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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숲사진가 Apr 19. 2024

[ICELAND] 자각몽 (EP.4)

링로드를 출발하여 남부로 달리던 길, 어렴풋한 기억 속 장면

무언갈 그리워한 느낌. 의식과 꿈의 경계를 헤맨 것 같아


2022년 12월 20일 오후, 남부 아이슬란드 1번 국도 위


현 K-POP 인기 그룹 에스파의 노래 중에는 '자각몽'이라는 노래가 있다. 아마도 숨겨진 수록곡 명곡이라 많은 사람들이 아는 노래는 아닐 테지만, 나는 어디에서 처음 들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이 노래가 선사하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멜로디, 속삭이듯 나지막한 목소리의 표현, 그리고 그 순간의 나 자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가사를 계속 곱씹으며 아이슬란드 남부 쪽의 1번 국도 위를 달리고 있었다.


무언갈 그리워한 느낌

의식과 꿈의 경곌 헤맨 것 같아

자욱한 안갯속에

너무도 달콤하게

방향도 모르는 채

끝없이 거니는 꿈

Falling

Calling

Chasing

꿈인 걸 알면서도

깨어날 수 없는 이 꿈처럼 나

어둠 속에 길 잃은 밤처럼

홀린 듯이 헤맸어 끝없이 널


아이슬란드 서쪽에 위치한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남동부의 거점 도시인 회픈으로 가기 위해서는 아이슬란드의 광활한 남부를 지나야 했다. 국토 정중앙에 위치한 웅장한 고원지대 하이랜드가 북쪽으로부터 날아오는 모든 강풍과 악천후 등을 막아주고 있어 겨울에 여행하기엔 비교적 난도가 낮은 곳이기도 했다. 더불어 이 남부는 지난날 첫 번째로 아이슬란드를 방문했을 때 친구들과 이미 방문했던 곳이었다. 그때 방문했던 레이캬비크와 회픈 사이의 약 350km 길을 나는 다시 혼자 달리고 있었다.


그 구간은 내게 노래 가사 그대로 자각몽이었다. 너무나 오래되어 그대로 굳어버린 기억의 한 조각. 내내 그리워했고 꿈에서도 절대 잊지 않으리라 했던 장면이었지만 시간이 오래되어 어렴풋한 형체만 남아버린 아이슬란드 남부 평야의 광활한 평야가 내 눈앞에 다시 한번 선명하게 기억에 각인이라도 시키겠다는 듯 내 눈앞에 나타나고 있었다. 분명 그리워했던 존재임에도 낯선 순간들, 하지만 분명 머릿속에 있는 익숙한 공간감. 지금 이것이 현실인지, 꿈 속인지 혹은 그 사이 어딘가의 경계에서 정말 헤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재차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장면들을 보고 있는 순간, 아무래도 상관없이 그저 좋았다. 


흐릿하게 형체만 남아 있던 꿈속의 장면, 그것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2022년 12월 20일 오전, 레이캬비크 외곽 1번 국도


오전에 레이캬비크를 나설 때의 교통 상황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레이캬비크 시내에서 케플라비크 공항으로 오고 가는 길 마저 폭설로 하루 이틀간 막혔고, 비행기도 뜨지 못했다고 했다. 당연히 공항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노숙을 하며 피난민촌과 같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듣게 되었다. 하루이틀만 늦게 아이슬란드에 입국했어도 레이캬비크 입성은커녕 나도 공항에 갇힐 수 있었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몸서리쳤다.


다만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그 최소한의 운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며 기뻐할 여유는 없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 레이캬비크에 갇혀 있었고 링로드를 진행하게 될 1번 국도 기준으로 레이캬비크의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모든 길이 통행이 다시 재개될지는 미지수였다. 레이캬비크를 떠나 링로드를 출발해야 하는 당일 아침까지도, 끝내 아이슬란드의 대자연은 내게 명쾌한 답을 주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이 날 오전 도로 교통 정보 앱이 업데이트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헛웃음을 짓게 되었다. 이 날의 일정은 레이캬비크를 지나 남동부의 회픈까지 약 350km 거리 이동이었지만, 얄궂게도 레이캬비크와 회픈 사이의 구간 중 딱 절반만 통제가 풀려있고, 그 이후 나머지 절반은 계속 통제 중이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까, 슬퍼해야 할까를 고민했지만 우선은 마음을 가다듬고 출발해 보기로 하고 짐을 싸본다. 지금은 어떤 결과가 기다리더라도 일단 떠나야 할 때였다.


어렵사리 링로드를 출발한다, 레이캬비크를 지나 남동부 거점인 회픈까지 가야 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한 도로는 1번 국도이다. 이 1번 국도는 아이슬란드를 크게 한 바퀴를 도는 도로이며,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정돈이 잘 되어 있는 큰 도로였다. 즉, 1번 국도에 있는 한 웬만해서는 위험할 일은 잘 없는 것이다. 물론, 그 1번 국도 역시 대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무력해질 때가 굉장히 많다 (이 때는 그 사실을 꽤나 과소평가했다.) 반대로 다시 이야기하면, 도로 사정이 나쁜 날에는 어지간해서는 이 도로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 안전한 선택지가 될 터였다.


