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미 예전부터 익숙했어
만만치 않은 녀석
아빠의 항암치료를 하며 익숙해진 단어는 소독제, 무균실, 호중구 수치 등이다. 세 단어와 친숙해지며 평소에는 전혀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병균의 존재에 눈뜨게 되었다. '병균'은 나에게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양치질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나 호빵맨이 나올 때나 기억나는 존재였다. 만화에서는 양치질 한방과 비누칠의 힘으로 한 번에 물리칠 수 있는 우스운 존재였건만, 현실에서의 병균은 생각처럼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아빠의 항암 치료 시작 후 '감염'과의 아찔한 외나무다리 건너기가 시작되었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아플 수 있기에 병실에 오면 손 씻고 소독제 사용에 익숙해졌고 감염될까 주의하는 것에 온갖 주의를 기울였다. 일반적인 면역력을 가졌다면 아무렇지 않을 일들도 면역력이 떨어지면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손가락에 살짝 긁혀서 피가 나는 경우 일반적인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면 상처가 나고 금방 아물 텐데 면역력이 없으면 계속 회복을 못해서 조직이 괴사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었다. 몸의 병균을 대처하기 위해서 우리 가족은 소독제를 꺼내고, 마스크를 썼으며 무엇이든 깨끗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고군분투 중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 인생에도 늘 수많은 병균들이 산재하는 중이었다. 몸의 병을 일으키는 병균뿐만 아니라 마음을 힘들게 하는 병균도 수두룩하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득실대는 위험 천지의 세상이었으며 우리 몸은 언제나 고군분투 중이다. 무수한 전쟁에서 잠깐 져서 고꾸라지면 몸이 아프던지, 마음이 아프던지, 둘 다 아프던지 하는 슬픈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아찔하고 멍청했던 수많은 실수들 사이 가운데에서도 별 탈 없이 유아무야 아직까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온 것 같다. 큰 병에도 걸리지 않았으며, 살다가 보면 내가 행동한 멍청한 행동들을 상기할 때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지나왔던 세월들 속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왔다. 다행히, 아빠도 나도 물리쳐야 하는 수많은 병균과 인생의 병균들 사이에서 아슬아슬 외나무다리를 타는 듯했지만 용캐 한 걸음 한 걸음 잘 건너가는 중이다.
왜 세상에는 병균과 악들이 가득할까?
나를 둘러싼 수많은 악들을 없애기 위해서 소독제를 찍 짜서 두 손 가득한 소독제를 손등까지 비비고 "챱챱챱" 소리가 나게 닦아본다. 손에 아직 마르지 않은 소독제 냄새를 맡으며 '왜 세상에는 병균과 악들이 가득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묻게 된다. 그러면서 소독제로 주변을 닦는다. 작은 나의 주변이라도 깨끗해진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다. 무결해지고 깨끗해지기 바라는 마음이 살짝 투영된 것일까. 그러나 세상에 만연한 병균은 나의 작은 노력으로 전부 사라지기엔 엿부족이다.
그냥, 병균이 다 없어지면 안되나. 이 세상의 선한 것들을 만드신 신은 왜 하필 쓸데없는 악과 병균들이 살아있게 할까. 만연한 악 속에서 왜 우리는 굳이 소독제를 계속 써야 하며, 왜 지속적으로 손을 씻어야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
신의 영역 아래 나의 몫
균이 없다면 생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늘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다. 뭉텅이로 짠 소독제로 겨우 손바닥 하나 빠듯하게 닦는 내 모습이 생각나며 진정으로 깨끗한 것은 신의 영역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를 지키려는 작은 노력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늘 손 씻기와 소독제 사용에 열과 성을 다한다. 작더라도 나 스스로를 지키려는 작은 노력이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서.
작은 것을 반복하면, 그리고 그것들이 많은 이들에 의해서 쌓이면 큰 변화를 이끈다고 믿는다. 깨끗하게 관리하는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작은 병실의 모든 가족들과 자기 마음을 부지런히 닦는 모든 이들은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