분장이 상당히 발전한 현시점에서 회생 불가능한 시나리오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면 좀비 영화는 망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이 장르를 사랑하는 나의 의견이기도 하지만 최근 개봉하는 좀비물을 보면 다들 동감할 것이다. 물론, 취향에 따라 좋았다 아니다가 갈릴 순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좀비 영화에 기대하는 자극은 충족하지 않을까.
워낙 좀비 콘텐츠가 많이 생산되다 보니 ‘어라, 이거 어디서 봤는데’ 싶은 경우가 왕왕 있다. 어떤 장면은 ‘워킹데드’의 한 씬 같고, 어떤 인물은 ‘28일 후’의 누군가 같고. 아마 그런 작품들이 좀비 아포칼립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상황과 인간 군상을 섬세하게 잘 그려냈기 때문이겠지만, 반복되는 비슷한 설정에서 아쉬움을 느끼는 건 관객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 신선한 좀비 영화를 두 작품 발견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카고 Cargo’와 ‘래버너스 Ravenous’다.
두 작품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좀비물의 주요 제작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이 아니면서 (요즘 한국도 좀비 창작물이 대세다. 만세!) 대체로 좀비물에서 기대하는 요소는 빠져있다는 것이다. 가령, 좀비 떼의 습격이나 생존자들의 마트 털기 씬 같은 것. 좀비 탄생의 이유가 설명이 안 된다는 점도 동일하다. 개인 취향으로는 좀비 탄생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 것과 극 중 생존자들의 사심을 채우고 관객을 대리만족시키는 마트 털기 판타지가 빠지는 건 참 아쉽다. 두 작품은 각각 호주와 캐나다 퀘벡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데, 풍경이 비극과는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다. 그래서 이야기는 더욱 절망스럽게 다가오기도 하고. 그런 장소에 걸맞게 엄청나게 역동적인 액션이 펼쳐지진 않는다. 필요한 지점에서만 극적이되, 망해버린 세상일지라도 살아가고 지키는 인물들의 모습에 집중한다.
CARGO -(short film) Tropfest Australia 2013 Finalist
좀비 콘텐츠에 관심이 있고 웹서핑을 즐긴다면 봤을 것 같은 단편영화, ‘카고 Cargo’. 유튜브에 2013년에 업로드된 호주 영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카고는 이 단편영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오래전 유튜브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좀비물 임에도 좀비는 2마리(‘명’이라고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지만...) 밖에 나오지 않는다. 7분의 러닝타임 안에 비극, 절망, 사랑, 희망이 모두 담겨있다. 아기의 울음을 제외하고는 대사 한 줄 없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해하고 감동받는다. 이 영화가 동명의 장편으로 제작되었다는 걸 알고 엄청 기쁘게 시청했다.
결론은 생각보다 좋았다. 영국 드라마 셜록의 왓슨 역으로 유명한 마틴 프리먼 주연이다. 극 속에서 그의 이름은 앤디. 그가 어린 딸 로지를 구하기 위해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 황무지를 헤쳐나가는 이야기다. 딸이 얼마나 어리냐면, 이도 채 나지 않은 아기다. 영화는 이미 좀비 바이러스가 호주 전역에 퍼지고, 호주는 국가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생존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 생존하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좀비에 물렸을 때를 위한 응급 키트도 존재하는 걸로 봐선, 이 사태가 벌어진지는 꽤 오래되었다. 앤디는 아내 케이, 딸 로지와 함께 거주용 배 위에서 강을 따라 살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케이가 좀비에게 물리고, 그녀가 변하기 전까지 고작 48시간이 남게 된다. 앤디 가족은 48시간 내 치료를 받기 위해 배에서 내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병원으로 가기 위해 황무지를 건넌다.
