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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키워키 May 07. 2024

너무 착한 남편은 착한 게 아니었음을

언제까지 악역춤를 추게 할거야

임용 후 지방으로 내려간 남편을 만나러가기로 한 날. 퇴근 후 무궁화호에 몸을 실었다. 3시간이 흘러 허리가 뻐근해져올 무렵 배웅나온 남편과 만나 한 이자카야에 자리를 잡았다. 한창 밥 먹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남편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네 형, 네.. 알죠. 아이고 어쩌나.."


불길했다. 전화기 너머의 인물이 누구인지 짐작갔기 때문.




 주 전 주말 아침, 전화를 끊고난 남편이 말했었다. "ㅇㅇ형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셨대. 자기랑 상의해보고 다시 전화하기로 했는데.. 돈 좀 빌려주고 싶어."


ㅇㅇ형은 남편이 대학원생이던 시절, 본인도 나을 바 없을텐데 후배들에게 매번 밥을 사주었다던 좋은 선배였다. 마음은 어차피 이미 정해졌을텐데 몰래 빌려주지 않은 게 어디냐싶어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 근데 돌려받지 않아도 될만큼만 빌려주면 좋겠어."


돈을 빌려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면(금전관계로는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돌려받지않아도 무방한 만큼만 빌려줘야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상대가 그 돈을 평생 갚지 못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럴 수 있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돈도 잃었는데 사람마저 잃는 건 너무 억울하다.


그 무렵 비트코인으로 소소한 차익을 거두었었는데 "이럴려고 벌었나봐" 라고 말하는 해맑은 남편에게 "번 거 보다 더 나가는데?" 라고 응수하려다 참았다. 상의 끝에 300만원을 송금해주었고, 또 열심히 일하면 된다는 다짐으로 하루하루 살고있었다.


얼마 안 가 그 형은 또 남편을 찾았다. 조금만 더 빌려줄 수 겠냐는 말. 조금이 얼마냔 말에 300정도라던. 호떡을 사먹으려 횡단보도 초록불을 기다리다 받았던 그 전화에 수없이 신호가 바뀔 동안 길을 건너지 못했다. 길 복판에서 동동거린 끝에 200만원을 또 송금해주었다. 호떡 사먹는 돈도 아까워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신당부했었다. "이게 진짜 마지막이어야 해."




그리고 오늘, 주말부부의 황금같은 금요일 밤에 또 한 차례 전화가 울린 것이다. "아버지 사기 당하신 그 건에 대해 소송을 걸어야하는데, 소송 비용이 필요하대. 소송 걸면 무조건 이길 순 있대." 그 형에 빙의되어 구구절절 읊는 남편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안 돼. 두 번이나 빌려줬잖아 이미. 우리도 돈 없어 오빠."


단칼에 끊어버려 심기가 불편했는지 회유투이던 말이 금세 거칠어졌다.


"아 진짜 갚을 사람이라니까? 솔직히 돈 백만원 없다고 죽냐? 또 벌면 되잖아 우리는."


"미안한데 그 형 차 팔았대? 월급 다 쏟아붓는 중이래? 갚을 지 안 갚을 지는 어떻게 알아? 차용증도 안 썼잖아. 차용증이 뭔진 알아?"

 

결혼 준비, 대출, 이사 등 굵직한 일들을 한 번도 맡기지 않아서 일까, 통장에서 끊임없이 돈이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지난 일들이 머릿 속을 스쳐가며 날선말들만 입밖으로 나왔다.


"자기가 싫다면 안 빌려주긴 할 거라고. 근데 왜 그렇게 인간미가 없냐?"


왜 우리끼리 싸우고 있는 걸까.


"그 형이 불쌍하지도 않아? 오죽하면 또 전화를 했겠어."


"그냥 오빠가 만만한거라고. 다 누울자리 보고 뻗는다고!!"



'등신'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간신히 집어넣었다. 저녁자리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집으로 오는 내내 싸움은 이어졌다. 싸움이라기 보다 혼자만의 절규에 가까웠다.


