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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하이애나 Oct 18. 2023

가을 아침

반팔십. 열정에 대하여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진 탓에 늘 마시는 보리차를 전기포트에 데운다.

마시기 딱 좋은 50도에 맞춰놓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가라앉았던 부스러기가 뱅그르르 돌기 시작한다.

뜨겁진 않지만 따뜻한 온도.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그리고 문득 '열정'이라는 어색한 단어에 대해 떠올려본다. 딱히 떠오르는 기억이 없는걸 보아 그 시절 아무리 열정적이었다고 해도 그 행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까닭이었을까? 하지만 분명 있었을 거다. 나에게도 열렬히 무언가를 사랑했던 적이.




유치원 교사 시절 새 학기 준비로 야근을 일삼던 시절이 있었다. 하루 12시간 넘게 일하고 박봉을 받으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늘 웃었던 자람반 선생님 시절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휴일에도 깜깜한 유치원을 열고 들어가 혼자 종일 오리고 붙여서 게시판을 한껏 꾸미고, 아이들 선물까지 모두 손수 만들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건물 전체 입구가 잠겨 겨우겨우 퇴근을 한 적도 있었다. 단지 등원을 하는 아이들이 새로 바뀐 유치원 모습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나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니 대가 없이 그 일을 사랑했던 것 같다. 굉장히 오래전 일이라 잘 생각이 나지 않았을 뿐.


언젠가는 원장님께서 이 가상한 노력에 대해 칭찬을 해주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못마땅한 부분에 대한 지적뿐이었다. 늘 그래왔다. 노력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는 방향으로 돌아서버린 계기였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쌓였던 서운한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 감정을 모두 쏟아내었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고,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당혹스러운 표정의 원장님의 얼굴만 떠오른다.  '은주 선생님 내가 표현을 잘 못해. 잘 알잖아' 그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였다. 그리고는 퇴사를 했다.




사랑하는 것들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다. 보람을 느끼고, 대상이 주는 피드백에서 오는 안정감, 희열 같은 것 말이다.  나의 마음을 쏟아붓는다 해도 거기에서 오는 긍정적인 신호를 찾지 못하는 경험이 쌓이면 결국 열정의 끈을 놓아버리게 되는 듯하다. 일종의 결핍일지도.




알맞게, 적당히 열을 올려 편안하게 마시는 보리차에 익숙해질 때쯤,

100도씨로 팔팔 끓여 호호 불어 마시기 좋은 계절을 기다리며,

그때쯤 나의 열정도 다시 끓어오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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