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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Oct 18. 2023

통금 전쟁

외박에 가출로 답하다

결혼 전 남편 기숙사에 들러 짐을 빼던 . 초딩때부터 썼다는 낡디 낡은 곰돌이 베개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제대로 된 거 베고 잘 수 있게 해줘야지..'


방석처럼 납작해진 베개를 보며 짠한 마음으로 다짐했던 그 때, 놓친 게 있다. 구멍 날 때까지 빨지 않아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 그런 저만의 공간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내온 사람이란 것.




 대학원생이라 연구실에서 자주 밤을 새야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놀 때도 똑같은 기준을 적용받는다 오해한 것 같았다.


각자 모임이 파한 후 함께 귀가하기로 해놓곤 약속시간을 미루다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새벽 2시 넘어서 들어오면서는 사과해봤자 풀리지 않을테니 사과하지 않겠다며 곤조를 부리기 시작했다. TV불빛과 라면 냄새가 원룸채우는 동안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워 훌쩍거렸고,  꼴을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몇 번 데고 나서 '놀다 올 때는 12시 전 귀가' 규칙을 주장했다. 출근시간이 유연한 그가 술냄새 풍기며 뻗어있는 모습을 보고 집을 나설 때면 신분적 이질감(?) 때문에 더 멀게 느껴졌기 때문. 협상 끝에 대중교통 막차 시간을 넘기지 않기로 정했다.





얼마 뒤 월요일. 한 잔 하고 들어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긴장됐지만 약속한 것도 있으니 믿어보기로 했다.


1시 반, 올 기미가 안 보여 전화를 걸었더니 곧 출발한다는 혀 꼬부라진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휴대폰 액정을 켜봤더니 2시 . 택시를 탔다면 왕복하고도 남았. 3시가 넘어가자 무사히 들어오기만을 바라게 됐고 전화연결도 되지 않아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4시 반, 5시...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깨달았다. 약속을 어겼다.


삼진은 쟤가 했는데 왜 내가 집을 나가야 하는지 따질 새도 없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사람과 떨어져야겠다. 기다리느라 잠조차 못 자는 날이 예고 없이 찾아온다.


삐삐삐삑.        


짐을 얼추 챙겼을 6시 무렵, 도어록이 열리며 남편이 들어섰다. 현관문이 여닫히며 날아온 술 냄새가 코까지 와닿았고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진짜 미안해. ㅇㅇ형이 오랜만에 왔는데 늦게 와서.. 그래도 형들이 택시 태워줬어."


해 뜨고 나서 나타나 한다는 소리가 택시비 안 들었다니.


"결혼했고,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정신이야? "


"미안해."


기계적으로 세 글자만 반복하는 남편을 보자 화는 거세졌다. 


"이건 외박이지. 그렇게 혼자 살듯 살 거면 진짜 혼자 살아."


"진짜 미안하다니까. 정 그러면 내가 나갈게."


그간 양보해왔던 차 키와 함께 손에  짐가방을 보고서야 부랴부랴 말리고 나섰지만  분노를 잠재우기엔 턱도 없었다.




퇴근  홧김에 예약해 둔 숙소로 향했다. 초밥에 맥주 한  방으로 다시 들어왔더니 평온한 . 집이든 여기든 혼자 놀다 혼자 잠드는 것은 똑같은데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불안할 일 없어 좋다며 스스로 위안했다. 하지만 해방감도 잠시, 집 놔두고 뭐 하는 건가 현타가 밀려왔다. 낯선 방에서 익숙한 건 습관이 된 귀마개뿐이라 그날도 꾸역꾸역 끼고 잤다.


이틀을 보내자 남편은 본인이 집에서 나갈테니 만나서 이야기하자며 밀어붙였다. 슬슬 숙박비가 아깝던 참이었에 못 이기는 척 접선했다.



"결혼하고 나서 잠을 . 집에 올 지 안 올 지, 언제쯤 올 건지 아무것도 공유가 없잖아. 일할 땐 걱정이라도  지만.  먹을 땐 지키기로 했잖아."


" 늦게라도 무사히 들어오면 되는 거 아냐? 난 자기가 잘 들어오면 그걸로 괜찮은데."


배우자를 룸메 정도로 여기는 태도를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지 복장 터질 지경이었다.


"오며가며 살아있는  확인하려고 결혼한 게 아니야. 하루 잘 보냈는지, 별일 없었는지 물어보내일, 주말을 같이 바라보고 잠드는..그런 관계이길 기대했어. 연락 주고 약속한 시간 내에 들어오는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배려인 거고."


잠자코 듣던 남편은 뜻밖의 대답을 해왔다.


" 평소에는.. 너 깰까 봐 일부러 아침에 퇴근하고 그랬어."


새벽에 남편이 들어올 때마다 귀마개와 안대를 끼더라도 어쩔 수 없이 깨곤했는데, 미안해서 연구실에서 밤을 새고 들어올 때가 많았다는 것. 술자리 문제에 ' 타는 건가' 싶다가도 예상치 못한 배려 받고 있었단 사실에 화가 한풀 꺾이는 느낌이었다. 그런 줄 모르고 일부러 나를 피하는 건가 오해도 했었는데. 


이렇게 남 모를 배려도 하는 남편인데 술이 들어가면 돌변해버리니 더욱이 시간적으로라도 제한을 둬야 했다. 가출이 효과적인 충격요법이 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기죽은 남편을 보면서 한 번 더 믿어줄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상기했다.




종전이었다면 좋겠지만 휴전이었다. 비슷한 일들은 더러 발생했고 또 분노하며 다시 충돌했다. 의외의 구원투수는 세월..!  시절 텐션과 체력을 서서히 앗아가더니 점점 늦게까지 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자연의 섭리로 해결될 문제인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속 끓이지도 않았을텐데.. 나도 (적어도 내 생각엔) 이해의 그릇을 넓히게 됐다. 이젠 소통이 가능한 정도로 의식이 남아있는지만 중요하다. 


물을 베던 칼을 내려놓고 아예 탱크가 고갈되길 기다리는 건가 싶지만, 물이 있어야 과일을 씻고 밥도 지을 수 있긴 하다. 오늘만 날인양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남편의 에너지가 적당히 졸졸 흐르기까지의 과정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켰기에 소모적이지만도 않았다. 물론 다시 돌아가야 한다면 곰돌이 베개를 발견하기 전으로.. 혹은 더 이전으로.. 가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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