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2장 45절에서 52절까지
나는 문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대학교는 이공계 비슷-한 학과로 진학을 했다.
문, 이과 둘 다를 받는 학부 특성상 이학, 공학, 상경계열까지.. 정말 다양한 과목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다름 아닌, '코딩' 이었다.
논리를 바탕으로 컴퓨터 언어를 짜고, 그를 통해 어떤 결과값을 내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다.
효율에 미치고 (어떻게하면 더 짧게 알고리즘을 짜서 같은 결과값을 낼 수 있을까?)
논리를 좋아하고 (이 결과값은 어떤 과정을 짜야 나올 수 있을까?)
평소 생각할 때에도 경우의 수를 다 따져보는 (이 과정 자체가 알고리즘 짜기였다) 나에게 꽤나 잘 맞는 기술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코딩을 대학교 2학년때부터 대학원까지 약 5년 넘게 쭉 하게 됐는데... 여기서, 문제!
이 코딩을 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다음 셋 중 무엇일까?
(1) 오류가 있고 결과가 틀리게 나오는 것
(2) 오류가 없고 결과가 틀리게 나오는 것
(3) 오류가 있고 결과가 맞게 나오는 것
빠르게 정답을 공개하자면, 답은 단연코 (3)이다.
(1)과 (2)는 오류든, 잘못된 결과든 눈에 보이는 반면에 (3)은 잘못된 과정이 전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과정에 오류가 있지만 결과는 일단 좋게 나오는 것.
지금 당장은 편안하게 컴퓨터를 끄고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몰라도, 후에 오류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결과값을 보고서나 논문으로라도 제출하게 된다면? 그 후폭풍은 상당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 신명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주시며, "저 땅에 이스라엘 민족이 들어갈 것이지만 너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헉, 이게 사실 엄청나게 슬픈 이야기인 이유는...
모세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장장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라는 거친 공간에서, 말 안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르고 달래며.. 화도 내보고 통곡도 해보면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니요!!!!
이런 인간의 심정을 잘 이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친절하게(?)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짚어주신다.
"너희야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내게 범죄했기 때문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 범죄의 내용은 민수기 20장 11절에서 13절까지 나와 있는데,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고 항의(?)하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물을 주시는 내용이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서 반석에게 명령해서 물을 내라' 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앞에서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과는 다르게 행동한 것이다.
이 본문을 보면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한 것도 불순종한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나왔다는 것'이 더 눈에 들어왔다.
잘못된 방법이었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셨다.
즉, 목표했던 결과. 바래왔던 결과는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 과정이 잘못되었음에도 말이다.
'물을 내는 것'이라는 당장의 목표는 이루어 냈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모세는 그보다 더 궁극적인 목표였고 뜻이었던, 가나안 입성은 할 수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모세의 인생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과정 그 자체였는데, 따라서 그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건... 정말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모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이라는게 분명히 있다.
인생의 궁극적인 그 '뜻'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과정 또한 있을 것이고, 그 과정엔 해결해야 하는 작은 과제들이 있을테다.
그 과제들은 그저 '뜻'에 도달하기 위한 일부의 과정일 뿐인데. 인간의 얕은 지경은 이 작은 과제를 '뜻'보다 훨씬 더 크게 느낀다. 마치 당장에 해결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모두 망가질 것처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마치 목표인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것이, 보통의 인간이 삶에서 취하는 모습이다.
당장 내 눈 앞에 닥친 일들, 당장 내 눈 앞에서 보고자 하는 결과들을 두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결과'가 어떠하든지간에, 어떤 '과정'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아니, 잘못된 과정으로 옳은 결과를 이루어내는 것, 그게 훨씬 더 위험한 일이라고.
그렇기에 결과에 따라서 내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에게도 지금 당장 내 눈으로 명확히 보고 싶은 결과들이 있다.
취직이나, 연애나, 결혼과 같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보여지는 어떤 명확한 결과물들 말이다.
하지만 당장 내가 원하는 곳에 취직을 하고 바라던 이상형과 결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짜 좋은 일일까?
그 과정에서 내가 교만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고,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면...
일단 내가 원하는 결과를 성취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셨더라도,
하나님께서 나에 대해 계획하신 가장 큰 뜻, 나에게 보여줄 가장 큰 은혜, 가나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가 당장 신경써야할 것은,
내가 여기에 취직할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사람과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질문과 과제들이 아닌,
지금 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있을까?
지금 나에게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말씀은 무엇일까?
지금 내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인 것이다.
코딩 또한 빠르게 결과를 내는 것보다는 정확하게 목표한 결과를, 오류 없이 내는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빠르게 결과를 내는 것에 집착하다보면 수많은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고, 오류를 잡아내다보면 느릿하고 여유롭게 목표에 집중하는 것보다 완성물을 내는 데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혹은 완성물이 엄청나게 복잡하고 길어서 나중에 오류가 생겼을 때 그것을 수정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상당히 조잡하고 비효율적인 완성물이 탄생할 수도 있다. 코딩을 짜는 것이 목적이라기보다, 코딩을 이용하여 효율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게 본질적인 목적인 것이니.. 비효율적인 완성물은 그 자체로 실패인 거다.
길게 이야기했지만 결론적으로는 눈 앞의 것에 급급하다보면 후에 더 큰 일을 그르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코딩이라는 지극히 현대의 산물조차도 당장의 과제보다는, 더 큰 그림을 보아야 한다는...하나님의 섭리를 담고 있다.
느린 것 같지만 가장 빠른 길, 좁은 것 같지만 가장 옳은 길.
하나님의 길을 따라 사는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며....
오늘 큐티뽀짝은 여기서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