"오빠가 화내야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그 형이야. 왜 이렇게 사람 난처하게 만드는 지. 더 이상 어려울 거 같다고 딱부러지게 거절 못한 니 자신과 원인 제공한 그 형한테 화내야한다고. 내가 왜 무궁화호 타고 내려왔는 줄 알아? 돈 아끼려고 그래. 그렇게 아낀 돈 빌려줬는데 왜 이딴 대접을 해?"


"그래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남편의 원룸에 누워서도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다. 즐거울 수 있었던 오늘을 왜 망쳤는지 원통한데, 딱딱한 바닥에서도 떠나가라 코 골며 자는 남편을 보니 속이 터져 눈물이 났다.


남편은 주말부부를 끝내고 내려와 같이 살자 했었다. 그 말을 실현하려면 목표한 만큼의 돈을 모아야했다. 다시 올라올 때를 대비해 집을 분양받거나 사두고 오려면 최소한으로 필요한 금액. 사실 이것도 혼자만의 기준이긴 했지만, 휴직전 그 금액을 달성하고자 최선을 다해 절약중이었다. 만 원으로 하루 산답시고 구내식당을 애용했고 걸어다녔고 커피는 사무실에서 내려마셨다. 옷과 화장품엔 관심이 없었고 월급 날이면 얼마나 잔고가 늘어났는 지, 앞으로의 기대소득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계산기 두드려보는게 낙이었다. 목표금액에 가까워질수록 남편과 '정상적인' 가정을 꾸릴 날도 가까워진다 믿었다.


"이번 달까지 0000원 모았어!" 라는 말에 "오~~" 라는 단답을 할뿐인 남편이였지만, 가정을 지탱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은 점차 갖춰나갈 줄 알았는데. 성내는 모습에 맥이 탁 풀렸다.




화가 가라앉지 않은 채 부모님댁에 방문했다. 바로 옆에 살면서도 결혼 이후엔 부모님댁에 가는 게 불편해졌다. 갈 때마다 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척 해야하는 게 힘에 부쳐서. 그래서 남편과 다투더라도 혼자 여행을 떠날지언정 부모님께 달려간 적은 없었는데 그 날은 갈 곳조차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아빠와 술 한 잔 기울이며 드디어 이번 일을 일러바쳤는데 반전은 되돌아온 반응이였다.


"근데 돈 500만원 친한 사람한테 빌려줄 인정도 없으면.. 오히려 그러면 난 ㅁㅁ이(사위)한테 더 실망했을거야. 위키야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야."


부부싸움이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초기 진화에 나섰던 것일 수도 있지만, 놀랍게도 아빠의 한 마디는 삽시간에 내 마음을 누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듣고 싶었던, 내 안 깊은 곳에서 나오던 말들이기도 했나보다. 나 아닌 누군가의 입으로 듣고 싶었던 거다. 그게 더군다나 아빠여서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사람을 잘 믿고 마음을 쉽게 여는 남편의 그 선하다 못해 '맑음'을 좋아했다. 언제나 전적으로 나를 믿고, 월급마저 군말없이 나한테 다 입금하는 것도 어찌보면 그 성격 영향이겠지.. 다 보내느라 몰래 빌려주지도 못하고 잔소리나 잔뜩 듣고. 짠한 구석도 있다. 다만 착해도 너무 착해 지켜줘야 한다는 점..




2년 넘는 시간에 걸쳐 ㅇㅇ형은 대부분의 금액을 남편에게 갚아주셨다고 한다. 내역을 확인한 건 아니지만 우리도 확실하게 얻은 것이 있다. 얼마전 지인에게 수천 빌려주려는 동료에게 그러면 안 된다며 만류하는 남편의 모습. "결혼도 아직 안 했는데.. 목돈 들 일 많을텐데 말이야." 라며 우려섞인 혼잣말을 듣고보니 일종의 현실감각이 자라난 게 분명하다.


모르고 살뻔했던 무궁화호의 매력은 나를 위한 덤이었다. 민가와 가까운 철로 덕에 다양한 풍광을 바로 옆에 끼고 달리던 기차. 대판 싸우고 올라갈 때마다 마음을 진정시켜주 밖의 평화로운 모습들은, 출구 없을 것 같은 다툼을 묵묵히 위로해주는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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