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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절충, 그리고 스테이블코인

by 김창익


혁명은 언제나 이상과 급진적 구호에서 출발한다. 구체제의 모순을 폭로하며 낡은 권력을 전복하려는 목소리는 사람들을 열광케 하지만, 실제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늘 조금 다른 풍경이다. 혁명은 대부분 극단으로 흐르지 않고, 기득권과 개혁 세력 사이에서 타협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질서가 형성된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국왕을 완전히 폐지하지 않았고, 미국 독립전쟁 이후 헌법은 중앙정부와 주 정부 사이에서 권한을 나눠 가졌다. 산업혁명기의 노동운동은 사회주의적 급진 대신 복지국가라는 절충으로 귀결됐다. 중국 개혁개방도 사회주의와 시장의 접점을 찾는 타협이었다. 이렇듯 혁명과 개혁의 흐름은 언제나 기득권과의 절충을 통해 사회적 제도로 정착했다.


오늘날 암호화폐와 법정화폐의 대립 역시 이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트코인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내세운 구호는 국가와 은행이 필요 없는 화폐, 즉 완전한 탈중앙화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크립토 진영도 깨달았다. 제도권과의 접점 없이는 대중적 확산도, 지속 가능한 신뢰도 얻기 어렵다는 사실을 말이다. 반대로 정부와 월가 역시 암호화폐를 처음에는 위협으로만 봤지만, 그 규모가 커지고 기술적 효용이 뚜렷해지면서 이제는 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양측은 충돌을 거듭하면서도 동시에 절충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접점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구조는 단순하다. 이용자가 1달러를 맡기면 발행사는 1달러 가치의 토큰을 발행해 준다. 표면적으로는 언제든지 실물 달러로 교환할 수 있으니, 안정적인 디지털 달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 뒤에는 복잡한 권력 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가 숨어 있다. 발행사는 이용자들로부터 받은 달러를 단순히 금고에 넣어두지 않는다. 대신 단기 국채, 은행 예금, 상업어음 등 유가증권에 투자해 이자를 얻는다. 이렇게 되면 발행사는 무이자 부채인 스테이블코인을 찍어내고, 그 대가로 받은 달러를 유이자 자산에 운용하면서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이것은 본래 국가가 발권력을 통해 누리던 주조이익을 민간이 사유화한 것과 같다.

정부 입장에서도 이 구조는 완전히 나쁘지 않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가 준비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에 투자하면, 이는 곧 미국 정부의 채권 수요를 늘리고 차입 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가져온다. 달러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으로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면서 사실상 달러화의 디지털 버전으로 기능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 그래서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불법화하지 않고, 제도권 안으로 편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즉, 정부와 크립토 진영은 서로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기에, 일정한 타협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또 하나의 축이 월가다. 월가는 전통적으로 예대마진을 통해 이익을 얻어왔다. 예금을 받아 대출로 굴리고, 그 차이에서 막대한 수익을 취하는 구조가 바로 은행 자본주의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스테이블코인 발행 모델은 겉으로 보면 이 전통적 구조와 다르다. 발행사는 예금자에게 이자를 주지 않고, 모든 이익을 독점한다. 따라서 초기에는 스테이블코인이 월가의 영역을 잠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월가 역시 이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찾기 시작했다.


첫째,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은 상당 부분이 은행 예금으로 들어간다. 즉,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대규모로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은행은 이를 운용해 수익을 낸다. 이는 은행에 안정적인 자금 공급원이 되는 동시에, 고객 예치금처럼 취급할 수 있다. 둘째, 스테이블코인이 발행한 달러는 디파이나 거래소에서 활발히 쓰이는데, 이 과정에서 월가의 트레이딩 부서와 자산운용사들이 새로운 파생상품과 금융상품을 만들어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새로운 유동성 풀을 만들어내며, 이는 곧 금융시장에 새로운 먹거리를 제공한다. 셋째, 규제와 제도화가 진행될수록, 대형 은행과 자산운용사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와 직접 협력하거나 인수합병을 통해 시장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블랙록은 이미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인 서클과 손잡고 준비금을 운용하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는 곧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스테이블코인의 기반 구조 속으로 들어왔다는 의미다. JP모건 역시 자체적으로 JPM코인을 발행하며 기업 간 결제에서 스테이블코인 모델을 도입했다. 즉, 월가는 스테이블코인을 파괴자로 보지 않고, 새로운 도구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월가의 수익 모델을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이 때문에 월가도 점차 스테이블코인 제도화에 동의하며, 정부와 함께 규제의 틀 안으로 편입시키려 한다.


이런 맥락에서 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화폐가 아니다. 그것은 탈중앙화 혁명의 이상과 국가·월가라는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가 만나 절충을 이룬 산물이다. 영국 명예혁명에서 왕권과 의회가 권력을 나눴듯, 미국 헌법에서 중앙정부와 주 정부가 권한을 분배했듯, 산업혁명기 자본가와 노동자가 점진적 개혁으로 체제를 유지했듯, 오늘날 화폐 혁명도 절충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가에게는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디지털 무기이고, 월가에게는 새로운 수익원이며, 크립토 진영에게는 제도화와 생존의 돌파구다.


앞으로의 화폐 질서는 이 절충의 정치학 위에서 재편될 것이다. 정부는 스테이블코인을 규제하면서도 디지털

달러의 확산을 묵인할 것이고, 월가는 이를 통해 새로운 금융상품을 만들며 수익을 확대할 것이다. 크립토 진영은 제도화라는 굴레 속에서 혁신을 유지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 균형점은 완전한 탈중앙화도, 완전한 국가 통제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 속 수많은 혁명과 개혁의 순간처럼, 양측이 서로 양보하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절충의 형태다. 스테이블코인은 바로 그 절충의 장이자, 화폐 패권 전쟁의 새로운 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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