또한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도시를 벗어나는 순간 그다음 도시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필요한 물자나, 음식, 숙소 등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도시와 도시 사이 구간에는 오로지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진다. 간혹, 낙농업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소수의 민가가 도로변에 자리 잡고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의 넓은 화폭 안에 작은 점 같은 집 몇 개가 있는 것이라면, 사실상 인적이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만약 도시와 도시 사이의 경계를 지나는 동안 차에 기름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그대로 조난당하는 것이다.



레이캬비크에서 회픈으로 가기까지의 가는 길에 그나마 지날만한 도시라고 한다면 셀포스와 헬라, 비크이뮈르달 (보통 비크라고 부른다) 등이 있다. 부지런히 남부를 지나가면서 그 와중 틈틈이 갓길에 세워가며 풍경도 즐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여행자에게 절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각오하며 거센 바람과 흩날리는 눈을 헤치며 1번 국도를 나아간다.


아이슬란드에는 바람에 대한 경보 단계도 존재한다. 총 3단계였고 색깔별로 다르게 표시해 주는데, 내가 링로드를 출발하던 이 초반부에는 옐로 경보가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가급적 야외 활동을 자제해야 하는 강한 바람이 불고, 지형지물이 바람에 날려올 수도 있는 바람이다. 실제로 이 날 이따금씩 운전 중 창문을 열거나, 잠시 정차 후 바람을 쐴 때 느껴지는 풍력이 어마어마했다. 정말 과장을 한 마디 보태지 않고 바람에 차가 흔들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슬란드에 가서 꼭 느껴보실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셀야란드포스

겨울의 아이슬란드는 딱히 내가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지만, 내게 무심하고 차가웠다. 첫 마을이던 셀포스에서 잠시 차를 세우고 레이캬비크 숙소에서 싸가지고 출발하며 가지고 나온 주먹밥을 뒷 좌석에서 꺼내 까먹으며 아직도 어둑어둑한 겨울 아침의 아이슬란드의 고요한 풍경이 처음으로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하지만 이후에 마주치게 되었던, 지난번 아이슬란드에서 만났던 거대한 셀야란드포스 폭포조차 엄청난 한기에 꽁꽁 얼어버린 모습으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 셀야란드포스는 꽤나 거대한 폭포로 아이슬란드의 가장 대표적인 폭포 중 하나인데, 폭포의 물줄기 안쪽으로 들어가서 안쪽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돌아 나올 수 있는 뷰가 정말 압권인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 돌아들어가서 나오는 길은 결빙이 심해서 통제가 되어 있었고 폭포의 거대한 물줄기도 모조리 얼어 있었다. 그리고 이 셀야란드포스의 겨울잠을 목도한 순간 나는 통제된 도로에도 끄떡없던 생각의 물줄기가 처음으로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이 여행은 정말 쉽지 않을 수도 있겠어.'




(다시) 2022년 12월 20일 오후, 남부 아이슬란드 1번 국도 위


셀야란드포스의 겨울잠이 내게 준 충격과 여운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그 감정에 계속 붙잡혀 있을 여유는 없었다. 마치 평범한 한국 기업의 광고주들의 요청과도 같이 나는 그럼에도 여유를 잃어서는 안 됐지만 동시에 서둘러야만 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은 이곳에서 결코 길지 않았다. 자연은 결코 인간을 위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그 시계에 철저히 따르고 맞출 뿐이다.


본격 남부로 접어들며 나의 왼쪽에는 계속해서 높이 나를 굽어보고 있는 하이랜드, 오른쪽으로는 저 멀리 바다가 펼쳐지게 되는 넓고도 넓은 지평선과 황야가 펼쳐지고 있었다. 날씨는 남부 초반부까지는 잠시 고요했으나 이내 다시 한번 성난 기세로 나를 몰아치고 있었다. 이 시간쯤에 나는 하루의 남은 시간을 배분할 한 번의 선택을 다시 내리게 되었다. 아이슬란드의 남부에는 먼 옛날 미국 공군이 타다가 추락한 공군 비행기의 잔해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 Iceland Plane Wreck 이라고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지난번에는 보지 못했던 이곳을 보기로 하고 잠시 차를 주차장에 세운다.

안개가 아니고 모두 쌓인 눈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는 모습이다.
저 멀리 보이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비행기의 잔해가 있는 곳까지 걸어 들어가야 한다. 

