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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Nov 20. 2022

색이 없이 보는 세상 (부제 : 근황)

두려움을 초월하면 편안함으로 나아갈 수 있나

색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는 두려움이었다


특별히 의도한 바는 없었으나, 근래의 필름들을 돌아보니 흑백이 참 많았다. 어릴 때 학교에서 급식이 나오면 '맛있는 반찬은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즐기는' 나의 다소 쫀쫀했던 성격의 이면이 쟁여놓은 필름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 흑백에 손이 더 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흑백을 대하는 나의 감정은 복잡 미묘하다. MBTI로 비유하자면 서로 양극의 값이 거의 비슷하게 반씩 섞인 그것이라 할 수 있었는데 굳이 따지자면 '싫다'에 좀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색을 요리조리 틀어가며 현실과는 조금 다른 색깔을 만들고,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빛깔을 빚어 간다는 나의 사진 세계관의 선호도와는 완벽하게 반하는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선호도와 철학이라는 워딩으로 포장하기 이전에 그게 내 사진의 강점으로 생각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좀 더 가까웠다. 마치 내 사진에 꼭 들어가는 양념이 빠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집에서 혼술을 자주도 했던 가을이었다. 그리고 이게 뭐가 좋다고 기록을 꼭 남겼을까.

양념이라 비유한 그 색이라는 존재는 찍고 작업하는 사람의 처지와 감정선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 같은 요소이기도하다. 이것은 색을 섞는 작업뿐 아니라 보는 시선과 담는 오브제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색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현된다. 기쁠 때는 화사하고 밝은 톤이 나오곤 하며 그 반대일 때는 건조하거나 톤 다운 색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다른 포토들도 이러할지 기회가 된다면 '당신들도 이러한가'라고 묻고 싶은 내용이지만, 대숲사진가의 사진들은 대체로 그래 왔다.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흑백이란 존재가 내게는 나는 왜 굳이 그러한 두려움을 애써 한 기간에 몰아 담으며 집어 들었을까. 앞선 글들에 올해의 내 삶은 마치 올여름의 '단 한순간도 알 수 없었던 날씨'와도 같았다고 이야기했었는데, 그만큼 안갯속에서 튀어나오는 날 향한 일들은 그 어떤 것도 가늠하기가 그 어느 해보다도 참 어렵다고 느꼈다. 그리고 올 가을에는 유독 그 '가챠' 속에서 꽝이 자주 나온 일이 잦았다.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거나, 가치관들의 충돌과 등가교환 속에서 보내주어야만 했던 존재들도 있었다. 혼란스러웠고, 감정들에 잠식되곤 했던 지난날의 실수들을 반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겼다.


어마어마한 야근을 했던 날이 하루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겠는 사진이지만 기억은 또렷하다.
두 장은 참 잘 담은거 같다고 자화자찬 하는 부분이다. 이 두장 보는 이들은 칭찬을 보태주시라.


그래서였던 것 같다. '이 순간과 감정이 어떤 색으로 나올지가 고민과 두려움이라면 차라리 아예 다 놓아버리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지나갔다. 좋아했던 그룹 여자 친구의 노래 중 <기적을 넘어>의 가사에 '닿을 수 없었던 기적을 넘어'라는 가사가 있는데, 비슷하게 극복할 수 없었던 두려움을 아예 초월해버리면 그 뒤에는 오히려 더 큰 평온함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말도 안 되는 반전식 사고를 가지고 살았던 두어 달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보면 도망치듯 택한 흑백의 세계였지만, 이 세계가 많이 찍다 보면 참 신기한 면이 있다. 이것은 사진 한 장 한 장의 모먼트와, 함께한 사람들을 최대한 기억하려는 나의 성향도 한몫한 듯 하지만, 색을 어찌 섞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찍을 때는 평온했는데, 막상 찍고 난 결과물을 보면 서서히 그 순간들의 감정이 모두 스며들어오듯이 떠오른다. 색을 걷어내며 무념무상으로 들어설 것이라 믿었는데 결국 다 그 안에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가끔씩 사이사이 끼워져 있던 순탄했던 퇴근길들. 이 날의 빛깔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짐작은 간다.

사진 속의 요소들이 살아 있음으로써, 결국 그 순간의 나의 처지들이 기억에 되돌아오고 그때 육안에 보이던 색들이 어떤 색이었을지 서서히 선명해져 눈앞에 보이게 되는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지 않지만 눈에 보이게 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조금은 허탈한 감정을 숨길 수 없지만, 또 그게 어떤 의미로는 '초월적 도달'이 맞다고도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색을 온전히 보고 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그로부터 도망치려 했어도 머릿속에 다 기억이 각인되는데, 그 단순한 사실을 평소 내켜하지 않던 '양념 빠진 싱거운 사진'으로 보고 있자니 '결국 이런 기억들도 다 별거 아니구나' 하고 웃음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이 지나서 보고 있자니 눈앞에 또 비슷한 길들이 있을지라도 '이렇게 지나왔구나 결국. 그리고 나 아직 살아있구나' 하고 한번 더 미소를 옅게 띠게 된다.


꿈만 같았던 도시

'굳이 왜 흑백을 왜 찍어야 하나'에 대한 질문은 기술이 진일보한 이 시대에 내가 가장 크게 갖고 있던 의문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번 가을에 그 답의 일부를 찾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고 초월해버린 다는 것에 대한 지혜. 아직도 사진을 포괄한 삶의 많은 영역에서 이 명제를 갖고 부딪혀 봐야겠지만, 기록이 주는 또 다른 잔잔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는 2022년 가을의 흑백 필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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