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 / 이현우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들의 경험을 듣거나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작가란 직업이 가지는 신비성과 그들이 쓰는 글의 원천인 경험들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보통 독자가 작가의 경험을 접하는 방법은 그들이 쓴 에세이를 통해서다. 작가가 직접 자신이 겪은 것들을 글로 펴 내면 독자가 읽게 되는 것이다. 나도 보통 그런 식으로 여러 작가들의 경험을 접했다. 그러나 그 글들에는 작가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은 새롭고 매력적인 관점을 볼 수 있는 책이다. 누구나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국내 작가들의 생애와 그들이 살던 시대상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 그 경험들이 어떻게 그들의 작품에 반영되었고 영향을 미쳤는지를 전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비평서로 볼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비평서처럼 일반 독자들이 읽기 어렵거나 난해하지는 않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통찰을 누구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로 풀어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서문에서 저자가 '보통의 독자가 책을 통해서 한국 현대문학의 전개과정에 대한 조감도를 그려볼 수 있고, 개별 작품에 흥미를 갖게 된다면 저자로선 더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말하고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일반 독자들을 위한 책이다. 한국문학에 관심이 있으나 어떻게 입문해야 할지 모르겠다거나 한국문학의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 알고 싶은 일반 독자들에게 입문서로 추천하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여성작가 편>은 1960년대부터 각 시대를 대표하는 열 명의 여성 작가를 다루고 있다.(물론 남성작가 편도 따로 있다.) 1960년대에는 강신재, 박경리, 전혜린을, 1970년대에는 박완서를, 1980년대에는 오정희, 강석경을, 1990년대에는 공지영, 은희경을, 2000년대에는 신경숙을, 그리고 마지막 2010년대에는 황정은을 대표 작가로 다뤘다. 노어노문학을 전공한 저자가 세계문학의 흐름과 한국문학의 흐름을 비교하며 분석하는 것이 꽤 흥미로웠다. 전반적으로 세계의 문학은 전근대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진행해왔다. 계급적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종교에서 과학으로, 노동에서 돈으로, 숙명에서 자유의지로, 농업에서 산업혁명으로 나아가는 역사의 방향과 궤를 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생기게 된다. 과학의 합리와 이성을 불신하는 종교인들,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여전히 계급주의에 묶여 사는 귀족들과 그에 반발하는 평민들, 숙명적으로 이어져 온 가문의 행로에 반발하며 고뇌하는 젊은이까지 온갖 종류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근대 소설이 담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갈등과 그 갈등을 겪는 이들의 다층적인 내면이다. 저자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작가와 작품을 분석하는데 좋았던 건 뻔한 칭찬 일색의 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때로는 신랄하기까지 한 비판을 가하며 아쉬웠던 점, 부족한 점을 분석한 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길까지 제시한다.
대표적으로 박경리의 소설에 대한 저자의 평은 전근대적 세계관적 생명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소설이라는 것이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을 보면 근대적 세계관을 거부하고 있다. 자본주의, 돈, 공업과 기계 등을 거부하고 땅과 노동, 생명에 머물러 있다. 근대 소설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근대 소설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숙명, 샤머니즘 및 토속적 이야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써야 한다. 설령 사랑에 대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상류 계급의 여성이 하층민을 사랑하게 되면서 전근대적 계급주의와 근대적 평등주의 사이에서 나타나게 되는 갈등을 다뤄야 하는 것이다. 전근대적 소설에도 있던 설정이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계급주의가 사라져 가고 있는 근대 소설에서는 체념과 사랑 두 가지 선택지가 모두 가능하며 심지어 사랑도 주위의 비난만 견딘다면 당당하게 쟁취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렇기에 두 선택지 사이에서의 갈등의 끈이 팽팽하다.(전근대 소설에서는 사랑을 쟁취하려면 계급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하는 수밖에 없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은 좋은 소설일지는 모르지만 근대 소설의 기준에는 부합하지 못한다. 근대 이전부터 있어 왔던 치정 싸움, 비상을 먹고 죽은 엄마의 자식이라는 액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숙명론적 세계관, 자본과 돈을 통한 성공을 배제하는 서사 등은 저자가 말하는 근대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저자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장가를 든 아버지에 대한 박경리의 분노, 제국주의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그녀의 경험 등이 근대적 세계관과 연결되며 그에 대한 거부가 자연스럽게 박경리의 소설에 나타난 것이라고 말한다. 상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추론이다.
이렇듯 근대 소설이라는 관점을 제시하며 한국 문학의 대표적인 작품들의 흐름을 분석하는 글은 독자들에게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 리뷰에서는 박경리에 대한 부분만 이야기했지만 박경리 외의 다른 작가들에 대한 글도 흥미롭다. 작가들이 살던 시대와 생애를 객관적으로 톺아보며 작가들의 소설과 논리적인 연결점을 찾아내 합리적 추론을 해내는 과정이 얼핏 보면 추리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해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을 읽고 있는 중이다. 아직 앞부분밖에 못 읽었지만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한국 문학, 특히 19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근현대 한국 문학의 흐름을 전문적이지만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는 좋은 한국문학 입문서다.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책 속 한 문장
자기의 꿈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는 거세 과정을 통해서 사회적 현실에 안착하는 것이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