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남편 기숙사에 들러짐을빼던날.초딩때부터 썼다는 낡디 낡은곰돌이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제대로 된 거 베고 잘 수 있게 해줘야지..'
방석처럼 납작해진 베개를 보며 짠한 마음으로 다짐했던 그 때,놓친 게 있다.구멍 날 때까지 빨지 않아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 그런 저만의공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온 사람이란 것.
대학원생이라 연구실에서 자주 밤을 새야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놀 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받는다 오해한 것 같았다.
각자 모임이 파한 후함께 귀가하기로 해놓곤 약속시간을 미루다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2시넘어서들어오면서는사과해봤자풀리지 않을테니 사과하지않겠다며곤조를 부리기 시작했다. TV불빛과 라면 냄새가원룸을 채우는 동안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워 훌쩍거렸고, 저 꼴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몇 번 데고 나서'놀다 올 때는 12시 전 귀가' 규칙을 주장했다.출근시간이 유연한 그가 술냄새 풍기며 뻗어있는 모습을 보고 집을 나설 때면신분적 이질감(?) 때문에 더 멀게느껴졌기때문. 협상 끝에 대중교통 막차 시간을 넘기지 않기로 정했다.
얼마 뒤월요일.한 잔 하고 들어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긴장됐지만 약속한 것도 있으니 믿어보기로 했다.
1시 반, 올 기미가 안 보여 전화를 걸었더니 곧 출발한다는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켜봤더니2시 반. 택시를 탔다면 왕복하고도 남았다. 3시가 넘어가자 무사히 들어오기만을 바라게 됐고 전화연결도되지 않아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4시 반, 5시...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깨달았다. 또 약속을 어겼다.
삼진은 쟤가 했는데 왜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지 따질 새도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이 사람과 떨어져야겠다. 기다리느라 잠조차 못 자는 날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삐삐삐삑.
짐을 얼추 챙겼을 6시 무렵, 도어록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섰다. 현관문이 여닫히며 날아온 술 냄새가 코까지 와닿았고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진짜 미안해. ㅇㅇ형이 오랜만에 왔는데 늦게 와서.. 그래도 형들이 택시 태워줬어."
해 뜨고 나서나타나한다는 소리가 택시비 안 들었다니.
"결혼했고,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제정신이야?"
"미안해."
기계적으로 세 글자만 반복하는 남편을 보자화는 거세졌다.
"이건 외박이지.그렇게 혼자 살듯 살 거면 진짜 혼자 살아."
"진짜 미안하다니까. 정 그러면 내가 나갈게."
그간 양보해왔던차 키와 함께 손에 든 짐가방을 보고서야부랴부랴말리고나섰지만내 분노를 잠재우기엔 턱도 없었다.
퇴근 후홧김에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초밥에 맥주 한 잔후 방으로 다시 들어왔더니평온한밤.집이든 여기든 혼자 놀다 혼자 잠드는 것은 똑같은데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불안할 일없어 좋다며 스스로위안했다. 하지만 해방감도 잠시,집 놔두고 뭐 하는 건가 현타가 밀려왔다. 낯선 방에서 익숙한 건 습관이 된 귀마개뿐이라 그날도 꾸역꾸역 끼고 잤다.
이틀을 보내자 남편은 본인이 집에서 나갈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밀어붙였다.슬슬숙박비가 아깝던 참이었에 못 이기는 척 접선했다.
"결혼하고 나서 잠을잘 못 자. 집에 올 지 안 올 지,언제쯤 올 건지 아무것도공유가 없잖아. 일할 땐걱정이라도 덜하지만.술먹을 땐지키기로 했잖아."
" 늦게라도 무사히 들어오면 되는 거 아냐? 난 자기가 잘 들어오면 그걸로 괜찮은데."
배우자를 룸메 정도로 여기는태도를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복장터질 지경이었다.
"오며가며 살아있는 거 확인하려고 결혼한 게 아니야. 하루 잘 보냈는지, 별일 없었는지물어보고 내일, 주말을 같이 바라보고 잠드는..그런관계이길 기대했어. 연락주고약속한 시간 내에 들어오는 건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배려인 거고."
잠자코 듣던 남편은뜻밖의 대답을해왔다.
" 평소에는.. 너 깰까 봐 일부러 아침에퇴근하고 그랬어."
새벽에 남편이 들어올 때마다귀마개와 안대를 끼더라도어쩔 수 없이깨곤했는데, 미안해서 연구실에서밤을새고 들어올 때가많았다는것. 술자리 문제에 '물타는 건가'싶다가도예상치 못한배려를 받고 있었단 사실에화가한풀꺾이는느낌이었다.그런 줄모르고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가 오해도 했었는데.
이렇게 남 모를 배려도 하는 남편인데술이들어가면 돌변해버리니더욱이시간적으로라도 제한을 둬야 했다.가출이 효과적인 충격요법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기죽은 남편을 보면서한 번 더 믿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상기했다.
종전이었다면 좋겠지만휴전이었다.비슷한 일들은더러발생했고 또 분노하며 다시 충돌했다.의외의 구원투수는세월..!그 시절텐션과 체력을서서히 앗아가더니점점 늦게까지 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자연의 섭리로 해결될 문제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속 끓이지도않았을텐데..나도 (적어도 내 생각엔) 이해의 그릇을 넓히게 됐다. 이젠 소통이 가능한 정도로의식이 남아있는지만 중요하다.
물을 베던 칼을 내려놓고 아예탱크가고갈되길 기다리는 건가 싶지만,물이 있어야과일을 씻고 밥도 지을 수 있긴 하다.오늘만 날인양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남편의 에너지가 적당히졸졸흐르기까지의 과정이 우리모두를변화시켰기에 소모적이지만도 않았다.물론다시 돌아가야 한다면곰돌이 베개를 발견하기 전으로.. 혹은 더 이전으로.. 가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