케이는 결국 좀비로 변한다. 앤디에게 로지를 살리라는 유언만 남긴 채. 설상가상으로 앤디는 로지를 구하려다 케이에게 물린다. 이제, 앤디에게도 48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 안에 앤디는 로지를 안전한 누군가에게 부탁해야만 한다. 이 영화는 로지라는 ‘카고 (Cargo:화물)’를 짊어진 아빠의 이야기다. 그에게 그 짐은 좀비 바이러스에 잡아먹히고 숨이 다해도 어떻게든 지켜 내야 할 존재다. 이미 끝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정신을 붙잡고 로지를 끌어안는 모습이 못내 가슴 아프다.
그 과정에서 앤디는 투미라는 원주민 소녀를 만난다. 투미는 홀로 좀비로 변한 아빠를 보살피고 있다. 호주 원주민들은 좀비로 변한 사람들을 그들의 방식대로 장례를 치르고 있었는데(나무 위에서 화장하는 방식), 투미는 아빠는 병에 걸렸을 뿐이기에 죽게 만들지 않기 위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의 피를 미끼로 아빠를 이동시키며 사막에서 홀로 지내는 소녀다.
투미와 앤디는 빅이라는 남자에 의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만난다. 빅은 언젠가 세상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을 대비해, 살아있는 인간 투미를 미끼로 좀비를 사냥하고, 그들의 금품을 빼앗는 인간이다. 앤디는 빅의 실체를 모르고 그에게 로지를 맡기려다, 투미와 만난 뒤 빅의 실체를 알고 함께 도망친다. 그렇게 투미는 앤디와 로지의 길에 동참한다.
앤디는 로지를 전에 잠깐 스치듯 만난 한 일가족에게 맡기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가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일가족의 아빠는 이미 좀비에게 물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는 선택을 했다. 아내와 두 아이를 죽이고 스스로 자살한다. 그는 죽기 전에 앤디와 로지를 위해서 총알 두 개를 남겨놓겠다고 하지만 앤디는 거절한다. 그런 선택을 한 일가족의 아빠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망해버린 세상에 생존력 없는 두 아이를 남기고 떠나는 일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어쨌거나, 앤디는 그런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로지를 살리기 위해 점점 변해가며 진액이 흘러나오는 몸을 이끌고 투미의 안내를 받아 원주민 무리에게로 향한다.
카고의 명장면이 등장한다. 앤디는 좀비로 변한 자신이 로지와 투미를 공격하지 않도록, 어디선가 주운 내장을 봉지에 담아 나뭇가지에 건다. 나뭇가지를 고정시켜 내장 봉지가 언제나 자기 눈앞에 달랑거리도록 하고, 스스로 양 손을 결박한다. 좀비가 되어서도 목적지까지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기 위해. 진액으로 범벅되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더 이상 생각이 멈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일지라도 어떻게든 로지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해.
이 영화는 좀비물의 일반적인 자극을 좇지 않는다. 좀비는 소재일 뿐, 그 속에서 가족을 살리려는 아빠의 처절한 투쟁을 그려내고 있다. 앤디의 절박함이 와 닿고, 로지가 엄청나게 사랑스럽기에 마지막에는 제발! 하며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결국 세상은 여전히 망한 상태이고, 나아진 것은 단 하나도 없음에도 로지가 선한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는 것만으로 안심이 됐다.
캐나다 퀘벡의 시골 마을이 배경이다. ‘시골 마을’이라는 배경부터 오싹하다. 어딘가 고립되고, 쉽게 도움의 손길이 닿을 것 같지 않다. 영화는 의외의 장소에서 시작한다. 레이싱 경기장에서 경주용 차들이 신나게 달리고 있고, 뒤편에선 레이싱 선수와 애인이 진한 스킨십을 하던 도중, 좀비가 등장한다. 그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는 주요 생존자들의 상황을 나누어 보여준다. 변해버린 아내와 두 아들에게 쫓기는 노인, 가족의 무덤을 만들고 홀로 떠나는 소년. 좀비를 음악으로 유혹해 머리를 작살내는 정장 차림의 여자. 친구를 잃은 남자. 아코디언을 든 여자. 그리고, 폐가에 홀로 남아 떨고 있던 아이.
