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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글 Dec 17. 2024

백수의 하루

백수(최수경)

설거지를 하라고 해서 

설거지를 하다가 

밥그릇을 깼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나?

그래서 그랬습니다

설거지는 나하고 안 맞아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시키니 그렇지 

투덜댔더니

밥을 먹지 말라네요.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다시 설거지를 하고 있습니다

밥이 뭔지


“휴지를 아무 데나 두지 말라고 몇 번 이야기해야 아노, 자기가 귀찮으면 남은 안 귀찮나, 힘든 일은 꼭 내가 해야 하고, 다른 남자들은 힘든 일을 잘 해 준다고 하더니만......"

아내가 세탁실 미끄럼 방지 깔판을 들어내고 물청소를 하면서 투덜거렸다.


‘자기도 과일 먹고 아무 곳에 두더만,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치우면 안 되나(나도 아내가 아무 곳에 둔 휴지 치운 적 있음), 아~ 투덜거리는 소리 듣기 싫어, 부정어 계속 말하면 안 좋은 일만 생기는 데......,’ 

내가 잘 못한 것은 생각나지 않고 아내가 잘 못 했던 것이 없나 쉴 새 없이 머리를 돌렸다. 그럴수록 기분이 통해졌다.


세탁실 앞으로 갔다. 아내는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수세미로 바닥을 벅벅 밀면서 투덜댔다. 입구에 꽉 찬 재활용품 통 3개가 나와 있었다. 비워야지 비워야지 하면서 차일 피일 미뤘었다. 재활용품 통 3개를 들고나와 손수레에 실었다. 일반 쓰레기 비닐을 그 위에 얹어 한 손으로는 잡고 한 손으로 손 수레를 끓고 쓰레기 수거장으로 향했다. 가다가 박스가 떨어져 다시 실었다. 재활용품을 종류대로 분리했다. 아내 잔소리와 분리되어 좋았다.


 쓰레기를 다 비우고 집으로 오는 길 천천히 걸었다. 출입구 입구 구석에 운동복 바람으로 쪼그리고 앉아 담배연기를 벅벅 뿜어대는 40대로 보이는 아저씨가 있었다. 한대 빨고 싶었다.


집에 들어오자 세탁실 청소는 끝나고 아내는 청소기로 거실 청소를 하고 있었다. 걸레를 빨아 내 방으로 왔다. 침대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을 책장에 꼽았다. 책상 위 과일 껍질과 화장지를 치웠다. 풀, 필기구를 서랍에 넣었다. 모니터를 닦았다. 뽀얗게 먼지가 묻어 나왔다. 의자를 치우고 책 상 밑에도 닦았다. 배선을 정리해서 묶었다. 바닥을 닦았다. 먼지가 많아 걸레를 몇 번이나 빨아왔다.


아내는 청소기를 다 돌리고 방에 들어가 쉬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된 거실, 주방, 세탁실 기분이 좋아졌다. 내 방도 반짝반짝 빛났다. 훨씬 넓어 보인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싱싱하게 활어를 운반하려면 문어를 넣어 함께 운반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기가 문어를 계속 피하려고 도망 다니다 보면 싱싱하게 서울에 도착해 있다고. 백수에게 필요한 건 문어의 긴장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없이 느슨해져 집안 꼴이 엉망이 될 테니까.


퇴직 후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처음에는 그녀의 잔소리가 불편하고 짜증 나게 느껴졌다. 때로는 화가 나서 한대 치고 싶을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아내의 말들이 대부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내 잔소리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인내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 있다. 문득 깨달았다. 아내의 잔소리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우리 가정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섬세한 붓질과 같다는 것을. 아내 말 하나하나에 우리 집이, 삶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을.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찬바람에 심호흡을 했다. 책상 위 유리가 반짝이고 있다. 내 마음도 반짝인다. 또 내일이면 더러워지고 아내가 투덜대겠지만 오늘 하루가 반짝이길 기대한다. 백수의 하루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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