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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Dec 30. 2020

위기의 아이들 (1)

Netflix <인간수업>, <빌어먹을 세상따위> 전격 비교 분석

올해 상반기에 공개되었던 넷플릭스의 드라마, <인간수업>.

<인간수업>은  '지수'(김동희 扮)와 '규리'(박주현 )가 함께 범죄를 저지르다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범죄의 결과 속에 갇히게 되는 내용의 드라마인데, 이 <인간수업>과 함께 자주 논의되고 비교되는 드라마가 하나 있다. 바로 영국 BBC의 <빌어먹을 세상따위>.


<빌어먹을 세상따위>는 넷플릭스를 통해 배급되다보니 넷플릭스 오리지널처럼 생각이 될 수 있는데 (본인이 그랬음) BBC에서 2017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라고 한다.

<빌어먹을 세상따위> 역시 인간수업과 비슷하게 '제임스'와 '알리사'라는 두 명의 고등학생이 등장하며, 이들이 가출하여 여행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인간수업>은 갓 나왔던 당시에 보았었고, <빌어먹을 세상따위>를 최근에 보게 되면서.. 두 개의 드라마가 정말 비슷한데, 동시에 차이점도 꽤나 분명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각 사회의 청소년 문제에 대해 다룬다는 점은 동일하였으나, 그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이나 청소년 주변의 어른들의 모습은 꽤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인간수업>과 <빌어먹을 세상따위>를 함께 비교하면서 심층적으로 분석해보고자 한다!


* 드라마 <인간수업> <빌어먹을 세상따위>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위기 속의 아이들: 그릇된 욕망 vs 정서적 방치


<인간수업>과 <빌어먹을 세상따위>의 아이들은 모두 위기 속에 처해 있다.


'지수'는 평범한 삶이라는 욕망을 그릇된 수단(성매매 알선)으로 성취하려고 하며,

'규리'는 억압되고 통제된 자신의 삶을 잘못된 방법(지수의 범죄에 가담)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제임스'는 자신의 감정을 회피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자신의 우울감을 작은 동물을 살해하는 등 끔찍한 방법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사이코패스적 기질로 보인다.

'알리사'는 감정 조절을 잘 하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등 반사회적 인격성향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인간수업>의 아이들은 범죄를 자신의 욕망에 대한 수단으로 거침없이 활용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아이들은 감정을 처리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는 데에 서툰 모습을 보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두 드라마의 핵심적인 차이점이며 따라서 아이들의 엇나간 모습에 대한 원인 또한 동일 선상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두 드라마는 구조적으로 상당히 훌륭한데, 왜냐하면 아이들의 엇나간 모습이 그 양육자인 부모의 모습에서도 동일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즉, 양육자인 부모의 그릇된 모습이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전이됨보여주고 있다는 것.

'지수'의 부모는 그를 방치하고, '규리'의 부모는 그를 억압했기에 상반된 모습을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큰 선상에서는 자녀를 자신의 욕망에 대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것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수'에게 큰 돈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그 돈을 빼앗아 사용하려고 했고,

'규리'의 부모가 그녀를 억압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사회적 명망에 '규리'를 이용하기 위해서다.


이는 '지수'와 '규리'가 범죄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꼭 같은 모습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반면에 <빌어먹을 세상 따위>의 부모들은 자녀를 정서적으로 방치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제임스'의 아버지는 '제임스'가 어린 시절 그가 보는 앞에서 어머니가 자살하였던 사건에 대한 상처를 꺼내지 않고 묵혀 둔다. 도리어 '제임스'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진조차 갖고 다니지 않으며, 어떠한 사건도 없었던 것처럼, 어떠한 상처도 없는 것처럼 제임스 앞에서는 늘 웃고 실없는 농담을 일삼는다. 즉, '제임스'가 가진 상처를 직면하지 않고 이를 지속적으로 회피한 것이다.


'알리사'는 이혼 가정에서 자랐는데, 그녀를 대놓고 배척하는 새아버지로 인해 그녀는 가정에서 방치된 느낌을 줄곧 받는다. 게다가 그런 그녀를 보호해주어야 마땅한 그녀의 친어머니는 새아버지의 방치로부터 무력하기만 하다. 여기에 더해서, 어머니는 선의로 '알리사'의 생일마다 친아버지를 가장한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알리사'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상당히 서툴고 잘못된 방법이었다. 현재의 가정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게 만들고, '친아버지가 있다면 어땠을까'는 식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가정에 '알리사'가 집착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친아버지를 구원의 존재, 혹은 구원의 가정으로 생각해 그를 찾아갔던 '알리사'는 그곳에서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친아버지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알리사' (<빌어먹을 세상따위> 시즌1 마지막화 중)

두 드라마 모두 위기의 아이들을 다루고 있지만, 구체적인 양상과 그 원인인 양육자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렇게 청소년 문제의 구체적인 양상과 양육자의 모습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각 사회의 가정의 문제점이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인간수업> 속 청소년이나, 그들을 양육하는 부모 캐릭터의 본질적인 특징은 한국 사회에서 꽤나 보편적인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수'와 '규리'의 부모가 보이는 문제인, <자녀를 자신의 욕망에 대한 수단으로 삼는 것>.

이것이 바로 실제적으로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녀 양육의 문제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입시 과열과 그 속에서의 잘못된 관행들, 사건들은 다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실제로 자녀를 위한 일일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자녀를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마음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닐까?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이거나, 자녀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명망을 높이려는 욕망이거나. 자녀를 자기 실현의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잘못된 수단까지도 불사하는 것.

이런 환경 가운데에서 성장하는 자녀가 정당하고 정직한 수단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목표하는 결과의 성취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이든지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 될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그렇다고해서 영국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가 우리에게는 없을까?

2003년 이후로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매년 자살률에서 1위를 하고 있다.

이 사회의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증거인데, 이에 대한 대책이나 사회적 관심은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다.

정서적으로 흔들리는 부모에게서 양육받은 자녀의 정서는 오롯이 건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정서적 방치의 문제는 더 큰 문제에 덮여져 보이지 않는 것 뿐이지 않을까?


<인간수업>과 <빌어먹을 세상따위>는 그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경고하는 드라마가 아니라,

아이들의 모습을 통하여 어른에게 경고하는 드라마다.

우리의 모습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우리가 아이들에게 어떠한 어른이 되어야 할지.


그런 점에서 <인간수업>과 <빌어먹을 세상따위>에 등장하는 어른들의 모습도 꽤나 눈여겨볼 만 하다.


다음 편에서는, 각 드라마 속 어른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비교하고 분석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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