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부로 해외보다 한국에서 산 기간이 더 길어진 아이. 굳이 해외에서 낳고 키우다 한국에 왔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런 비하인드가 있는지 모를만큼 한국어를 매우 잘한다. 어려운 발음도 문제없다.
영국에서부터 태권도, 발레, 탭댄스 이거저거 시켜보았고, 한국에서도 미술, 체조, 바이올린, 첼로, 피겨스케이트 등을 가르쳐봤는데 놀랍게도 아무 것에도 두각을 나타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자 같은 학교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 한국어에 재능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맞다. 맞다. 그렇게 단시간에 한국어를 마스터하다니! 넌 한국어에 재능이 있는 거라며 크게 웃었다.
한국어를 마스터하기까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해외생활 중에 1년에 한번씩 한국에 올 때마다 가나다 문제집을 꼭 사왔고 낱말카드 선물 받은 것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이에게 보여줬다. 그런 작은 것들이 쌓여서 지금의 아이가 있게 된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내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이제 아이가 실수하는 우리말들은 해외에서 살던 어린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일반적으로도 누구나 쉽게 틀리는 그런 것들일 수도 있겠다.
- 엄마, 내가 겨우 재밌게 해줄게!
이 말은 '겨우'의 두 번째 뜻, '기껏해야 고작'의 의미로 아이가 말한 것이다.
겨우
1. 어렵게 힘들여
2. 기껏해야 고작
힘들게 노력해서 재밌게 해주겠다는 게 아니라 약간, 좀, 고작의 뜻으로 살짝 재밌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인데 아마도 애미인 나만 그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지 않나 싶다.
- 엄마는 상관 쓰지도 않네.
이 말은 내가 어떤 일에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아이가 한 말인데, 보통 '엄마는 상관하지도 않네' 또는 '엄마는 관심도 없네'라고 말하는 것을 '상관 쓰지 않는다'로 말한 것이다. '상관'은 '상관되다', '상관하다' 따위로 활용되는데 아이의 머리에서 상관을 '신경'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여 '신경쓰다'처럼 상관쓰다라고 표현한 것이 재미있었다.
- 0순위는 인기가 없는 데야?
그럴 수도 있겠다. 아이 시각에선 그럴 수도 있겠다. 무조건 제끼고 본다는 0순위랄까. 1순위가 좋은 건 알겠는데 사람들이 0순위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모양이다. 놀랍게도 일순위는 사전에 없는 말이지만 영순위는 사전에도 있는 표제어이다.
영순위 (零順位)
어떤 일에서 가장 우선적인 자격을 가지는 순위.
이런 독특한 질문들은 아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일 터. 점점 내 메모장에 아이의 질문과 작고 귀여운 실수들을 적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렇게 아이는 성장하는 거겠지.
최근에 양양으로 서핑수업을 다녀왔다. 해외에서도 수업을 한다는 선생님은 가르쳐보면 어린이들이 어른보다 더 잘한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는 서핑 1회차로 이번에도 드라마틱한 두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물을 좋아하는 것 같이 보이긴 했지만 서핑을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괜찮다. 내 아이는 이미 한국어에 대단한 두각을 드러내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