영화는 친절하게 각 인물의 사정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들의 대사와 행동, 태도로 유추할 뿐이다. 그럼에도 각자 사연을 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아코디언에 묻은 피를 울며 닦아내는 모습이나, 좀비에게 물린 소년을 앞에 두고서야 겨우 무너진 모습을 보이는 정장의 여자를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각자의 사정이 중요하지 않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 외에 무엇이 중요할까. 그리고, 그것보다 어려운 게 있을까.
각각의 인물이 생존을 위해 도망치다 한 지점에서 만나, 힘을 합쳐 어떻게든 살아내려 하는 과정이 영화에 담겼다. 치열하지만 정적이다. 그러나 지루하다고 느낄 새 없이 러닝타임 내내 긴장감이 유지되는 건, 이전에 없던 소름 끼치는 좀비의 특성 때문이다.
래버너스의 새롭고도 기괴한 점은, 좀비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성이 사라진 채 인육을 뜯는 동물이라는 게 좀비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에서 좀비는... 사람을 유인하고 성공하면 웃기까지 한다. 사람을 물어뜯으려 달리는 좀비도 있지만, 관찰하듯 가만히 서서 보는 좀비도 있다. 그들은 서로 소통하는 듯하다. 울음으로 신호를 보내고, 알아듣고, 대답한다. 심지어 탑을 만들기도 한다. 탑은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여기저기서 모아 온 잡동사니로 만들어졌기도 하고, 의자이기도 하다. 멀거니 서서 탑을 보고 고요하게 선 좀비들의 모습은 어느 사이비 종교의식 같기도 하다. 인간이 영역에 침범하면 울음으로 쫓아내고, 그 이상을 따라오지도 않는다. 이 영화에서 그들은 이전에 알던 ‘좀비’라기보다는 광신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앞서 말했던 두 영화의 공통점에서 하나는 정정해야겠다. 래버너스에선 좀비 떼가 등장하기는 한다. ‘월드워Z’ 같이 압도적이진 않아도,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안갯속에 멀거니 서있던 좀비들이 사냥감을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드는 장면이 분명 있다. 생존자들은 지친 것 같기도 하고, 질린 것 같기도 한 모습으로 맞서는데, 목적은 하나였다. 동행하는 어린아이를 살리는 것. 안개가 자욱한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언덕에서 그들은 아이를 끌어안고 달린다. 저가 위험에 처하면, 아이를 다른 이에게 전하고 맞선다. 아이는 결국 오래된 탄광 속에 홀로 남는다. 아이에게 살아남으란 말을 전한 여자의 아코디언을 들고, 자신의 몸길이만 한 장총을 들고, 어쩌면 또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113번 국도를 찾아간다.
아이는 113번 국도에서 달리는 레이싱카를 발견한다. 운전자는 영화의 도입부에 나왔던 레이싱 선수다. 남자와 아이를 태운 경주용 자동차가 고요한 시골 마을의 국도를 달리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난다.
카고와 래버너스 모두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좀비를 치료할 방법이 밝혀지지도, 실마리를 찾지도 못한다. 그럴 노력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어떻게든 하루를 살아내는 것만이 인물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액션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려야 할 것은 본인만이 아닌 어린아이도 있다. 핏줄이든, 생면부지이든. 아이들은 살아남는다. 세상이 나아질 것이란 희망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웃기게도, 아이가 살아남아 또 다른 보호자의 품에 안겼다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보여서’이다. 좀비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찾는 모습에서 어떻게든 인간은 돌파구를 찾는구나 싶어 마음이 부푼다. 그러나 카고와 래버너스는 다르다. 응원하던 인물이 모두 죽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아이들과, 그런 모습에 안도하는 관객이 있다. 강렬한 쾌감보다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이런 흔하지 않은 좀비 영화도 매우 괜찮았다. 좀비 소재가 엔터테인에 그치지 않고 한 단계 성숙하게 쓰여서 이런 영화들로 보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