비행기 잔해를 보러 가기로 했던 결심에 대해서는 사실 복합적인 감정으로 회상한다. 이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지는 회상하는 지금 시점에도 물음표가 많이 따른다. 왜냐하면 '주차장에서 금방 걸어가면 있겠지' 하고 치부해 버렸던 발걸음이 왕복 두 시간의 긴 걸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허락된 낮 시간이 길지 않은 가운데 이런 비효율은 아마 극도의 계획형 인간이었다면 억울해서 쓰러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의미 있는 선택'으로는 남게 되었다고 나는 지금에서야 결론을 내린다. 비행기 잔해까지 걸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사정없이 내게 달려들어 잠시도 날 가만 놔두지 않았던 강풍과의 싸움이었는데, 비행기 잔해까지 걸어 들어가는 길은 바람을 등지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 바람이 정말 얼마나 강했던지 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바람이 나를 거칠게 밀어대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말 과장 한 마디 보태지 않고 바람에 내가 떠밀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되돌아올 때는 바람과 역방향으로 맞선 채로 돌아와야 했으니 내가 반대로 내가 반대 방향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발걸음 하나하나를 뗄 때마다 천근만근이었다. 그 자리에서 순간에 집중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다. 렌즈 교환은 더더욱 말이 안 되는 일이었고 말이다.


걸어가던 도중에 이미 주차장으로 돌아가고 있던 한 커플을 만났다. 내가 "혹시 비행기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해?"라고 내가 묻자 그들은 "아직 훨씬 많이 남았을 거야. 못해도 50분은 더 가야 할 것 같은데?"라는 말을 듣고 슬슬 이 선택에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모든 것이 늦었다. 어떤 결과가 되던 밀어붙여야 했다. 그래도 대한민국 등산객들 대부분이 하는 거짓말인 "거의 다 왔어요." 같은 이야기 없이 솔직히 이야기해 준 점에 대해서는 고마움의 감정을 느꼈다.


사진이 흐릿하다고? 강풍에 눈이 날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 지점을 지나자 더욱더 거세지는 바람을 맞기 시작하면서 더 전진하다가 마침내 비행기 잔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추락 당시에 다행히 그 누구도 사망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 심정이 과연 얼마나 참담했을까 라는 의문을 곱씹어보며 이제는 추억이 많이 미화되어 기록으로 남게 된 사진들을 신중하게 담기 시작했다. 전문 사진가들 중에는 이곳까지 와서 비행기와 함께 오로라를 담는 사람들을 소셜네트워크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정말이지 난 못할 것만 같다. 그들의 열정에 감탄할 수밖에.


자연의 힘은 압도적이며, 거대했다. 그리고 섭리 앞에서 한낱 작은 존재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 여행에서 가장 큰 가르침을 바로 이 순간에 문득 느꼈다. 지난 7~8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내 사진 생활의 가장 마지막 종착지라고 생각했던 이곳, 꿈에서도 그려마지 않았던 장면이었지만 막상 모든 게 준비되어 있고 자신 있다고 믿었어도 결국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나 자신을 붙잡고 방해하는 거대한 힘과 맞닥트리게 된 것이다. 


결국 모든 일에 대해 내가 늘 준비되어 있고 자신 있다고 믿어도, 결국 우리의 앞에는 언제나 그 이상의 더 거대한 힘과 바람, 때로는 태풍까지 불어올 수 있었다. 우리는 삶에서 언제나 겸허히 그것을 인정하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한 것에 대한 준비를 착실히 하며 살아야 할 테다. 이미 그 마음가짐 하나 만으로도 이미 이 여행이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나 자신을 가득 채워낼 수 있었다.


추운 와중에 많은 생각과 스스로와의 대화를 나눌 수 있던 곳

그렇게 감상 반, 뼛속까지 파고들고 있는 추위 반으로 젖어들고 있던 내가 간신히 주차장에 도착했을 쯤에 한 가지 또 다른 나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남부 도로 나머지 절반이 오늘 내내 통제가 확정되어 기존 목적지였던 남동부의 회픈까지 갈 수 없게 된 것이다. 현장에서 즉각적이고 유연한 결정이 필요해졌다. 우선 근처의 대도시인 비크에서 급하게 하루를 머물 숙소를 찾아야 했고, 회픈에 이틀 예약해 두었던 숙소에는 하루 늦게 들어갈 예정이라고 양해가 필요했다.


우선은 막 땅거미가 질 즈음에 비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날 이 시간에는 회픈과 빙하호수 요쿨살론을 진작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살짝 아쉬웠지만 지금 이 순간의 최선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 최선은 비크에서 링로드 출발 이후 첫날밤을 푹 쉬며 보내는 일이었다. 아마도 나머지 일들은 그다음 날의 내가 또다시 분주하게 움직이며 채워나가리라, 결코 손해를 보았거나 예정이 있던 것을 잃은 것이 아닌 생각지 못했던 다른 길일 것이라며 믿으며 비크의 숙소로 향했다.



큰 고갯길을 한번 넘으면 이렇게 비크를 만날 수 있다. 아이슬란드 남부의 광활한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다.
아담해 보이지만 아이슬란드 남부에서 나름 대도시에 속하는 비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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