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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May 07. 2023

일본 출장기 EP.1

나의 첫 일본은 그렇게 갑자기 다가왔다

일본 지사 출장으로 다녀올 생각 있어요?


재택근무 일정들과, 휴가자들이 유독 겹쳐 사무실에 사람이 없어 휑하던 금요일 점심, 피자를 시켜 먹던 사무실에서 팀장님이 내게 그렇게 물으셨다. 회사에서 이러한 질문에는 항상 숨겨진 이유와 의도가 있다고 믿는 편이지만, 그게 과연 무엇이었을지 고민해 볼 새도 없이 난 이미 그렇다고 끄덕이며 대답하고 있었다.


일본은 말 그대로 나에게 가까우면서 아주 멀리 있는 나라였다. 지난 교환학생 시절과 이후에도 유럽에 대한 로맨스와 욕구는 존재했지만, 상대적으로 가까이 아시아 이웃 나라들이나 동남아 휴양지 등의 여행지에는 관심이 소홀했던 탓이다. 덕분에 사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간다는 오사카나 홋카이도, 혹은 중국까지도 난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물론 치기 어린 마음만 앞서던 시절부터 외치던 이야기는 있었다 "나는 일본 중국은 내가 일 잘해서 꼭 출장으로 방문할 테야"라는 근거 없는 외침이 그것이었다. 그 명제의 실현이라기에는 너무나 갑작스럽고 운이 꽤 많이 따라준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회는 기회이니까. 그 순간에 그냥 몸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공항 사진은 참 식상하다. 그런데 찍는 그 순간만의 설렘은 늘 새롭다.


사무실에서의 본체인 나 자신이 아닌, 대숲사진가의 자아 시점에서 꼭 짚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이전부터 늘 다짐해 왔던 것인데 바로 일본을 가게 되면 디지털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사진을 필름에 담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특별히 이유는 없었지만 막연하게 필름이 주는 거친 질감과 일련의 불편한 과정이 주는 정성스러움, 세밀함의 감성이 일본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이유였다. 


일주일 출장 짐이 들어간 캐리어에 업무용 PC까지 이미 짐은 무거울 대로 무거워진 상태였지만 그 짐들의 무게 위에 리지드를 물린 라이카 M3와 필름 다섯 롤을 추가했다. 카메라를 조심스럽게 챙겨 넣으면서부터 이미 설렌다. 이렇게 생각지 못하게 찾아온 일본, 그리고 나의 첫 일본을 라이카 M3에 리지드로 담을 수 있다니. 일로 떠나는 것이라 여행이 주는 설렘은 없었지만, 기록에 대한 열망은 여전히 샘솟음을 느낀다.


나리타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가는 기차에서 본 풍경. 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실감을 했다.


다만 기록에 대한 욕구와 낭만이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해주지는 못한다. 나는 사실 일본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정말 컸다. 아이슬란드의 조난 위기까지 헤쳐 나왔으면서 가장 난이도 쉽다는 일본이 무엇이 무섭냐고 사람들은 반문했다. 하지만 말이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사실이 나는 너무나도 두려웠다. 여행에서 아주 크나큰 족쇄가 될 것이 분명했다. 유튜브 예능에서 보는 엉터리 장난식 일본어가 아닌 진짜 일본어가 이곳에서는 필요했으니 말이다.


사진가 시점으로 다시 돌아와 가방 속에서 생각보다는 긴 잠을 자고 있던 라이카가 나의 시점 미지의 땅인 일본과 상호작용하기까지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인천 공항에서도, 착륙 직후의 나리타 공항에서도, 직원들의 서툰 영어로 간신히 끊어낸 나리타 익스프레스 표를 받아 들기까지도 아무런 감정의 파도가 일지 못했다.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밖으로 보이는 '일본스러운' 풍경이 나타나면서부터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그렇게 유리창으로 반사되는 빛들에 정면으로 맞서며 필름 첫 롤의 셔터들을 개방한다. 


도쿄역은 참 사람이 많았다. 서울의 붐빔과는 또 다른 같은 공간 내 더 높은 밀도의 느낌이다.
일본은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한 나라일지도 모른다

여정이 끝나고 한참이나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만, 서울의 '편리하고 진일보했으나 뻔하다'라는 느낌이 일본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낡은 간판들과 아직도 존재하는 지류 기차표 등이 그러했으며, 출장 기간 동안 머물렀던 호텔에서 만났던 100엔짜리 동전으로만 넣어줘야 작동하는 코인세탁기도 그랬다. 정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기록으로 담기에는 그 아날로그적 불편함이 정말 재미있는 것들이다. 필름의 풍미가 더해지니 나무랄 데가 없다. 필름을 능숙하게 다루더라도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의 요소들에는 대응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마치 시간을 잡아당기거나 밀어내는 듯한 억지스러움 없이 그냥 그 순간순간에 셔터를 눌러도 자연스럽다. 서울에서는 쉽게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이다.


기록들의 한 장 한 장 쌓여갈수록 이 시공간의 아기자기함과 세밀함, 그리고 불편함의 매력이 주는 것들에 익숙해져 간다. 겨우내 쌓인 눈이 봄비에 쓸려 내려가듯이 점점 발걸음에도 활력이 실린다. 빠르기보다 방향이 중요한 나라라고 생각했던 일본과 비로소 똑바로 눈을 마주칠 준비가 된 것이다. 



어느 정도 도쿄라는 도시와 그 분위기에 눈이 익어갈 즈음 잠시 들리려던 목적지 긴자에 도착하여 절정에 다다른다. 나의 시야 속에 펼쳐지는 그림은 더욱 거대하고 웅장해졌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강남보다도 거대한 긴자 중심가의 모습에 잔잔한 나의 마음도 파도가 치기 시작한다. 일렁이는 파도의 휩쓸어내는 빠른 속도만큼이나 긴자에서의 시간도 빠르게 지나갔지만 최대한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템포로 삶을 살아가는가, 어떤 감정들을 가지고 삶을 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담고 있는 이 도심은 어떤 속성의 배경일지 등을 곱씹어본다.


그렇게 인천에서 꼭두새벽에 시작한 긴 하루는 길이가 무색하게 굉장히 빠르게 도쿄의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아간다. 일주일 여정의 불과 첫날 만에 필름 하루를 다 썼을 만큼 밀도 높은 하루였다. 그 밀도 있는 필름 한롤의 마침표는 앞으로 펼쳐질 일주일의 '용의 머리'가 될지 '빙산의 일각'이 될까라는 기대 반 걱정 반의 감정이 교차했지만 이제는 일본을 제법 잘 즐겨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과, 벌써 첫 일본에서의 하루를 채워냈다는 알딸딸함에 취한 채로 출장지인 요코하마로 떠나는 지하철에 다시 몸을 싣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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